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길(~2014)/재미·취미(펌 글)

[스크랩] 달리기(2)

張萬玉 2005. 3. 22. 17:57

종종 달리기를 한다.

과거에는 띄엄띄엄 했었는데 요즈음은 거의 정기적으로 하고 있고 그렇게 한지도 어언 1년여가 넘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의 시작 동기는 대부분 건강관리일 것이다.

나이가 들고 몸이 찌뿌둥해지고 운동부족을 느끼면 대개 달리기 등의 운동을 시작한다.

나도 역시 그런 평범한 이유로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작하는 것은 그렇다지만 달리기를 지속하는 것은 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달리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매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엄밀히 따지면 매력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매력이라는 것은 사람을 혹하게 하는 분명한 힘을 말하는데 달리기에 그런 힘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 점은 술과 비슷한 데가 있다.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아내는 내게 술이 그렇게 맛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나도 과연 술이 맛있는지 어떤지를 모른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어떨 땐 밤이 이슥하도록 정신없이 마셔댄다.

달리기의 매력도 그런 측면이 있어 과연 그것을 매력이라고 불러도 될지 의문스럽다.

오래 그 매력의 실체를 알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내가 느끼는 달리기의 매력 중 어렴풋이 잡히는 한가지는 다름 아닌 공허다.

그러니 그것을 매력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주로 주말에 달리기를 한다.

주말 중에서도 토요일은 아무래도 잘 나서지 않게 되고 주로 일요일 오후 늦게 달리기를 하게 된다.

일요일은 나에게 있어 공허한 날이다.

아내는 교회에 가고 주로 혼자서 집을 지킨다.

책도 보고 글도 쓰고 텔레비전도 보고 인터넷도 기웃거리고 주전부리도 하지만 오후 3∼4시 정도가 되면 이윽고 밀려오는 공허감을 어쩌지 못한다.

몸도 찌뿌둥해진다.

4시가 넘어 베렌다의 화초에 내리는 일광도 광채를 잃게 되면 드디어 나는 주섬주섬 츄리닝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그 때 나는 늘 공허하다.

왜 달리는가?

목적이 없다.

도둑을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아테네의 병사처럼 전쟁 소식을 전하러 가는 것도 아니다.

하루 중 가장 공허한 시간에 가장 공허한 행위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뜀박질을 시작하려는 순간은 항상 어색하다.

근처에 누가 있을 땐 마치 내 행위의 공허함을 들킨 것 같아 공연히 민망해진다.

장소를 양천공원에서 안양천변으로 바꾼 다음부터는 이 황량한 벌판에 거의 사람이 없어 다행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느끼는 어색함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혼자서 허청허청 발걸음을 내딛을 때 나의 자의식은 나의 공허한 몸짓과 온통 겹쳐 있다.

보폭과 템포, 팔의 흔들림, 호흡, 근육의 긴장과 이완, 이런 모든 것들이 낱낱이 의식된다.

내가 달린다기보다는 육신을 억지로 가동시킨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일단 천천히 달리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처음에 천천히 달리는 것은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 전문가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그는 처음 10분간을 권유했으나 나는 신정교 아래에서 시작해서 오금교를 지나 목동교 아래에 이를 때까지 약 2킬로에 걸쳐 대충 15분 정도를 그렇게 달린다.

내가 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반응이 느리고 심장이 튼튼치 못한 내 몸이 정한 것이다.

달리기에서 처음 15분은 매우 긴 시간이다.

그 15분 사이에 맥박은 점점 빨라지고 호흡은 턱에 차고 체온은 상승하는 등 신체는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약 15분 후 땀이 나기 시작하고 몸은 드디어 달린다는 상태를 받아들인다.

호흡이며 맥박이며 혈류 따위가 보행상태를 벗어나 본격적인 주행상태로 진입하는 것이다.

아마츄어적인 경험이지만 신체적 위험은 보행상태에서 주행상태로 전환하는 과정에 주로 걸쳐 있고 일단 주행상태가 되면 새로운 안정 단계에 들어서는 것 같다.


이 단계에서 확실히 많은 변화가 수반된다.

우선 서서히 보폭이며 템포며 팔의 흔들림, 호흡 따위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종종 달린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릴 정도다.

심지어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다거나 무엇을 하고 있다거나 하는 의식도 없어진다.

