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중남미

Peru7 - Arequipa

張萬玉 2008. 6. 25. 15:57

Sacred Valley 투어에서 돌아오니 약속대로 여행사 차량이 대기하고 있다. 덕분에 승차시간 간신히 맞췄다. 

개찰구로 들어가려는데 이 표 아니라고... 창구에 가서 표를 바꿔야 한단다. 터미널에서 직접 산 표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여행사에서 산 표는 버스표가 아니라 예약증명서 같은 거다. 헌데 표를 바꾸면서 보니 세상에... 버스 티켓 가격은 80솔밖에 안 하네... 내가 여행사에 낸 돈은 140솔... 멍청이가 따로 없다.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터미널이 멀거나 위험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투어가 포함된 티켓도 아니고.... 내가 왜 이 표를 여행사 통해서 샀을까? 조금은 더 받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두 배 가까이 받을 줄은 몰랐네. 

내가 언제부터 여행사를 이용하기 시작했나. 바예스타 투어 때부턴가? 언제부터 터미널 찾아다니는 부지런함을 포기했나. 계속 룸메이트들과 뭉쳐다니다 보니 혼자 여행하는 사람다운 책임감이 없어졌니보다. 비교적 여유있게 다니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돈에 대한 감각도 없어진 거지. 80솔이면 나흘 숙박인데 정신 차려라. 무늬만 배낭여행이지 진짜 배낭족다운 배낭여행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

마추픽추 가던 날 크리스티나가 택시 기사에게 눈먼 돈 주고 나 바본가봐...하며 화를 못 삭이던 일이 생각났다. 지나간 실수에 대해서는 빨리 잊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이번만은 안이해진 나 자신을 용서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마음이 찝찝해 그런가 이번 밤 버스의 불편함은 유독 짜증스럽다. 

다리 뻗게 만든 판이 오히려 불편하다. 다리 쭉 뻗으면 무게가 다리로 내려가니 관절이 더 아픈 것 같다. 옆좌석이 빈 버스에서 하던 식으로 몸을 옆으로 돌리고 다리를 꼬부려 보니 한 좌석에서 그 자세를 취하기에는 너무 공간이 좁아 허벅지에서 쥐가 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게다가 식사라고 나온 게 닭고기다. 쌀밥만 두어 수저 떠넣고 말았다. 담요를 덮었는데도 어찌나 춥던지 잠도 안 오고... 잠 못드는 밤버스의 밤은 너무너무 길다. ㅜ.ㅜ

 

내 옆자리에 우리나라 재야 여성운동가 같이 생긴 페루 여성이 앉았는데 먼저 말을 건다. 남자처럼 짧은 커트머리가 백발인 데다 안경을 끼어 지적으로 보인다. 50대 중반 정도? 영어는 전혀 못하지만 스페인어가 짧은 나를 위해 천천히 얘길 하고, 가끔 내 표현을 고쳐주기도 하고.... 직업을 물어보니 카톨릭 교회 소속으로 일하지만 수녀는 아니고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교회 밖에서 일한단다. 그거... 내가 알고 있는 말로 하면 노동사목 아닌가? 87년 무렵에 가끔 조우하기도 했던.... 어쩐지 예사 인물 같지 않더라니...

 

나도 여성노동자 단체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단체도 제3세계 여성단체와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과 멕시코의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고 그 운동에 수녀님들이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우리 나라에도 교회 밖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카톨릭 성직자들이 있다, 얼마 전에도 재벌의 비리가 폭로되는 큰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에도 카톨릭 성직자들이 깊이 관여했다... 등등 주워섬겼더니 자기도 그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페루 정치상황이 궁금해서 우뻬뻬에 대해 물어보니 좌익정치단체이고 현재 대통령은 좌익은 아니지만 중도좌파 정도인데..... 하다가 말꼬리를 흐린다. 어려운 얘기가 나오니 내 스페인어가 바닥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국내 정치얘기를 외국인에게 까발리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다. 

한 시간 가까이 얘기하다가 좀더 당신의 마에스트로가 되어주고 싶지만 자기는 할 일이 있다고..... 아레끼빠에 국제컨퍼런스가 있어 참석하러 가는 길인데 발표 준비가 덜 됐단다. 밝지 않은 전등 아래서 돋보기로 바꿔 끼고 두툼한 프린트물을 꺼낸다.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자는지 마는지 찌뿌둥한 상태로 날이 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에 불이 켜지고 담요를 걷는다. 5시 반.... 자라는 시간이 끝나니까 슬슬 졸음이 몰려오는데 온 몸이 다 아프고.. 아이고, 이러다 병 나겠다.

허나 버스에서 내려 싸아~ 한 새벽공기를 마시니 새 힘이 난다. 그래, 지난 일은 털어버리고 오늘부터 여행 후반부를 다시 시작하는 거야. 적극적으로.... 마음의 문 다시 활짝 열고....

