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리가 "자식 키우는 것만큼은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사내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사내놈이라서 그런지 아무래도 이 아이의 성장과정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나의 자라던 시절이 부단히 동원되었다.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저는 저고 나는 나고 더구나 그 때와 지금이 세월이 격절한데 나를 기준으로 아이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부모의 조바심이라는 것이 항상 이런 생각을 앞지르곤 했다.
이런 조바심은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극에 달했다.
왜냐하면 나의 성장과정에서 바로 중학교 2학년 때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비로소 문학이라는 것에 눈을 떴다.
말하자면 글로 표현되는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우리 집 건넌방, 사촌 윤이 형이 기거하던 방에 배를 깔고 누워 시를 쓰던 그 빛살 환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 날 나는 한 자리에서 두 편인가 세 편인가의 시를 썼다.
내용은 가물거리지만 그 중 하나의 제목은 「들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종이 위에 "구름"이라고 쓰면 내 상상력의 캔버스에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고 "멀고 먼 들길"이라고 쓰면 다시 광활한 벌판이 펼쳐지던 그 날 그 상상력의 마술은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점심 먹으러 오라는 어머니의 재촉을 나는 들은 척 만 척했고 된통 야단을 듣고서야 대청으로 건너가면서도 그 환상의 어질어질함에서 깨어나지를 못했다.
얼마 후에는 단편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학원 잡지에 실린 황순원의 「소나기」를 흉내내어 「학(鶴)」이라는 단편소설을 쓴 것도 그 때였다.
그 작품은 이듬해 내 아우가 여름방학 숙제로 제 이름을 써서 학교에 내는 바람에 그 학교의 교지에 실리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이런 기억들이 아이에 대한 기대에 객관성이 결여되는 변수들로 작용했다.
서점에서 이런저런 단편소설집들을 사서 아이의 방에 툭툭 던져준 것이 그 단적인 사례였다.
아이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도무지 읽어보는 기색이 없었다.
한 번은 내가 중고등학교 때 쓴 습작 노오트 등의 원고 뭉치를 던져주며 "읽어나 보라"고 했다가 "곰팡이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보기좋게 딱지를 맞았다.
그 날 이후 나는 그 원고 뭉치를 다시 아이 앞에 내놓지 못했다.
실제 아이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pc통신에서 무슨 글을 다운받아 열심히 읽고 있기에 훔쳐보았더니 게임에서 진지를 구축하거나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어쩌다가 보는 책도 순전히 괴기소설 아니면 쉽게 읽히는 대중소설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나의 경험에 기초한 기대를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지방근무를 하고 있던 중에는 어느 날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육사의 시집을 구해서 거기에 나오는 「광야」라는 시를 베껴 보내줄 것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툴툴거리는 놈을 반쯤 을러대다시피 하여 결국 개발쇠발 쓴 「광야」를 받기는 받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런 것이 공연한 나의 안달이지 무슨 실질적 효과가 있을까 싶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아이는 더 눈에 띄게 나의 기대를 벗어났다.
영화 하나를 보더라도 진지하고 작품성이 있는 영화는 관심이 없고 내가 질색을 하는 헐리우드 오락영화나 성룡의 영화만 본다.
신문도 도움이 될만한 기사는 보지 않고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스포츠 면에만 코를 박고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나는 영화음악을 좋아하는데 이 놈은 순전히 헤비메탈 쪽이다.
가끔 가다가 제 방에서 자글자글하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면 귀를 찢는 전자악기들의 소음 속에 무슨 외국그룹인지가 악다구니를 쓰는데 그 내용인즉 대충 "죽여! 부셔!" 쪽이다.
나는 단 오 분도 그 소리 속에 서 있지를 못하는데 이 놈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한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학교에서 점심시간이면 70년대의 포크송을 방송으로 틀어주는 선생님이 있는데 얼마나 느려터진 음악인지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멀미가 나고 토할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그 포기는 아이에 대한 기대 자체의 포기라기보다는 나의 성장기를 중심으로 한 판단기준의 포기였다.
내 자식이지만 나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사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나니 아이가 조금 달라 보이기도 하고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장점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 놈은 싱거운 소리를 곧잘 한다.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한 마디 툭 던지는 것인데 때때로 우리 부부를 무지하게 웃긴다.