일상생활에서 호흡이 의식되지 않듯 달리기 자체가 의식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는 의식이 일상의 모든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달리기 상태에서 우리는 염려의 자장(磁場)을 벗어나는 듯하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 지는 알 수 없다.

달리기가 모든 염려를 집약한 다음 이윽고 흡수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아는 한 그런 자유나 해방은 여행 정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여행도 여수라는 멀고 추상화된 염려를 동반하고 있다.

여행의 묘미 자체가 인간사의 온갖 구체적인 염려를 그처럼 멀고 추상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달리기는 그것마저도 삼켜버리고 끊어놓는 것 같다.

달리기는 저 염려의 중력을 끊어내어 일정한 공백을 만들고 그 공백 지대에서 의식으로 하여금 특유의 명징성과 자유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원리를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 기제가 자이로스코프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자이로스코프 ― 우리가 어렸을 적에 지구팽이라고 불렀던 것, 팽팽한 실이나 뾰족한 못 끝에 올려놓아도 쓰러지지 않고 돌아가던 그 철제 팽이를 연상하는 것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자이로스코프의 금속 원판이 맹렬한 속도로 돌아갈 때 오히려 자이로스코프 자체는 고요히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이, 생각해보면 뜀박질이 육체의 아슬아슬한 한계선을 따라 규칙적, 반복적으로 이어질 때 오히려 우리 의식이 탁 트인 명징성과 자유로움을 갖추는 것과 매우 닮아 있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양자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상념이 엄습하는 것은 바로 그 어간이다.

그것은 마치 물안개처럼 의식의 명징한 수면 위로 퍼져 나간다.

그것도 표현이 그렇다는 것이지 딱히 의식의 명징성이 먼저고 상념이 나중이라 할 수도 없다.

어쩌면 몸을 잊게 되는 것이나 의식이 명징해지는 것이나 상념이 엄습하는 것이 모두 동시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때의 상념은 하늘에 뜬 구름뭉치처럼 가볍고 독립되어 있으며 그 결은 매우 섬세하여 때로는 선미(禪美)를 느끼기도 한다.

또 그 전개는 경우에 따라 긴 독백이 되기도 하고 긴 글이 되기도 하고 긴 편지나 긴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실제 내가 쓴 몇몇 글들은 바로 이 달리기 상태에서 배태된 것들이다.

양천공원을 돌 때 몇 바퀴를 돌았는지를 까먹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으로 느껴지는데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이 상념의 상태에 주선(走禪)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禪)은 원래 앉아서 하는 좌선(坐禪)이 기본이지만 누워서 하는 와선(臥禪)도 있고 걸으며 하는 행선(行禪)도 있다.

그러니 굳이 주선이 없으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 상념의 순간이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끊어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이름이 결코 외람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쨌든 그 때가 가장 행복한 느낌이 든다.

나는 마치 인간 자이로스코프가 된 듯하다.

물론 그런 행복한 느낌도 반성의 결과다.

정말로 몰입해 있을 때에는 그런 느낌도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점 때문에 달리기는 이 세상 그 어떤 바쁜 일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면서도 내게는 한없이 고요한 행동으로 느껴진다.


마지막 염창교의 육중한 교각을 돌아나가면 이윽고 한강이 나온다.

거기서부터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낚시질을 하는 모습이 보이고 “어느 날 한강에 잘못 날아든” 황지우의 갈매기도 보인다.

강건너 멀리에는 높이 솟은 난지도의 하늘공원, 그 옆의 월드컵 경기장 모습이 뿌옇게 눈에 들어온다.

전에는 거기서 잠시 호흡을 조율하고 스트레칭을 한 후 다시 되돌아왔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부터는 우회전하여 한강을 끼고 달려 여의도까지 갔다가 온다.

20km가 훨씬 넘는 거리로 시간도 2시간 이상이 걸린다.

한강변 자전거 도로는 안양천의 자전거 도로와는 달리 사람이 많고 또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다수의 젊은이들을 피해서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주선을 유지하기는 어렵지만 대신 젊은 커플들의 행복한 모습을 비롯하여 휴일을 맞은 소시민들의 느긋한 여유를 보는 것이 좋다.


안양천으로 다시 들어오면 풍경은 다시 황량해진다.

