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를 떠나는 버스에 올라타기는 했으나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였다.
Sukotai냐 Tak이냐....
수코타이는 지리적으로도 태국의 중앙부에 있고 역사적으로도 태국 최초의 통일된 독립국가의 수도였던 유서깊은 도시.... 내가 역사유적지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쪽은 아니지만 태국의 역사도시 한 곳쯤은 들러볼 셈이라 방콕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또 하나의 유적도시 아유타야를 놓고 두 군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수코타이가 좀더 의미있는 도시겠지만 볼거리는 아유타야가 더 많을 것 같고, 무엇보다 교통 편의상 아유타야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방콕으로 가는 길목이자 동쪽으로는 피마이 사원과 카오야이 국립공원, 서쪽으로는 칸짜나부리와 비슷한 위도상에 있기 때문에 아유타야에 일단 짐을 내려놓으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안배할지를 결정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렇게 수코타이를 생략하게 되면 다음 목적지는 탁이다.
탁은 치앙마이 - 방콕 간 도로에서 미얀마 국경도시인 메솟으로 가는 도로가 갈려나가는 정거장이다.
이상하게 태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내 마음은 줄곧 태국 - 미얀마 국경지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립다'는 말을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나 장소에 대해서도 쓸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계속 그리웠다. 치앙라이에서는 메싸이가, 치앙마이에서는 메홍손이.... 그리고 지금은 메솟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얀마에 대한 마음이겠지. 그 마음은 오히려 미얀마에 있을 때보다... 무뚝뚝한 베트남, 심심한 라오스를 돌면서 더 강렬해진 것 같다.
미얀마의 뭐가 그리도 좋았더냐? 그것도 잘 모르겠는데....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치앙라이에서 메싸이 - 메홍손 - 메솟 - 쌍클라부리를 경유하여 방콕으로 가는 루트를 고려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거리상으로도 멀고 태국에서 손꼽는 산악지대인 그 루트에 발을 들여놓으면 예정보다 최소 일주일은 더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아서라, 집에 가야지..^^) 헌데 다시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메솟이 손짓하고 있다. 자꾸 다가오는 이 인연을 내 어찌 외면만 할 수 있으리.
탈 때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라서 일단 수코타이행으로 끊었지만.... 결국 한 정거장 전인 탁에서 내리고 말았다.
탁에서 메솟까지는 두 시간.... 큰 산을 하나 넘어간다. 불법체류자에 밀수꾼들이 많은 도시로 이름난 메솟행 버스는 경찰의 검문이 제법 삼엄하다.
버스가 메솟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오후 여덟 시. 아직은 초저녁이련만 문 닫은 가게들도 많고 인적마저 드물다. 어두운 가로등 아래 희미하게 윤곽만 드러낸 도시는 낯선이에게 웬지 모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 낯가림도 잠시...
썽테우 운전사에게 론리 플래닛에 나온 숙소 이름 하나를 대니 타라는 손짓을 한다. 버스 터미널 근처라고 적혀 있기에 탈 게 아니라 방향을 물어보려던 거였는데.... 에라, 길도 어두운데 바가지 씌우면 좀 써주지 하고는 올라탔더니 역시나.... 바로 앞에 있는 짧은 다리를 건네주고 내리란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인데 역시 속았....'
미처 생각을 마치기도 전인데 이 운전사, 그냥 휑하니 가버린다. 내 손이 지갑 꺼내드는 걸 봤을 텐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였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이 도시도 그리워했던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걸까.
풀벌레 소리만 요란한 조용한 숲 속에 싸인 그린하우스.... 예상보다는 조금 비싼 가격이었지만(250밧) 환경이 마음에 들어 배낭을 내려놓았다.
빵조각 하나로 이른 점심을 때웠으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길은 어둡고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더듬더듬 버스 내렸던 곳으로 되짚어 가보니 넓기는 무지하게 넓은데 사람은 거의 없는 야시장이 다행히도 아직 영업중이다. 짜차이(중국식 짠지)에 계란을 넣어 볶은 것과 마른새우 양파무침, 모닝글로리 볶음에 백반을 시켜 먹었는데, 맥주가 30밧, 밥이 30밧이다.
(보기보다 맛있어서 잘 먹긴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아침에 심하게 설사를 했다.)
밥을 먹고 나니 배도 부르고 눈도 어둠에 익숙해졌고... 해서 간단히 동네 시찰을 나가기로 했다. 원래 여행지에서, 특히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도시에서는 밤에 잘 안 돌아다니는데.... 인심 좋은 썽테우 아저씨가 나의 경계심을 풀어준 덕택이다.