그러고도 남이야 웃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이 우리가 웃고 있을 때에는 이미 어디론가 휑하니 사라지고 없다.
우리만 그런가 했더니 한 번은 우르르 몰려온 반 친구 녀석들도 "쟤는 저는 웃지도 않고 우리를 웃긴다"며 "되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아내는 그 이야기가 몹시 자랑스런 눈치였다.
그러고 보면 단순하기는 하지만 선악에 대한 저 나름의 판단기준도 있는 것 같다.
학생들을 구타하는 선생님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도무지 말씨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도 선생님인데 그러면 못 쓴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다.
그런가 하면 한 번은 도배를 하기 위해 견적 뽑는 사람을 불렀는데 퇴근하고 들어오니 아이가 꼭 그 아저씨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은 즉 "아저씨가 얼굴 생긴 것이나 말하는 것이 너무 착하고 순박해 보이니 그런 아저씨를 툇자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소 어이없는 이유였지만 나중에 사람을 만나보니 아이놈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짐작이 갔다.
견적이 다른 가게보다 너무 높아 결국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못한 것이 아이에게 좀 미안했다.
비록 부대만 마련된 것이지만 살아가면서 거기에 무언가 좀 더 세련된 것들이 담길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것들이 자식은 부모와는 분명히 다른 개체이고 저 자신의 질서에 따라 성장하는 독립된 인격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가끔 pc 앞에 앉아 정신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로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때가 있다.
지저분하게 돋은 여드름과 코밑의 제법 가무스름한 솜털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재미있다.
저 머리통 속에는 무슨 생각이 흐르고 있는지 그저 막막한 느낌을 받는 것도 바로 그럴 때다.
그러면 나의 시선이 쑥스러운지 얼굴도 돌리지 않고 "왓씨" 한다.
뭘봐 하는 뜻으로 제 놈이 만든 엉터리 영어다.
요즈음은 그 찢어지는 굉음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아예 전자기타를 배우러 다닌다.
그것도 베이스 기타라고 해서 저음만 내는 것이라 한다.
굉음 가운데에서 내 귀로는 분간도 되지 않는 그 소리에 끌리고 있는 심정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
그걸 배우겠다고 일요일마다 제 머리 위로 두 뼘이나 삐죽 솟는 기타를 둘러메고 허청허청 아파트 마당을 걸어나가는 모습을 베렌다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이의 가는 길이 한없이 생경하고 멀어 보인다.
이백자 원고지를 한자한자 메워가던 나의 문학적 꿈, 스와니강에 함께 실려가던 나의 음악적 꿈, 그런 아득한 꿈들로 일렁이던 깜장 교복 속의 내 소년을 내 아이의 동반자로 삼아보려던 나의 기대는 이제 거의 무산된 듯하다.
추억 속의 소년은 저대로 추억 속에 외로이 있고 아이는 아이대로 저의 길을 홀로 가는 것이다.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된 그 구도가 이젠 둘을 동반자로 만든 것보다 더 나아 보이기도 하는 것이 희한하다.
일년에 두어 번쯤 아내를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있다.
그 때 가끔 듣는 기도문의 일절로 "하오나 우리의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말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앎에 대한 우리의 겸손을 뜻하며 더 큰 앎, 더 큰 계획에 대한 경건한 개방의 자세를 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도 그 말을 흉내내어 "하나님. 저 아이는 당신의 작품이니 당신의 뜻대로 키우소서"하고 기도해 본다.
그러나 아직은 그 기도가 순수하지 못해서 그런지 내가 생각해도 그 절반은 무능한 아비의 책임 회피 같다.
그래도 방향을 그렇게 잡고 보니 없는 믿음도 생기는 것 같다.
아이의 존재 안에서 내가 간섭할 수 없는 낯선 힘의 존재를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내 잔소리에 대해 "내 인생은 내 것이니 제발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아이놈의 주장도 설익은 요구이기에 앞서 저의 생명 속에서 꿈틀대는 무언가에 의해 자극된, 나보다 더 높은 곳에서의 조율인지도 모르겠다.
'내게로 가는 길(~2014) > 재미·취미(펌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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