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베트남2(호치민2) - 근교 투어

張萬玉 2009. 4. 4. 20:24

메콩 델타 일일 투어

 

프놈펜에서 베트남 넘어오는 코스 중 처독에서 시작하여 2박3일간 보트를 타고 메콩델타를 경유하여 국경을 넘는 코스가 있었다. 강가 마을에서 민박을 한다는 점 때문에 솔깃했지만 시간관계상 포기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안 하길 잘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배 타는 게 별로이기도 하지만 일일투어만 해봐도 베트남 여행사들의 ‘여행업’에 대한 감각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일박 이일이나 이박 삼일 등 다른 프로그램은 몰라도 일일투어는.... 비추!(이건 내 취향일 뿐이니 굳이 참고하실 필요 없음. ^^)

 

메콩강변으로 가기 위해 우선 버스로 3시간 정도 이동하는데, 이 시간이 가이드들로부터 그 나라, 그 지방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다.  

 

 

왼쪽의 보디가드처럼 보이는 청년이 가이드. 아, 그 이쁜 얼굴을 어째 한 장도 안 찍어뒀지? ㅠ.ㅠ

 

이 투어에서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건 가이드였다. 꽃미남에다 눈치도 빠르고 고객들에 대한 태도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도 베트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얘기들을 어찌나 간결하고 재미있게 해주는지...

지금까지 기억나는 걸 복습 삼아 추려보면.....

 

1) 베트남어 소개

- 인사말, ‘감사합니다’, 숫자 세기, 술 마실 때 외치는‘모, 타이, 바, 요!’(하나, 둘 셋 짠!)

 

사이공의 대표맥주 바바바

 

2) 베트남어 표기 방식(내 질문에 대한 대답)

현재와 같은 베트남어의 표기방식은 17세기에 베트남에 머물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자체계로 베트남어 발음을 표기하면서 만들어졌고 수세기를 거치며 폭넓게 보급되었는데 프랑스 식민통치 기간에 프랑스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보조적으로만 쓰이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부터 베트남의 공식 문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어휘의 많은 부분이 중국어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불어에서 온 표현도 꽤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는 문맹률 98%였지만 지금은 발음을 기초로 한 표기이기 때문에 문맹이 거의 없다.

(이 나라는 외국인이 주로 찾음직한 박물관이나 관광지에도 영어간판 하나 없다. 혹시... 자존심의 표현?)

 

알파벳은 알파벳이로되....ㅜ.ㅜ

베트남어가 귀에 익기 시작할 때쯤 (뜻은 모르고 소리가) 주의해서 들어보니 과연 광동어 비슷한 것 같았다.

우리 발음으로 한자를 읽으면서 입을 약간 외로 꼬고 내는 그런 발음.. ㅋㅋㅋ

 

3) 오토바이

20년 전엔 자전거 있으면 부자라고 했고 10년 전엔 오토바이 있으면 부자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차가 있어야 부자 소리 듣는다.

사이공 인구 8백만 중 4백만이 오토바이를 갖고 있는데, 오토바이 없으면 연애도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란다(오토바이가 크고 좋으면 애인도 둘. ^^) 중국제 오토바이는 400불, 일제 혼다는 2000불 한다.

 

가가호호 오토바이 

 

4) 베트남의 발전상

1986년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미국과 수교한 후부터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

어릴 땐 쌀 배급량이 적어 쌀벌레 끓는 쌀도 감지덕지였지만 지금은 세계 2위의 쌀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가공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입해가는 국가들이 가공해서 자기네 브랜드로 만들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커피 역시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의 생산국이란다. 지금은 자기네 기술로 고급 브랜드(中原)를 만들고 있다고 꼭 마셔보란다. 

 

 

여기서 잠깐! 가이드가 자랑하는 쭝웬 커피 한잔...(coffe break..^^ )

베트남에 다녀오신 분은 가끔 저 양은 드리퍼가 그리워지실지도 모르겠다.

화이트커피를 주문하면 대부분 저 상태로 나온다(밑바닥에 깔린 것은 연유. 엄청나게 달다)

커피의 쓴맛이 강해 블랙커피로 마시기엔 부담스러워 화이트커피를 시켜보지만... 이건 또 부담스럽게 달다.