숙소에서 얻은, 손으로 그린 지도 복사본에 의지해서 마을의 중심가인 듯한 경찰서 쪽으로 가는데 어디서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널직한 중국식 사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베트남 호이안에서 보았던 것 같은 화교들의 회관 같은 곳이었다. 아무도 없는 넓은 뜰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치파오를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귀청을 찢는 고음으로 중국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밝은날 다시 와봐야지, 하고 다시 발길을 옮겼는데 5분도 못 가 다시 요란한 미얀마풍 음악이....
소리의 진원지는 골목 안에 있는 미얀마식(혹은 태국식.. 나 이거 잘 구별할 줄 모른다) 절이었다.
무슨 행사중인지 야시장도 서고 디스코볼이 돌아가는 무대에선 동네 아줌마들이 댄스 중.... 얼굴에 다나카 바르고 롱지 입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이제서야 메솟에 왔다는 실감이 든다. 일순간 에네르기파 충전!!
푹 자고 일찍 깼다. 편한데도 이상하게 잠이 안 오는 숙소가 있는데 이 집에선 아주 푹 잤다.
옆방 아기가 벌써 깼는지 놀러나왔다. 묵직하고 잘 웃고 아무한테나 잘 가는 아기....
안고 나와서 숙소 골목 한 바퀴 돌아주시고....
내 옆방에 투숙한 왕언니들과 같이 엊저넥에 가본 절에 다시 가봤다.
이 동네에서는 스님들이 직접 거리탁발을 안 하고 불자들이 마련해온 음식들로 공양을 하시는 것 같다.
실을 늘어뜨린 의미는 뭘까. 어디 식일까?
처음 보는 광경인데 어찌나 궁금하던지... (혹시 아시는 분?)
내가 투숙한 4호실의 건너편 방은 루이네 방으로.... 방 앞에 넓은 마루가 깔려 있으니 호텔 식으로 말하자면 Suite급이다. 루이는 호주에서 온 9개월짜리 아기로 루이의 엄마 아빠는 7주간의 휴가를 즐기고 있다. 호주에서 방콕으로 바로 안 오고 싱가폴로 와서 방콕까지 기차 타고 왔단다. 방콕이나 치앙마이도 아니고 왜 하필 이런 시골에 왔느냐고 물어보니 이곳은 루이 엄마가 3년 전에 봉사활동을 했던 곳인데 호주에 돌아간 뒤에도 잊을 수가 없어서 이번엔 가족들과 함께 왔단다.
내 옆방에 투숙한 왕언니들은 미국과 에스토니아 사람들인데 시애틀의 모 대학 기숙사의 룸메이트 사이란다. 60세인 큰언니는 교직원이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는 학생이고... 메솟에는 국경 부근 난민 캠프에 큰언니의 친구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서 여행 겸 방문 겸 온 거란다. 귀가 번쩍 띄어 난민 캠프에 갈 때 나도 좀 낑기면 안 되겠느냐고 하니 문제는 없는데 방문허가를 받으려면 최소한 3일에서 잘못하면 일주일 이상 걸린단다.
여행기간을 보름 정도 늘려버려?
갈등 때리다가 포기했다. 정 가봐야겠으면 뒷날 제대로 도모하기로 하고....
밝은날 보는 메솟의 표정은 어젯밤보다 훨씬 생기가 돈다.
이 동네에서 썽테우는 가장 보편적인 대중교통.
탁 - 메솟 간 버스 터미널 바로 옆에 썽테우 터미널이 있다.
경찰서에서 아침시장에 이르는 메솟 최고의 번화가
오토바이 타고 가는 인간 나비? ^^
언니들, 방가방가!!
큰 길 건너 힌두공원.
힌두교 신들을 모신 공원이겠거니 하고 가보니 예상 밖으로 태국식 헤어스타일의 장군이 모셔져 있다.
뒷날 아유타야의 한 사원에서 이 장군과 아주 흡사한 모습을 한 동상을 다시 만났는데, 수코타이 왕조에 이어 아유타야 왕조를 일으켰던 우통왕이라고 했다. 그 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순전히 짐작이다. )
미얀마 - 태국 우정의 다리까지 걸어가볼까 했는데 사람들이 다 말린다. 6킬로란다.
썽테우를 타고 다리 앞까지 갔는데 다리를 건너가려면 여기서 미얀마 비자를 내라고 한다. 솔깃하긴 했지만 멈추기로 했다. 비용도 들고 (500밧) 그 비자 내봐야 멀리 가지도 못한다고 하고....
건너편에는 태국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태국 입국 비자를 받고 있다.
걸어서 이 다리를 넘나들며 보따리 장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나는 다리 밑에서 우회전해서 border maket으로....