 

어제 투어에서 만난 캐나다 모녀가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워낙 버스가 커서(이층버스) 몰랐다. 자기네는 솔라 호텔에 예약했다고 그리로 함께 가잔다. 일단 택시를 함께 타고 아르마스 광장까지 들어갔다. 버스 터미널에 택시요금에 대한 안내가 붙어 있는 걸 보니 이 동네도 은근히 바가지가 성행하는 모양이다. 터미널에서 시내까지 규정요금은 3.5솔. 한 차당이냐 개인이냐 확인하고 타라는 조언까지 쓰여 있다.

 

우리도 한 차당 요금임을 확인했건만 어째 빙빙 돌며 그 호텔 멀다고 태클 거는 폼이 심상찮다. 페루의 택시 기사들이 즐겨쓰는 수법, 1) 그 호텔 멀다(혹은 꽉 찼다), 내가 가깝고 좋은 호텔 소개시켜줄께... 2) 투어 안 하냐, 내가 싸게 해줄테니 이 택시 전세 내라... 3) 요금은 1인당이다.... 등등.

론리 플래닛에 나온 지도를 보면 터미널에서 솔라보다 아르마스가 더 가까운데 어떻게 돌았는지 솔라에 먼저 도착했다. 3.5솔 주니 역시 1인당이라고 딴소리한다. 내가 흥정했으니 내가 나서야지 별 수 있나. 우리가 외국인이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분명히 내가 물어볼 때는 한 차당이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딴소리냐고 따지고는 아레끼파에 때해 여기저기 설명해줬으니 팁은 주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팁이지 요금 아니다.. 하면서 5솔 줬다. 캐나다 아줌마가 나보고 스페인어는 못하면서(캐나다 모녀는 스페인어가 아주 유창하다) 어쩌면 그리 말은 잘하냐고 웃는다.  

 

그 엄마는 말동무가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같은 호텔에 묵자고 잡아끄는데 도미토리가 60솔이나 한다. 호텔은 엄청 좋다. 나도 묵으면야 못 묵을 것도 없지만 이렇게 몰려다니다 보면 효도관광팀에 파묻혀다니게 될 것 같다. 도시가 작으니 또 마주치겠지, 저녁 일곱시에 성당 정문에서 만날까? 하고는 일어섰다.

 

원래 계획했던 숙소 로스 안데스를 찾아 걷다가 전기공사 차량의 아저씨들에게 길을 물어보니 데려다준다고 타란다. 아침부터 웬 횡재! 아저씨들은 영어하는 걸 즐기는 눈치였다.

숙소는 광장에서 돌 던지면 맞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도시 분위기가 밝고 편안하다. 여기서 딱 이틀 잘 예정이라 시간이 있을라나 모르지만, 쿠스코 때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여행자 구역을 벗어나보고 싶어진다. 

 

Hostel Los Andes. 최근에 리모델링 한 듯...  깨끗하고 널찍하고 편리하고 친절하다. 강추!

 

마음에 딱 드는데 도미토리에 빈 침대가 없단다. 더블룸은 하나 비어 있는데 아침 포함 33솔(도미토리 15솔)이다. 그래봐야 12불... 멕시코 도미토리 수준이지만 여행사에게 헛돈 쓰는 해이함이 재발할까봐 싼 호텔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좀 멀군. 밤새 못잔 피로감이 갑자기 밀려든다. 간사한 마음으로 다시 협상.

"오늘이라도 더블룸 쉐어하겠다는 사람 있으면 절반으로 깎아주실래요?", "내일 꼴까투어하러 가서 하룻밤 자고 올 텐데 배낭도 좀 맡아주시고 도미토리에 제 침대 하나 남겨둬주실래요?"

 

아직도 일곱 시 반... 체크인 시간은 11시인데 9시에 방 청소하니 청소만 끝나면 바로 들여주겠다고 한다. 한 바퀴 둘러보니 부엌, 거실, 샤워실.... 와~ 끝내준다. 와하까의 파올리나 수준?

좋았어, 결정 잘 한 거야.

 

옥상에 올라가니 설산이 꿈처럼 떠 있다.

 

옥상의 그네의자는 내 전용이었다.

 

매일 시트와 수건 빨래가 가득 널려 옥상을 비누향기로 채운다. 관리를 열심히 한다는 얘기지.. 

 

공동부엌이지만 우리집 부엌보다 더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부엌에서

 

밥 세 번 해 먹었다. 

소시지 브로콜리 볶음밥에 할라삐뇨..... 여행길에서 지긋지긋하게 먹던 초간편메뉴.. 

 

체크인 하기 전까지  아르마스 광장 주변 한 바퀴 순찰. 

분수 꼭대기에 올라선 나팔 부는 소년의 애교스런 포즈가 눈길을 끈다. 

 

성당이 아니고 무슨 정부기관인데... 성당처럼 뾰족한 종탑을 양쪽에 거느리고 있다.

 

여기가 대성당. 이 도시의 건물들은 거의 흰색 벽돌로 지어져 우아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인근에 화산이 세 개나 되고 폭발이 잦아 화산재가 많은데 그것으로 벽돌을 만들어 쓰기 때문이란다.  

