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바쁜 하루. 9시 반 첫차로 안띠구아에 간다 해도 열두 시 반 도착,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최대한 싼 표를 구해서 2시 버스를 타면 산뻬드로 가는 마지막 보트가 6시에 있으니 오늘 안으로 돌아올 수 있겠다.
레베카는 친구가 후에후에떼낭고에 도착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고 오후에 그리로 가야겠단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속은 쓰리지만... 어차피 나도 내 스케줄에 따라 내일이면 홈스테이로 옮길 것이니 그녀를 잡을 수도 따라갈 수도 없다. 4월 중순쯤 우리 둘 다 콜롬비아에 있을 테니 이메일로 서로 연락하자는 약속을 남기고 아쉬운 작별.
시간이 촉박하여 여행사 버스를 탔다(편도 45께쌀). 이 버스는 호수를 건너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 정상으로 난 길로 가는데, 산악지역을 벗어나는 데만도 1시간이 걸린다.
이 길은 보트로 건너오는 것과는 또다른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짙은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꼬불꼬불 돌아가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 파란 호수가 나타났다 숨었다 하고,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어 구름도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다. 안띠구아에 다시 갈 일이 없었다면 윗동네에 어떤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아랫마을마을만 돌아다니다 떠났을 텐데....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내 옆에 앉은 알래스카 아저씨는 일거리가 없는 겨울이면 늘 이곳으로 와서 겨울을 나는데, 산 뻬드로에서 산 끌라라까지 걷는 이 코스를 따라 여러 번 트레킹 했다고.... 5시간 정도 걸린단다.
그 정도면 나도 한번 걸을 만하겠다니까 혼자는 위험하니 절대 시도하지 말란다. (정말 산이 너무 깊어 사람 그림자도 없다). 그래도 뚝뚝이를 대절하든 누구를 꼬여서 함께 올라오든... 산 뻬드로에 있을 동안 꼭 한번 걸어봐야지.
산 뻬드로 마을과 가장 가까운 산 후안 마을의 학교.
산 후안 마을의 교회. 이 마을은 서양식 까페로 치장한 산 뻬드로와는 달리 소박하고 차분하다.
산 끌라라 마을로 가는 길(해발 3000미터에 나 있는 길이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은 하도 굴곡이 심해 한 장도 못 찍었다.
솔롤라를 지나니 왕복 6차선으로 시원하게 닦인 길이 나타난다. 직접 운전하며 달려가는 상상 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멋진 길.... 그러나 이어서 공사구간이 나오고 답답한 정체구간 시작이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지진으로 길이 끊겼는데 아직도 복구중이란다.
미련한 교통정리와 머리 들이밀기 때문에 도무지 풀릴 줄 모르는 정체구간에서 시간 다 보내고... 1시가 다 되어서야 안띠구아 도착.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둘러야 한다.
버스기사가 소개해준 여행사로 갔더니 778$, 동네 사람들이 알려주는 다른 여행사로 뛰어갔더니 780$, 또 다른 집에 가봐도 거기서 거기..... 도무지 대책은 안 서고 가랭이는 찢어질 지경이고 배는 고프고...
시계를 보니 헉, 어느새 2시가 넘어버렸다. 아이고, 집에는 또 어떻게 간댜?
바쁜 와중에도 도저히 그냥 못 지나치게 만드는 아이들... 부활절 준비 때문에 차려입은 복장인 듯.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일단 밥부터 먹고...
다행히 누들 코리아가 근처에 있었다. 제일 빨리 되는 한국음식(라면) 먹고, 그 와중에 저녁 먹으려고 김밥 하나 포장시켜서 로컬버스 종점으로 뛴다. 빠나하첼까지 가는 투어버스가 있긴 하지만 그건 출발이 네 시니 차라리 로컬버스가 빠르겠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어제보단 좀 덜 붐비지만 2인용 의자에 네 병 앉아가야 하는 사정은 여전하다. 내 쪽으로 쏠려있는 과테말라 사람들의 신기한 눈초리도 여전하고.... 어쨌든 내 머리속은 복잡하다.
이제 어쩌나... 파나마까지 기냥 버스로 내달릴까? 나흘길이라니 니카라과에 있는 C에게 연락해서 좀 쉬었다 갈까? 파나마까지 간다면 그 김에 보트로 다이렌 갭 넘어가는 시도나 한번 해봐?
