2008년 2월 11일부터 5월 11일까지 90일에 걸쳐 다녀온
중미*남미 9개국(경유국까지 합하면 13개국이네요)방문 후기를 시작합니다.
자료를 정리해서 깔끔하게 다듬은 뒤에 차근차근 시작할까 했지만, 3개월 전의 기억은 물론 당시에는 명료하게 적어뒀다고 믿었던 기록들조차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뒤섞여버렸다는 걸 확인하고는 일단 시작부터 해놓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러그의 쓰임새 가운데 개인적인 추억보관 창고로서의 기능을 첫째로 꼽고 있는 저로서는 일단 보관하고 싶은 모든 순간들을 최대한 보관해두려고 하니, 읽으시는 분들은 '무슨 이런 시시콜콜....?' 이라고 불평하지 마시고 필요에 따라 건너뛰어가며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써내려가면서 윤곽을 잡아간 뒤 필요한 정보들은 말미에 다시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저의 발자취를 따라오시죠.
자, 그럼 갑니다~
P.S. : 여행기 제목을 영문으로 표기하는 이유는...
여행길에서 사귄 외국친구들이 블러그를 하면 주소 좀 가르쳐달라고 해서 가르쳐줬거든요.
설마 와볼까 했는데... 몇몇은 찾아와봤던 모양입니다.
어디가 어딘지 알고 싶다고 제목에 영문을 덧달아주면 안되겠냐는 메일이 왔어요.
헌데 그렇게 해보니 너무 기네요.
한국사람들은 내용을 읽어보면 한글 지명이 나오니까...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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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멕시코시티까지
보슬비 내리는 아침에 집을 나섰다.
아들넘이 공항리무진 정류장까지 태워다주면서 지금부터는 집 생각 완전히 접고 열심히 놀다 오란다.
보딩패스를 받으러 갔더니 내 이름을 보고 창구 직원이 당황한다. 저희들끼리 수근수근 의논하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더니 비행기는 꼭 타게 해줄 테니 기다려달란다. 눈치를 보니 나와 동명이인인 이가 있어 과테말라로 가야 하는 그이에게 내가 예약한 멕시코 도착편을 준 것 같다(나 과테말라로 가버릴 뻔했다).
뭐가 그리 복잡한지 20분도 넘게 기다렸다. 공항에 일찍 도착했기 망정이지... 보딩 못하는 줄 알았다.
혼자 간다는 부담감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 공항 대기실에서 말동무를 찾았다. 멕시코 언니네 놀러간다는 (소녀에 가까운) 아가씨와 과테말라 간다는 스타일 좋은 아가씨. 이 아가씨는 공항으로 오는 리무진버스를 같이 탔었다. 중국 인민군 모자 같은 것을 멋지게 눌러쓰고 있어 금방 눈에 띄었지.
내 예약과 엉켰던 남자분도 만났다. 과테말라에서 파견근무하신 지 7년째라신다.
인천공항에서 12시 25분 정시 이륙 - 2시 15분 나리따에 도착 - 3시간 대기한 뒤 비행기를 갈아탄다. 13시간의 지루한 비행 시작이다. JEN(JAL Entertainment Network)이 제공하는 영화 네 편 보고 음악 듣다 게임하다가... 아직 날짜변경선을 넘어본 적이 없는 이 아지매, 어제를 향해 날아가면 바깥은 과연 어떻게 변할까 상상이 안 되어 졸음을 무릅쓰고 창밖을 지켜본다.
아뿔싸, 깜빡 졸았나? 어느 순간 갑자기 밖이 환해졌다. 시간을 조정하지 않은 내 손목시계는 밤 12시 45분인데... 드디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군. 아니, 어제 사용해버린 하루가 재생된 건가?
하루를 더 얻었구나. 이제 새 날을 맞은 것처럼 살다 밤이 올 때 잠들면 된다. 출발지 시각은 잊어라.
좌석 앞에 모니터 붙은 비행기는 처음 타봤다. 영화채널 8개 음악채널 20개 게임 10개...
JAL 너무 좋다!고 했더니 KAL도 그렇다네. 싼 뱅기 밖에 못 타봤으니 그저 감탄감탄할 밖에.
헌데 승무원들은 창문을 닫아 아침빛을 차단하고 불을 모조리 꺼버리며 지금은 잘 시간이란다.
강요된 어둠과 동시에 고통이 몰려왔다. 안전벨트에 묶인 신세가 되어 꼼짝 못하고 거의 비슷한 기내식 네 끼를 받아먹었더니 그대로 얹혔는지 답답하고 메슥메슥한 데다 아랫배까지 뒤틀려 죽을 지경이다.