 

공원에 나와 노는 서민들의 정겨운 모습은 여느 도시나 다름없다.

 

"이건 특별한 볼펜이에요, 이렇게 쫙 땡기면 마추픽추 그림이랑 달력이 있고 뒷면에 구구단도 있지요." 

할아버지의 재롱(!)에 기념으로 하나 샀는데 잉크 떨어질까봐 여태 한번 안 쓰고 보관만 하고 있다.

 

쿠스코처럼 여기서도 티코가 거리를 장악하고 있다. 93년에 만났던 나의 첫사랑 티코...ㅎㅎ

내 현재의 애마 마티즈 역시 티코의 뒤를 이어 2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군.

 

'최상의 귀환', '삶의 목표'..... 강연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가톨릭 국가에서 스님이 강연을 하는 국제적인 컨퍼런스?

 

어제 만난 수녀님도 혹시 여기 참가하러 가시는 거 아니었을까? 가톨릭은 종교간의 대화도 잘 하잖아.

알지도 못하면서 내 맘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보았다.

 

공예 박람회 포스터인가? 아무리 봐도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외국인들을 돈지갑 정도로 여기는 동네만 돌아다니다 거리 곳곳에 붙어 있는 국제회의 포스터를 보니 굉장히 신선했다. 이 도시는 페루의 여느 도시보다 국제교류가 많은 도시인가보다. 듣기로 우리나라의 코이카라는 봉사단체도 이 지역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도 다른 도시에 비해 더 자연스럽고 우호적인 느낌이다. 이 도시로 오는 길에 만난 재야수녀님에게 받은 인상이 너무 강했던 걸까? ^^

아무튼 쿠스코에 비해 현지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기분좋은 도시. 원래 내 계획서에 '아레끼빠 - 뒹굴뒹굴'이라고 썼던 대로...  여기서 친구도 사귀고 좀 뒹굴다 가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숙소로 돌아가 체크인 했는데 쥐죽은 듯 조용하고 방들도 텅텅 빈 것 같다. 빈 침대 하나 없다더니.... 다들 어디 간 걸까? 암튼 침대 두 개 있는 큰 방에 들어오니 소경 제 닭 잡아먹는 기분이 최고다. 어제처럼 밤차로 시달린 다음날은 이런 호강 좀 해도 괜찮아.

밀린 빨래 해널고 욕조에 더운 물 펑펑 틀어 간만에 샤워 아닌 목욕을 즐기고... 한숨 푹 자고....

 

시간여유 있을 때 밥이나 좀 해먹어볼까 하고 장 보러 나갔는데 어우, 이게 뭐야.. 데모대잖아.

숙소로 돌아가 카메라 가지고 뛰어나와 시위행렬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우리나라 시위대 뒤꽁무니 따라다니며 즐기는(!) 외국인들 보면 좀 웃기던데... 나도 그짓을 하고 있군.

 

인디헤나와 늙은 사람들이 주류인 걸 보니 분명히 약자들의 시위인데...  깃발에 쓴 게 뭔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유인물도 한 장 없고 구호도 안 외치고 그냥 묵묵히 걸을 뿐이다.

 

그냥 묵묵히...

 

우리나라 시위방법... 정말 다양하지만 그중 외국인들이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할 만한 시위는 아마 삼보일배가 아닐까 한다. 

 

대열이 멈춘 곳은 시청 앞. 시장을 면담하러 들어간 대표를 기다리는 거란다.

이날 시위의 이슈는 '공공교통 요금 인상 반대'였다. 

  

투어 사무실에 가고 싶진 않았지만 뾰족한 다른 수가 없다. 어차피 꼴까캐년에 가려고 아레끼빠에 온 거고 그곳을 여행사 투어 외의 방법으로 가려면 시간도 돈도 많이 든다. 

세 군데 여행사 사무실에 들러 물어봤는데 가격은 거의 비슷. (얼마였나 안 적어놨네..)

 

투어 예약하고 el super(로스 안데스 골목에서 나오면 성당 바라보고 오른쪽)라는 대형매장에서 샐러드패킹 하나와 사과 몇 알, 소시지와 포도를 사고 늦은점심으로 샌드위치도 하나 샀다. 필요한 만큼만 산다고 신혼살림 하는 새댁보다 더 얌체같이 사지만 늘 남아 호스텔에 남기게 되는 혼잣살림.... 사흘 이상 머물지 않는 이상 장보고 밥하는 짓은 안 하려고 다짐해보지만.... 직업병인가보다. 오늘도 장을 봤다.

 

부엌에서 이른 저녁을 해서 그 밥을 다 먹고 다 치울 때까지, 그리고 거실에서 DVD 한 편 때릴 때까지.... 로스 안데스에는 여행자 하나 얼씬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정말 이상해, 귀곡산장도 아니고.... 

앗, 그러고 보니 캐나다 아줌마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었네. 이 밤에 호텔로 사과하러 가야 하나?

그래도 딸네미랑 함께였을 테지. 애고, 나도 모르겠다~ 낼 아침 일찍 나가야 하니.... 걍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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