아, 다시 나를 압박하는 정체구간....이거 잘못하면 오늘 빠나하첼에서 잘지도 모르겠군.
어제처럼 갈아타고 갈아타고... 고달프게 달려왔건만 부두에 도착하니 public boat는 떠나버렸고 자가용 영업하는 아저씨들만 열심히 호객하고 있다. 350께쌀 달라는데, 돌았나? 산 뻬드로에서 놀릴 방과 빠나하첼에서 얻을 방값을 합쳐도 50께쌀이면 된다. 차라리 자고 가지 뭐...
무정한 배야, 나 좀 태우고 가지.... 흑흑흑!
어제 묵었던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간다.
별로 운은 좋지 않았지만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레베카가 없으니 쓸쓸하다. 초저녁부터 할 일도 없지만 마음이 가라앉아 그런지 어디 나가기도 싫고...
마당에 앉아 김밥 까먹고 있자 숙소에 있는 애들이 관심을 보이는데도 하나 먹어볼래?는 커녕 말 한 마디 안 섞었다. 설상가상 오늘 내가 든 방의 문은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두어 번 들락거리고 나니까 몸만 간신히 빠져나올 정도로 빼끔한 상태에서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다. 주인은 벌써 퇴근을 했고....
할수없이 세수만 겨우 하고(세면도구를 안 챙겨와 물양치에 물세수만 하고 그냥 말렸다는...) 방콕신세가 되어버렸다. 문도 못 닫고 잤다니까. (하긴 누가 들어오기도 힘든 상태니 뭐...)
정말 우울한 저녁이었다.
숙소에서 일찍 나와 첫 배 시간까지 시간을 죽이려고 오래오래 아침을 먹던 까페.
햇빛은 어제와 다름없이 찬란하건만 오늘 내 카메라에는 쓸쓸하게 찍힌다.
여기서 역시 산 뻬드로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는 히사꼬를 만났다.
일본 여행자를 만나면 대개의 경우 언어소통이 불편해 인사만 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심정적으로는 제일 반갑지만) 이 사십 대의 멋진 독신여성은 미국에서 5년 가까이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영어가 아주 유창하다. 지금은 일본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는데 2주간의 휴가를 즐기고 있단다. 한국을 아주 좋아하고 조만간 한국에도 한번 놀러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 친구를 사귀고 싶었는지 나와의 대화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내가 안띠구아에 오게 된 사연과 판아메리카 고속도로로 파나마까지 가면 어떨까 고민중이라는 얘길 듣더니 자기가 이번에 다녀온 곳이 코스타리카라면서 교통편과 숙소 등 정보를 열심히 챙겨준다. 당시 나는 좀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좀 건성이었지만 이야기하면서 차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가보는 거야! 나는 최선을 다했어. 다른 선택은 없어. 이제 주어진 길을 가면 되는 거지.'
겨우 한 시간 반 정도 같이 있었을 뿐인데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여행중에 두 번이나 그녀의 메일을 받았다. 나의 첫 일본인 친구 히사꼬, 정말 고마워. 한국에 꼭 놀러와라.
산 뻬드로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이 열한 시라 서둘러야 했다.
배낭을 안 맡아준다니 할수없이 지고 나오긴 했으나 다섯 시까지 어디서 개기나?
우선 피씨방에 가서 파나마까지 가는 버스 검색. 판아메리카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며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1박, 니카라구아의 마나구아에서 1박, 코스타리카의 산호세에서 1박, 그리고 파나마에 도착하는 Tica버스를 타면 되겠다. 끔찍하게 긴 여정이지만 어쩌면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르지. 가는 길에 C도 만나서 하루 정도 놀고...
C에게 우선 메일을 쓴다. 유치부 때부터 고등부 때까지 교회에서 함께 자란 친구지만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고(몇 년 전 소식을 전해들은 뒤 안부메일 두 세번 오가긴 했지만) 어떻게 변했을지도 몰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분명히 반가워할 꺼라는 확신이 있었다. 짜식, 눈칫밥 먹이기만 해봐라! ^^
호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 오래오래 먹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학교로 올라가니 기다리고 있던 당직자가 나 있을 집으로 전화를 해준다. 곧 아리따운 아가씨가 날 데리러 왔다.