귀금속(특히 옥), 롱지, 타나까 등 미얀마 특산물과 중국산 공산품, 수공예품 등을 팔고 있었다.
미얀마 옥은 품질이 좋고 가격도 저렴해서 중국에서 가공된 옥제품들 중 상당 부분이 미얀마 옥을 쓴다고 들은 적이 있다.
강변 뚝방에 수상한 녀석들이 오가며 "간지, 간지!"를 외친다. 과테말라 뒷골목에서 많이 듣던 소리다.
메솟은 밀수꾼들의 소굴로 알려진 도시이기도 한데 경찰들이 가끔 눈에 띄긴 해도 대강 화기애매한 분위기.
뚝방 건너 버려진 초지에 대강 지어진 판잣집들은 미얀마 난민들의 거처인 듯.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왔을까?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얼굴에 허옇게 다나카 칠을 하고 롱지를 입고 있으니... 메솟 인구 중 미얀마 사람들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진다.
메솟 시내로 돌아오는 썽테우가 세워준 곳은 내가 아는 탁 버스터미널이 아니라 동네 안으로 깊숙하게 더 들어온 아침시장이다. 메솟에서 가장 큰 농수산물 도매시장인 모양으로 규모가 꽤 컸다.
아낌없는 함박웃음을 날려주던 과일가게 아가씨.
워낙 이방인들이 많은 도시라 그런지 이 동네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도 이웃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준다.
여기는 모스크. 예배중이라 못들어오게 해서 밖에서 구경했다.
넌 언제 어디서 왔니?
모스크 뒤로 서서히 해가 기울고
바로 이웃에서는 중국 노래가 간드러진다.
소리의 진원지는 어젯밤에 본 중국식 사원 앞 길목... 사원 마당 뿐 아니라 사원 밖 거리까지 대단한 연회석이 차려지고 있다.
행사 준비하는 아저씨를 붙잡고 중국말로 너희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니 내가 중국여행객인 줄 알았던지 오늘밤에 이 마을에 사는 중국사람들이 다 모인다면서 너도 회비 내고 참가하란다. ^^
원래 미얀마에 살던 화교들인데 미얀마 정부의 통제가 하도 많아서 못견디고 5년 전에 이곳으로 집단이주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이 善堂을 세웠고 이들을 중심으로 커뮤니티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지역사회를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있단다. 매년 정월보름에 지방정부 주요인사들을 초청 잔치를 하는데 오늘이 그날이란다.
저녁 연회 무대에 올릴 공연준비로 아이들도 바쁘다.
사원 앞부터 경찰서를 지나 터미널 가는 입구까지 도로를 완전히 점거한 대단한 잔칫상.
어린 돼지 껍데기 굽는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
날이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켜지니 그 많은 자리가 정말 꽉 찼다.
도로 입구에는 무료입장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경비까지 세우고... ^^
다음날 산책길에 들러보니....
지난 밤의 잔해를 쓸어내는 건 미얀마 사람들이군.
중국인들의 잔치에 절대 빠지지 않는 '경품뽑기'의 뒷풀이도 아직 남아 있다. ^^
별로 볼거리도 없는 메솟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미얀마 난민촌을 도우러 오는 사람들인 듯하다.
나야 난민촌 근처에도 못 가보고 돌아가지만 곳곳에서 발견되는 따뜻한 마음들은 메솟이 전하는 메시지, 국적과 인종과 신앙과 빈부의 차이를 넘어 더불어 살아가려는 노력의 가치로움을 새삼 되새기게 해주었다.
정월보름이었던 지난밤, 옥상에서 full moon 파티를 하며 우정을 나눴던 친구들과 작별을 고했다.
미국인 앨리슨과 에스토니아인 팻은 한국에서 영어교사를 대거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내년쯤 지원해볼 생각이라고 한다. 낯선 나라에 오기 전에 미리 친구를 사귀게 되어서 안심이라고 하길래 한국에 오면 서로 어학선생님이 되어주자고 약속했다.
10시 반에 메솟을 출발해 탁 터미널에서 점심꺼리를 싸들고 아유타야 행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에 올라앉긴 했으나 이번 행선지 역시 미정이다. 방콕 입성까지 딱 일주일 밖에 안 남았는데 찍고 싶은 곳은 아직도 많으니 일정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어서....
아유타야 간 김에 카오야이 국립공원과 피마이 사원 쪽으로 뻗치고 싶긴 하지만 깐짜나부리도 궁금하고,
이 두 방향은 아유타야를 중심으로 해서 동 서로 갈려 있다. 욕심이 많으니 마음만 급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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