인적은 뜸해지고 쓰러진 잡초들은 어지럽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에는 그 돌아오는 길목에서 우연히 갈대밭을 태우는 광경을 목격했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자전거 도로 옆에 축구장 만큼이나 크게 조성된 갈대단지에서 백여 미터를 이어가며 군데군데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나는 이 장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내 쓰러지지 않고 새까맣게 오염에 젖은 대가리를 흐느적이며 서 있는 갈대군을 볼 적마다 나는 풍장(風葬)이 생각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화장(火葬)이다.

매운 연기와 검은 갈대재가 날리는 속에서 나는 무슨 영감과도 같은 불꽃의 화무(火舞)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문득 바그다드 시내에서 치솟던 불길이 생각나고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의 눈망울이 생각나서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검게 불탄 저 자리에도 이제 얼마 후면 새 갈대순이 올라올 것이다.


멀리 바벨탑처럼 한껏 치솟은 하이페이온 건물이 보이면 거의 다 온 것이다.

비로소 다시 공허감을 느낀다.

저물어가는 벌판은 더욱 공허하다.

결국 내가 한 것은 일요일 오후 공허한 시간대에 그보다 더 공허하게 육신을 학대하고 짓이기고 온 것이다.

언덕비알의 벤치에 파김치처럼 늘어진 몸을 걸치고 앉아 안양천의 느릿한 물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허무함과 무상함이 울분처럼 가슴에 치밀어 온다.


달리고 달려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나는 나의 공허 안에서 맴을 돈 느낌이다.

어느새 다가온 어스름 속, 제방 건너 즐비한 아파트 창에는 불들이 켜지고 있다.

20대 초반 허무감에 무척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니이체를 찾았고 키에르케고르에 탐닉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20대를 벗어나면서부터 나는 그런 느낌을 거의 갖지 않고 살아왔다.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을 뒤로 하고 나는 왜 새삼 이 고비에서 삶의 허망함을 느끼고 있는가.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않고 살던 삼사십대에 나는 삶의 허망함에 빠져있는 인식은 아직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한 탓이라 믿었다.

의미의 햇살이 비칠 때 무의미는 안개처럼 스러진다는 단순한 논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내가 받아들인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허망함을 구태여 타기할 무엇으로 규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무엇이 참인지를 따지기 전에 이 순간 나의 의지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허망함도 삶의 자산이나 되는 것처럼 의미와 구태여 맞세우지 않고 그 곁에 나란히 자리잡게 하는 이 변화가 단지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먼 데서는 어스름을 잊은 채 공을 차는 아이들의 외침이 아련하게 들린다.

달리기가 무엇인지, 그 매력이 무엇인지 알 듯하다가도 결국 다시 모르겠다.

어쩌면 그 공허한 몸짓이 공허한 우리의 삶을 은유하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랫동안 김수영의 시 「풀」이 주는 매력의 정체를 생각해 보았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매력의 비밀에 도전하였고 또 이런저런 답을 내놓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나는 그의 풀이 존재 자체에 대한 시늉, 미메시스라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운명, 생명의 몸짓, 인간의 삶 그 자체를 풀의 존재와 동작은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외연이 너무 커서 개념화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얼굴을 보듯 그의 시 「풀」을 통하여 우리 존재의 운명, 우리 삶의 모습을 고즈넉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은 단지 눕고 울고 일어나고 웃고 다시 누울 뿐이다.

그의 시를 보고 있으면 판토마임을 보고 있는 듯하다.

가시적인 의미를 보려 하기 것보다 차라리 판토마임을 보듯 다가오는 것만을 받아들일 때 이 시의 의미가 더 가까이에서 느껴진다.


달리기에서도 나는 그 비슷한 미메시스를 가정해 본다.

달리기의 매력 또한 그 어간에 있을 것이 아닐까.

끝없이 쫓아가고 쫓기는 우리 삶의 무상한 동작에서 추상(抽象)한 한 시늉으로서의 달리기도 나 자신만을 외로운 관객으로 앉혀 놓고 펼치는 판토마임 같다.

눕고, 일어나고, 나부끼고, 다시 눕는 풀의 저 무상한 동작이 갖는 상징성만큼이나 달리기의 상징성은 포괄적이다.

짧은 이지를 동원하여 그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면 도무지 잡히는 것이 없다가도 지쳐 늘어져 오래 바람을 맞고 있으면 몸의 아득한 운산 끝에 무언가가 잡혀지는 것도 같아 나는 오늘도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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