화장실에서 한바탕 몸부림을 치고 난 뒤에 스튜어디스를 불러 명치께를 가리키며 'stomache'라고 하고 아랫배를 가리키며 'diarrhea'라고 한 뒤에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못미더워 종이쪽지에 다시 '消化不良, 泄瀉'라고 썼더니 太田胃散이라고 쓰인 우표딱지 만한 봉지를 두 개 준다. 용각산 같은 향이 나는 가루약이다. 일단 하나 먹었는데 30분도 안 가 고통스러운 모든 증상이 신통하게 사라졌다.
급체와 싸우느라 탈진한 나머지 나도 남들처럼 얌전히 잠들었다. 비행기에서 시차적응 훈련을 미리 마칠 계획이었지만.. ㅎㅎ
뱅쿠버에 도착한 것은 뱅쿠버 시각으로 아침 8시 20분. 연료를 보충하고 청소를 마친 비행기를 타고 뱅쿠버를 떠난 것은 10시 20분.... 경유지의 대기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항공편을 선택한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스스로 칭찬해가며 나리타-뱅쿠버 구간에 비하면 낮잠 한숨일 뿐인 뱅쿠버-멕시코 구간을 즐기려고 애써본다. 하늘은 작열하는 태양빛으로 하얗게 타오르고 있다.
드디어 멕시코 후아레즈 공항 도착. 현지 시각은 오후 4시 45분이지만 캐나다보다 1시간이 늦으니 뱅쿠버부터 멕시코시티까지는 5시간 30분 걸렸다. 대기시간까지 포함해서 총 비행시간 25시간 30분. 참 멀리도 왔구나.
멋진 벽화가 이어지는 공항 내부
후아레즈 공항에서 숙소까지
멕시코에 거의 다 와서 내 자리 근처에 앉은 청년이 어학연수차 멕시코시티로 들어가는 스페인어 전공 학생이란 걸 알게 됐다(Y군). 우리 아들네미랑 동갑인데 우리 아들만큼이나 순진한 인상이다. 숙소 정했냐고 물어보니 아파트 얻을 때까지 며칠 묵을 한인 민박집을 소개받기는 했는데 너무 비싼 것 같아서 내가 가려는 호스텔에 한번 가보고 싶단다. 멕시코 지하철에 소매치기가 많다고들 해서 걱정이었는데 잘됐다, 시내 같이 들어가서 숙소 찾아보자고 반색은 했지만... Y군의 짐이 너무 많다. 게다가 지금은 퇴근시간이라 지하철이 만원인지 십만원인지도 모르겠고.... 여행길 첫머리부터 기세좋게 대중교통에 도전하겠다는 계획은 내일부터 펼치기로 하고 함께 택시를 이용하기로 한다(pre-paid 공항택시 150페소, 15$).
시내로 들어가며 창밖을 내다보니 꼭 필리핀에 온 기분이다. 규모는 훨씬 크지만 건물 스타일이나 고가도로, 도시의 색채, 분위기가 영락없는 마닐라 느낌. 필리핀 여행이 좋았기 때문일까, 필리핀 비슷한 이 나라 역시 첫 느낌이 좋다.
인터넷에서 봐둔 호스텔 '까사 비에하'는 지하철 1호선 Sevilla(세비야)역 부근... 시내 중심인 소깔로보다 안전하고 조용하며 지하철 역에서 1분거리니 교통도 좋다고 해서 선택한 숙소다.
도미토리 있는지 물어보니 딱 한 자리 남았다면서 4인실로 안내하는데, 좁은 방안에 빡빡하게 놓인 이층침대 두 개를 보는 순간 (그때만 해도) 도미토리 숙소가 처음인 나로서는 서양 남자애들 속으로 혼자 뚜벅뚜벅 들어가 드러누울 엄두가 안 나더군.
Y군에게 '너 저 침대 쓸래? 난 다른 집 찾아봐야겠다. 여행 첫머리부터 비싼 더블룸 혼자 쓰긴 좀 그런데....' 했더니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더블룸 쓰시죠. 280페소니까 반씩 나누면(16$) 그런대로 가격 괜찮을 것 같은데요.' 하고 붙잡는다. 낯 안가리네, 기특한 녀석... 그럼 그러지 뭐. 예정보다 살짝 비싸지만 첫 숙소니까..
짐 풀어놓고 호스텔 구경에 나선다.(사진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로비 겸 거실에 앉아 있는 뺀질이 알베르또(직원)
누구 발? 누구 배낭?
아침식사가 제공되고 요리할 수 있는 부엌. 창의적인 펌프가 달려 있는 물통에 주목!
4인실 거주자 네덜란드 부동산 중개인 Stephen
아슬아슬한 계단을 돌돌 말아 올라가면
내가 제일 좋아했던 장소가 나온다(Smoking Area).
낡은 건물 틈새에 자리잡은 선인장과 위성안테나에 앉아 노는 비둘기를 보려고 아침마다 올라갔다.