일주일간 머물렀던 민박집 안주인 알렉산드라와 딸네미 뻬뜨로나
홈스테이 할 집의 딸네미란다. 내가 서툰 스페인어를 꺼내드니 자기 영어 할 줄 아니까 영어로 말하란다.
몇 살이냐고 물어보니 서른살이란다. 너무 젊은데? 깜짝 놀라면서 아이가 있느냐고 물어보니 묵묵부답.(나중에 알고 보니 열 세살이었다. 이런 실례가...ㅡ.ㅡ ;; )
이 집 안주인은 마흔 살의 건강하고 쾌활한 알레한드라, 남편은 마흔 두 살의 간호사 뻬드로.... 말은 간호사지만 아픈 사람 집으로 왕진을 다니는 마을의 의사 역할을 하고 있다. 성당이 아니라 교회에 다닌다니 혹시 학원이 기독교 쪽에서 세운 거 아닌가 짐작해본다. 민박집을 교인 중에서 선택한 게 아닐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개화된' 가정에 온 것 같다. 눈치들이 빨라 내 서투른 스페인어도 잘 알아들어주고 얘기도 잘 건네줄 것 같고... 민박 운이 괜찮은 것 같다.
tigo 표지(통신회사 광고) 왼쪽으로 들어가는 문이 내가 머물 집 현관.
원래 알레한드라네 가족이 살았던 이 집은, 현재 2층은 외국학생들을 위한 홈스테이로, 1층은 주방 겸 식당 및 가게로 사용하고 있고 자기네는 골목 건넛집에 살고 있다. 하지만 밥 세끼는 이곳 주방에서 준비하여 함께 먹기 때문에 하루에 최소한 두 번은 이 집 식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알레한드라가 심심파적으로 운영하는 소매점.
아침이면 진열장 맨 위칸이 따끈한 빵으로 꽉 찬다. 냉장고 전원은 늘 꺼져 있고.... ^^
내 방. 철문으로 나가면 베란다가 있다.
내가 머물 동안 다른 학생이 없어 넓은 거실을 혼자 독차지.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가족사진.
왼쪽으로부터 께찰떼낭고의 대학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아들, 남편 뻬드로, 알레한드라, 민박했던 외국학생들, 딸네미 뻬뜨로나.
이제 내 집이 생겼으니 배낭 속에 쟁여뒀던 것 다 끄집어내어 진열해놓고 거풍하고....
밀린 빨래 해놓고 내려가보니 알렉산드라 부부가 저녁예배 보러 간다고 같이 가보겠냔다. 나도 (구경) 가볼 생각이지만 같이 갔다간 중간에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 사양하고 나는 우선 마을구경을 나갔다.
이 마을의 센트로는 가장 높은 지대에 있다. 여느 센트로처럼 성당이 있고 시장이 있고 마을회관이 있고 학교가 있고.... 내가 내일부터 자원봉사를 하게 될 특수학교는 시장 뒷쪽 마을 광장(운동장) 끝에 있다.
마을극장(auditorium) 뒷편에도 퍽 가파른 산이 버티고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성당이.... 자리가 모자라 밖에까지 서서 미사를 본다.
지대가 높아 호수 건너편 산봉우리가 마주보이는 센트로 광장.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의 이름을 딴 마을답게 마을의 중심에 베드로상이 서 있다.
그의 과오를 깨우쳐준 수탉과 함께....
마을 회관
생닭 파는 집인지 튀겨 파는 집인지 모른다. 워낙 닭을 싫어해서... 안 들어가봤다.
아무튼 간판은 '임금님 닭집'(체인점이다)
과일은 종류도 많고 엄청 싸다.
워낙 대중교통이 부족한 동네라...
이 마을의 밤거리는 하나도 위험하지 않다. 동네 마실꾼들이 밤늦도록 나와 논다.
마을 광장. 낮에는 축구하는 애들로 가득찬다.
센트로에서 3분도 안 걸리는 지점에 있는 알레한드라의 집에서 산띠아고 도크까지 내리막길이 맹렬하게 내리꽂히는데 그 중간지점에 학원이 있다. 내일부터 저 길 오르내리려면 무릎이 죽어나겠다.
마을길 어디나 돌이 깔려 있다. 스페인 정복 시절에 깐 거라 닳고 닳아서 퍽 미끄럽다.
나도 내일부터 쟤들처럼 학교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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