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길(~2014)/재미·취미(펌 글)

[스크랩] 일탈

張萬玉 2005. 3. 21. 21:13

국민학교 6년 동안 나는 한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식 날 개근상을 탔다.

이것은 내가 어린 날에 일탈이라는 것을 별로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경험할 나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1년 동안 나는 아홉 번의 결석을 하였다.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오래 되어 왜 그렇게 결석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 하루는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 날은 궁금해 하는 친구들이 하교후 집에까지 찾아왔던 날이다.

그 때 나는 내 방의 철제 침대 밑에서 지리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왜 침대 밑에 있었을까?

우선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 불안감을 안고 그만한 나이 때에 이끌리기 쉬운 〈나만의 공간〉에 기어들었을 것이다.

왜 지리책을 읽었을까?

학교 수업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행위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그래도 그 조그마한 일탈의 경험은 내가 이 세상의 삼엄한 질서 속에 확보한 〈나의 세계〉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고등학교에 가자 그것은 좀더 의식적인 것이 되었다.

그 때가 몇 학년 때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 부근에 있던 사설 독서실에서 나는 밤을 새웠다.

밤을 새웠다고는 하지만 거의 엎드려 잤을 것이다.

아침이 되어 일어났는데 문득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다른 아이들은 하나씩 둘씩 등교 준비를 갖추고 독서실을 떠났고 결국 휑한 독서실에는 더벅머리 고시생 몇 사람만 남아 나를 이상한 눈으로 흘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창가로 갔다.

창밖 멀리 학교 교정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고 까만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고물고물 조회 행렬을 갖추고 있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교가 소리!

내가 거기에 있지 않고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두렵게 확인해 주는 교가 소리가 들려 왔을 때 나는 독서실에 남아 있는 나의 몸을 저 교정의 정경에 선연히 대립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꽉 짜인 수업과 교칙과 학교장 훈화의 총량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총량적 세계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저 세계의 미미한 구성분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저 세계를 조그마한 장난감 세상을 바라보듯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반역의 쾌감이 불안과 뒤엉켜 있었다.

그 창가에서 나는 무한히 커질 수도 무한히 작아질 수도 있는 신비한 나의 세계를 체험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두 세계의 치열한 각축이었다.

갑자기 주어진 많은 자유가 모든 것을 더 복잡하고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일탈은 일상화되어 오히려 전형적인 일탈의 기억을 남기지 못한 시절이었다.

잠을 많이 잤고 며칠씩 학교를 가지 않기도 했다.

학교는 늘 낯설었고 학과든 서클이든 그 어떤 집단에도 나는 나 자신을 동화시킬 수 없는 철저한 개인이었다.


얼마 후 군에 입대하였다.

다시 예속의 시절을 맞게 되자 일탈도 다시 의미있는 윤곽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군은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였다.

24시간이 철저히 통제되는 세계에서 일탈은 꿈도 꾸기가 어려웠다.

나는 조용히 군의 조직과 질서가 요구하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제대말년에 몸조심하라고 했던가?

제대를 불과 두어달을 남겨놓고 결국 조그마한 일탈을 저지르고 말았다.

유격 명령이 났는데 말년 병장에게는 좀처럼 나지 않는 명령이었다.

본부에 근무하는 변변찮은 중고참들이 저들의 순서를 슬그머니 빼먹고 대신 힘없는 말단 교육중대의 고참들을 순서에 끼워 넣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었다.

운없이 거기에 걸린 것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본부 교육병에게 항의를 하러 가보았지만 한때 나의 조수이기도 했던 녀석은 휴가를 받아 날쌔게 달아난 뒤였다.

순서를 빼먹은 것으로 보이는 본부 중고참 놈들이 슬금슬금 피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나를 비롯한 10여명의 사병들은 연대장에게 신고를 마치고 교육출발을 위해 일렬종대로 연병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연병장 한가운데에서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섰다.


“나 … 안 가겠어,”


나는 종대에서 이탈하여 빈 연병장을 가로질러 중대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연병장은 한없이 넓었고 등뒤로 누군가의 만류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빈 내무반에 들어와 나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명령불복종.

거기에는 그 어떤 일탈도 허용하지 않던 통제사회에서 내가 조용히 삭임질해왔던 온갖 저항과 설음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 일로 연대는 한동안 시끄러웠다.

중대장과 졸병 때 잠시 행정사무를 보면서 열심히 구두를 닦아주었던 교육참모가 분주히 뛰어다닌 덕분에 다행히 나는 영창도, 대안으로 검토되던 군기교육대도 가지 않고 두 달 후 무사히 개구리복을 챙겨입고 부대 정문을 나올 수 있었다.


사회생활 초년병으로 직장을 다니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거기에도 만만치 않은 제약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직장은 여의도에 있었고 나는 신길동에 살았다.

나는 여의도 샛강을 가로지르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다리를 건너 출퇴근을 하였다.

아침 출근길.

분주히 다리를 건너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다리 난간을 잡고 멀리 아침 햇살에 물든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히 돌아서서 집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런 날은 사무실에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고 빈 하숙방에서 종일을 뒹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런 일탈 행동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과거에는 주어진 현실이 있었고 그에 대응하는 내가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을 그렇게만 설정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현실의 적지 않은 부분이 나의 영역 속에 들어와 있고 나를 더 이상 주어진 현실에 대립하는 존재로만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 역시 현실을 구체적으로 책임지는 기성세대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젊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공간에서 나의 존재가 바로 그들이 일탈을 시도하는 대항적 현실의 구성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서글프고 착잡한 느낌을 준다.


일탈 -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천진한 주객대립의 구도로 바라볼 수 없게된 이상 이제 그것은 잃어버린 청춘의 행태로 치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독서실 창 밖으로 교정을 바라보듯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의 희뿌연 창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자아와 객관적 현실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영원히 일치될 수도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일탈을 시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삶의 종대에서 여전히 일탈하여 연병장을 홀로 가로지르고 있다.

내가 순간순간 느끼는 저 피로 속에서, 혹은 외로움 속에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무표정 속에서.

스파이처럼 더욱 은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