(요기까지 쓰다 너무 졸려 중단. 신새벽에 말짱히 깨어나 마무리를 한다. 지금 시각이 오전 세 시.. ㅎㅎ)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
호스텔은 분명히 여독을 풀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장기여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착한 가격이라는 장점 외에도 다양한 인생들을 만날 수 있고 알짜배기 정보와 좋은 동행자, 운이 좋으면 좋은 친구까지 만날 수 있다는 초강력 장점을 가진 곳이다. 나의 첫 호스텔 경험지는 다행히도 (이후의 호스텔들과 비교해보건대) 적당히 깔끔하고 적당히 오붓한 곳이었다.
작년 11월부터 세계여행을 시작했다는 스코틀랜드의 결혼 3년차 스투어트와 로라 커플, 여행을 위해 집을 팔았지만 더 소중한 사랑과 추억을 샀단다. 커플끼리 다니는 팀 같지 않게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쾌활한 커플이다. 매년 8월에 열리는 에딘버러 축제 얘길 한바탕 들려줬다(표가 너무 비싸 정작 자기들은 가본적이 없다면서도...ㅎㅎ)
네덜란드에서 온 스테판. 지나친 동안과 넘치는 명랑함 때문에 천진난만 소년 같지만 이미 30대 중반에 들어선 속깊은 사람이다. 한때는 제법 잘나갔던 부동산 중개인이지만 부자가 되려면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부자 되기는 포기했단다. 매년 휴가 때면 어김없이 멕시코를 찾는데 이번이 네번째란다.
멕시코 짬밥이 늘면서 현지인 친구들도 많이 생긴 그에게 멕시코 시티는 들고나는 비행기의 정류장 정도일 뿐 멕시코에 오면 주로 지방도시에 사는 친구들 집에서 머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멕시코 여행을 시작하면서 길에서 배우기 시작했다는데도 그의 스페인어는 남다르다. 그렇게 유창한 데도 그는 저녁 8시쯤이면 규칙적으로 리셉션에 앉은 아가씨와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떤다. 저녁은 절대 혼자 먹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을 본받아 나도 여행기간 중 가능하면 저녁을 혼자 먹지 않도록 노력해봤지만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매일 아침 멕시코 시티 외곽으로 자원봉사를 나가고 있는 이탈리아인 마르꼬. 대단하게 불거진 근육에 주먹코, 무성한 콧수염까지 길러 꼭 뽀빠이 아저씨 같은 이 터프가이는 뜻밖의 수줍음으로 사람들을 당황케 한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잘 안돼 그러나? 잠깐잠깐 옥상에서 담배 나눠 피운 순간 밖에 없는 이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두 달 뒤 이과수에서 다시 마주쳤기 때문일 꺼다. 자원봉사 한 달 마치고 한 달간 남미여행중이라는데 십년지기를 만난 것처럼 지나치게 반가워하더군.
비틀즈의 고향 리버풀에서 왔다는 내 또래의 빡빡머리 아저씨. 두 시간 넘게 떠들었는데 이름도 모른다. ㅎㅎ 비틀즈 얘기 하다가 스테판이 끼어들면서 갑자기 쌍둥이 얘기로 전환(알고보니 스테판이 쌍둥이였다) 엉뚱하고 흥미로운 쌍둥이들 얘기 실컷 들었다. 특이한 관심사가 많은 이 아저씨는 내일 전미대륙의 나비가 모두 모이는 모렐리아로 떠난다고 했다. 나도 이틀 후 과나후아또로 떠날 예정인데 그곳이 가는 길목이라니 귀가 번쩍.
오불당에 '동행구함' 광고를 낸 뒤 코스는 다르지만 첫 기착지인 멕시코시티에서 한번 볼 수 있지 않겠냐는 쪽지가 오간 적 있는 '피고'씨(법적 소송으로 시달리고 있나 했더니 좋아하는 축구선수 이름이란다).
나보다 더 긴 비행시간에 시달리고(캐나다에서 열 시간 넘게 공항을 지킨 모양이다) 파김치가 되어 도착했는데 계속 소화불량에 시차 적응도 쉽게 못하여 낮에는 자고 새벽 두 세시에 일어나 호스텔 부엌과 거실을 배회하는 양이 보기 딱했다. 게다가 (유럽, 동남아 등 여행경력도 나보다 많은데) 입맛마저 고질적인 토종이라 넘치는 멕시코 음식을 두고 인근 한국음식점을 찾거나 한국식품점에서 반찬을 사와 고집스레 밥을 짓는 걸 보니 앞으로 고생 좀 하겠구나 싶었다. 먼저 까사 비에하를 떠나며 안쓰러움에 뒤꼭지가 땡겼지만 뒷날 쪽지가 날아온 걸 보니 건강도 회복되고 현지적응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다. 지금쯤은 '피고'씨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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