비법은 조금 젓는 척만 하고 마시는 것.

이곳 사람들은 커피를 거의 음료수 수준으로 마신다. 그 진한 커피를 큰 유리컵에, 설탕도 프림도 없이 가득 따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주로 얼음을 넣어서..

참, 아이스 커피라고 하면 못알아듣는다. 콜드 커피라고 해야 한다.

 

 

최근 55일 만에 수확하는 수박을 개발했다고 자랑, 국민소득이 어떻게 늘었다고 자랑.... 자랑이 늘어졌다.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자랑들은 조국에 대한 자부심까지 물씬 묻어나와 듣는 사람들까지 공연히 기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미국과 종전을 한 1975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라는 이 젊은이는 자기 세대가 지금의 경제발전을 책임지는 주역이니만큼 베트남은 젊고 미래가 있다고 했다.

 

호치민 시내를 벗어나니 드넓은 공장부지와 함께 대규모 호화 빌라촌이 눈에 들어온다. 외국인들의 투자유치를 위해 개발하는 곳인데 아파트형은 400만 달러, 정원 딸린 집은 1000만 달러를 호가한단다.

 

선착장에 도착하면 모터 달린 배로 갈아타고 벌꿀농장에 간다.

 

 베트남 벌꿀농장이라고 뭐 다르겠나. 싱거워~

 

 

아무리 열심히 봐줄래야 봐줄 게 없는 자그마한 농장에서 벌꿀차 한 잔 얻어마시며 말린 과일로 만든 간식 사라는 무언의 권유를 받은 뒤에 짧은 농로를 걸어나가면....

 

 

노 젓는 배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코코넛 나무 사이로 흐르는 누런 강물을 헤치며 15분 정도 배를 타는 것이 이 투어의 백미라면 백미일까? ‘농’이라고 불리는 일명 ‘베트콩 모자’를 쓰고 사진 찍는 재미? 아무튼 좀 심심했다.

 

 

좁은 수로의 맞은편에서 오는 배들은 대부분 ‘구걸’ 하는 배들이다.

노 젓는 아저씨들이 지나가면서 ‘tip for me!’를 외친다.

아니, 내 배를 저어주는 것도 아닌 당신에게 내가 왜?

 

수로를 지나면 다른 농장에 배를 대고 점심을 먹으라고 한다. 볶음국수와 과일이 나왔다.

기본식탁 외에 특선요리를 주문하면 메콩강에서 잡은 고기가 저렇게 요리되어 나온다.

 

같은 팀 사람들과 잠시 수다 떠는 시간이다. 이때 아니면 계속 이동만 하느라고 별로 어울릴 기회가 없다. 같은 회사 소속이긴 해도 각기 싱가폴과 인도네시아의 지사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얼굴 한 번 못 본 사이지만 업무 관계로 통화하다가 친해졌다는 두 아가씨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수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또다른 합석자인 호주 여성이 끼어들어 화제를 독점해버렸다. 아마 호주에서 비슷한 아이템을 생산하는 공장의 사장인 듯 생산단가도 묻고 수출단가도 묻고.... 어찌나 진지하게 비즈니스를 하는지 우리는 소리없이 빠져줬다.

 

월남쌈 재료가 되는 쌀종이(paper rice)... 어느 농장에서 봤더라?

 

점심식사 끝나고 다시 모터보트로 이동한 곳은 코코넛 농장.

사탕 만드는 과정 보여주고 코코넛 위시키 시음하는 데 20분도 안 걸렸다.

그리고 다시 도보로 이동한 농장에서 민속음악 연주 관람.... 그리고 끝이다. 진짜 싱거운 투어였다. ^^

 

 

악기는 5현 기타(지판이 울퉁불퉁한), 얼후, 만돌린 비슷한 것, 발로 치는 캐스터넷.

베트남 민요가락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중국의 어느 공원에 놀러나온 기분이다. 

 

구치 땅굴 반일 투어

짧긴 했지만 어제의 메콩델타 투어보다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투어였다. 베트남 아니면 할 수 없는 투어.

