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길(~2014)/재미·취미(펌 글)

[스크랩] 글쓰기의 어려움

張萬玉 2005. 3. 19. 23:54

 

내가 쓴 글들을 돌이켜보면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글이 사유의 뒤를 바짝 뒤쫓아가며 쓰여진 경우다.

이렇게 쓰여진 글은 솔직히 마음에 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경우라 해서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 경우에는 글에서 호흡이 느껴지고 글이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글이 좀 체계적이지 않고 강물처럼 제멋대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크게 조망해보면 그런 것도 별로 흠으로 여겨지지 않고 일종의 매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글이 이미 지나간 사유의 결과물을 적당히 잇고 엮어서 쓰여진 경우다.

이 경우가 주로 마음에 안 드는 경우인데 이 경우도 역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체계적으로 구성을 갖추어가며 쓰여진 긴 글들은 대부분 이 유형에 속하지만 의외로 마음에 드는 경우도 많다.

마음에 드는 경우는 비록 사유의 결과물을 활용하였더라도 그 결과물을 사유의 현재성 속에서 다시 되살릴 수 있었던 경우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에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순전히 과거적인, 딱딱하게 굳는 결과물로 글이 구성된 경우다.

그 경우 사유는 결과물의 곁에까지는 다가가지만 결코 그 속에 침투하지는 않는다.

단지 손가락 끝으로 결과물의 거죽만을 안이하게 건드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 태어난 글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글은 숨이 죽어 있고 죽어있음을 위장하기 위해 공연히 수사만 번거롭다.

내용은 지당한데도 어딘가 와닿지 않는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다.

교시적(敎示的)인 입장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경우도 바로 그런 경우다.

나의 글은 대체로 윤리적이다.

옳고 그른 것을 많이 취급하고 대개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글이 교훈적이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교시적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런 성향이 내비치는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교훈적인 내용의 유무를 떠나 나 자신이 그 글에서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통되게 발견할 수 있다.

나 자신은 글이 운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어떤 안전지대 ― 대부분의 경우 외람되게도 그 글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적 상황을 초극한 지대 ― 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 비겁함과 교만함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런 모든 것이 결국 나 자신에게 감지되니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몇 안 되는 정치평론을 쓰고 나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정치평론은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일반적으로 보면 정치현실을 이야기하는 장에서 평자 자신은 그 문제적 현실에 개입해 있지 않은 것이 기본 설정이다.

평자는 대부분 배구 시합의 심판관처럼 높다란 곳에 올라앉아 있다.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이 기본 설정이 내게는 못내 견디기 힘든다.

내용을 떠나 그 구도 자체가 위선적인 느낌을 준다.

 

내가 오랫동안 견지하고 있는 원칙은 이렇다.

만약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최악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 자신 안에 동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그것에 대해 발언하고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평론을 쓰다보면 나는 어느덧 나의 원칙을 벗어나고 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내가 면책되어 있는 현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느낌은 마치 이빨을 치료하고 나서 아직 마취가 덜 풀린 입으로 음식물을 씹는 것 같다.

 

이것은 내가 아직도 정치현실을 인간성의 깊이 속으로 용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직도 정치현실을 인간보편의 문제로 환원하지 못하고 인간보편의 문제를 다시 나의 문제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현실의 중심에서 인간보편을 보고 인간보편의 중심에서 나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동심원적 관계는 여전히 이론에 그치지 내 삶의 구체적 현실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치평론의 말미에 이르면 이 괴리를 교정해 보려고 우격다짐으로 이 범주들 간의 화해를 시도하는데 그것이 또 다시 위선적인 결과를 낳는다.

억지로 같다 붙인다고 해서 안 될 것이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교훈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나 자신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한, 교시하는 자로서의 안이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 자신이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정치현실을 인간성의 깊이 속으로 용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이런 추상적인 발언을 적잖이 해왔다.

이 추상성 속에 바로 나의 미진함이 들어있다.

사물을 그 저변까지 관철해서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안연이 고백한 것처럼 “파면 팔수록 더 견고해진다(鑽之彌堅)”는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삶의 실체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훨씬 실천적인 한 차원이 기다리고 있다.

이 차원은 세상사의 흔한 논란들이 전개되는 차원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치 소실점처럼 온갖 일상적인 논란들에 일정한 구도를 부여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그 정경 위에서 어떠한 면적도 가지지 못하는 특별한 지점으로 존재한다.

그 관문을 지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

 

역사상 위대한 성현들이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을 가끔 생각해본다.

그것은 결국 사유와 글 사이의 간격을 그들이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글은 이미 지체(遲滯)다.

아무리 바짝 사유의 뒤를 따른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불필요한 반성이 개입되고 거짓된 구성이 스며든다.

데리다는 말이 글에 우선한다는 통념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비판을 받아들이더라도 나는 역시 이 통념에 더 중요한 진실이 가로놓여 있다고 믿는다.

마치 뿌리의 맨 끝 생장점처럼 사유의 최전선(最前線)인 생장점은 글보다 말에 가깝고 말보다 행동에 가깝다.

그렇다.

사유는 차라리 행동이다.

 

글 쓰기의 어려움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나는 내 자신의 최전선, 총알이 쉴새없이 날아오는 그 전선에서 한 순간도, 한 발도 물러서지 말고 버티고 서 있어야 함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안일하지 말 것.

깨어있을 것.

말과 글의 소실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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