오늘의 가이드는 눈매가 날카롭다. 목적지에 가는 동안 푸는 썰이 어제 가이드만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가이드의 진가는 구치 땅굴을 설명할 때 드러났다. 말로는 자제하는 듯했지만 그 눈빛은 ‘세계에서 미국을 이겨본 나라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해!’ 하는 자부심을 레이저마냥 뿜어댄다. 그런 가이드와 함께... 온몸을 던져 미국넘들을 막으려던 했던 흔적들을 돌아보니 실감이 안 날 수가 있나. ^^  

 

땅굴 가는 길에 들렀던 기념품 공장.

고엽제 피해로 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일하는 공장이라고 했다.

  

 

 계란껍질과 자개로 꾸민 뒤 라커칠로 마무리한 접시, 그림, 항아리, 가구 등을 제작하고 있었다.

 

 

  

 

   

 

  

 

 

불편한 몸으로 열심히 만들어내는 현장을 보았지만... 민망하게도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헌데 사라고 권하는 사람도 없다. 자존심일까? 혹시 국영기업체라서....?

월남전에서 자행되었던 미군의 만행이라든지 고엽제 피해자 사진이라도 눈에 띄게 붙여놓고 전쟁 관련국 사람들의 죄책감과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한다면 훨씬 장사가 될 텐데...  

 

 

구치 땅굴 입구에 두리안이 주렁주렁.. ^^ 

 

'이 땅굴은 날씬한 베트남 사람들이나 들어갈 수 있어요. 미군들은 절대 못 들어오죠.

 이렇게 들어간 다음에 낙엽을 덮으면....  '

 

 

 

땅굴은 깊이 3미터, 6미터, 10미터의 세 종류가 있는데,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팠다는 지하 3미터짜리가 폭격으로 어느 정도 파괴되자 더 깊이 파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사이공에 비해 구치 마을은 베트콩 지지세력이 많아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눈 뜨면 땅 파고 눈 뜨면 땅을 파면서 하루빨리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단다.

3미터짜리 땅굴은 조금 통로가 넓다고 한번씩 들어가보라고 해서 들어가보니 폭도 좁지만 무릎걸음으로 가야 할 정도로 낮았다.  어떤 땅굴은 캄보디아 국경까지 또 다른 땅굴은 사이공까지 통한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거기까지 이렇게 기어서 왕래를 했단 말이지...  

 

 

이것은 땅굴 속에 공기가 통하도록 해주는 구멍이란다.

중간중간에 학교나 숙소로 쓰이던 조금 넓은 공간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땅굴이 길다면 어떻게 중간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좀 궁금하더라만.... 

 

 

베트남 전쟁을 영어로 표현할 때 civil war라고도 하는데 그건 단순히 남북 베트남 사람들이 싸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liberation war라고 해야 한다고.... 그래야 북쪽 베트콩이 남쪽 인민들을 해방시켰다는 정확한 의미가 된다고 강조하는 걸 보니 아무리 체제가 변하고 세월이 바뀌었어도 베트남엔 사회주의적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여길 밟으면... 미군 꼬치구이 준비 완료! 

 

 쥐덫과는 비교도 안 되게 끔찍한 인간덫.

 

미군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는....  

 

미군의 융단폭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던 그들의 강인함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기도 하지만

살벌한 부비트랩들을 보고 있으니 인간의 상상력이 얼만큼 끔찍해질 수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전쟁의 명분이라든가 대량살상무기의 잔인함... 이런 문제를 떠나서 하는 얘기다. 사실 그런 문제를 떠나서는 전혀 무의미한 얘기긴 하지만...^^ )   

 

이거 혹시 상황버섯?

 

당시 군복으로 차려입고 있는 안내원들

 

땅굴을 다 보고 나니 사격장으로 데려간다. 한 발에 2만5천 동씩 내고 쏘아보란다.

귀가 떨어지는 따발총 소리. 이 가혹했던 전쟁터를 견학하고도 총 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츠암... 

 

가이드의 말 중 생각나는 대목.

'구치 땅굴을 방문했던 한국 사람들 중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미국군을 도운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과거는 과거고, 현재 한국이 베트남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

 

베트남은 그런 생각으로 미국과도 수교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사를 훌쩍 뛰어넘어 과감하게 손을 내밀 수 있게 한 것은 '그들을 이겨냈다’는 자부심 덕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