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陽光燦爛的日子

눈길 소동

張萬玉 2010. 1. 6. 09:15

내게도 눈이 내리면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가던 때가 있었지.

언젠가부터 눈길이 무서워졌다. 

산 속에 눈이 내리면 공기도 더할 나위 없이 청신하고 적막하기 그지 없건만

요즘 나는 그림 같은 앞산을 바라만 보고 앉았다.

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면 무릎 더 아프다고 핑게를 대면서

늘 함께하던 주말등산 마다하고 남편 혼자만 보낸 지 벌써 3주째. 

무릎이 약해지니 마음까지 약해진 건지, 사실은 덕지덕지 쌓이는  게으름이 나를 겁쟁이로 만드는 건지....

(눈길에 나동그라지는 게 뭐 대수라고....ㅉㅉ)   

경사로 말하자면 아직도 통제구간이라는 인왕산길 저리가라 하는 우리 집앞 도로 풍경...

그게 날 더 겁쟁이로 만드는지도 모른다. 

 

25센티의 폭설이 내렸던 어제, 집 앞 도로는 종일 그야말로 쥐죽은 듯했다.

남편이 출근하던 새벽 6시 반쯤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 서버린 버스는 여덟 시 반이나 되어서야 치워졌고

인적마저 끊긴 도로는 산골 오지마을처럼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버스가 끊겨 공부하러 오기로 한 애들도 못왔고.... 

역시 약속 취소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힌 아들넘이랑 쟁여놓은 알밤 까먹으며 혹한을 견디는 모자에게

새벽에 출근했던 남편이 전화를 걸어온다. 11시에 회사에 도착했다고...

퇴근길엔 제설차가 지나갔는지, 아니면 어느길로 와야 할지 요령이 생겼는지 두 시간 반 걸려서 돌아왔다. 

길 미끄러운 거보다 서버린 차들이 도로를 메워서 그게 더 어려웠단다. 이면도로만 골라 왔다네.

혹시 여관잠 자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ㅎㅎ  

 

 

자동차 헛바퀴 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끊이지 않는 집앞 도로만 내다보고 있으면 바깥세상은 천하에 걸음할 데가 못 되는 위험천지같지만 월급 받는 사람들은 오늘도 끔찍한 뉴스를 뒤로 하고 출근길에 오른다.

와야 하는 아이들은 못왔어도 가야 하는 나는 가야지.

오기 힘들텐데 다음으로 미루자는 문자를 받긴 했지만 버스만 다니면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미룬 날 다시 폭설 내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가다가 못가면 폭설세상 탐험이라도 하는 거지.

 

올겨울 들어 처음 내복 챙겨입고 등산화에 스틱까지 짚고, 복장에 어울리게 교재는 배낭에 넣고 출동!

다행히 오늘은 드물기는 해도 버스가 다닌다.

차 다니는 도로도 문제지만 인도도 못지 않게 심각하다. 미처 치우지 못한 새에 얼어붙어버려 가만히 서 있어도 그냥 아랫동네까지 내려가게 생겼다. 정말 노인들은 방콕 하셔야겠다.

 

드디어 버스 한 대 와주신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기사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어제는 미림여고 길 피하고 봉천고개 길 피하여 노량진으로 우회해 다녔단다. 

그럼 어제 이 동네 월급쟁이들은 걸어서 전철역까지 갔을까? 

버스는 아직도 미끄러운 도로를 아장아장 밟으며 무사히 날 광화문까지 데려다주었다. 정류장에서 삼중추돌한 버스들을 피하느라고 낑낑거리기는 했지만, TV에서 중계해주는 교통대란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수준.

 

거기서 나는 20여 분 걸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화문 사거리 인도는 눈을 거의 치웠다지만 여전히 아장아장 걸을 것을 요구한다. 

순수한 눈길보다 더 미끄러운 게 녹다 만 눈이 남아 있는 빌딩 앞 타일바닥이다. 

게다가 언덕진 내수동 길.... 오버가 아닐까 하면서도 들고나온 등산지팡이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어느 아주머니는 발에 철수세미를 감고나오셨더라. ㅋㅋㅋ)     

 

수업 마치고 나오는데 말갛게 씻긴 대기에 햇빛까지 쨍쨍하여 어찌나 상쾌하던지.

가로수들, 거리공원의 조각들, 빌딩들, 심지어 한파를 피해 묶어둔 포장마차들까지 

포근해 보이는 흰 외투를 들러쓰고.... 세상은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그림이다. 우리가 뭣 땜에 심란했더라?   

차와 사람이 다니는 길만 보송보송하게 남겨두고 내릴 순 없을까?

아니다, 비닐하우스 위도 남겨둬야지. 그리고 또 어디?

 

어느새 열심히 치웠던 대로들은 햇볕에 거의 말라 예전의 속도를 회복했다.

하지만 난곡길은 여전히 팥죽길이다. 내일은 더 춥다니 그대로 얼어붙겠군.

산이 무서우니 이번 주부터 헬쓰라도 시작할까 했는데.... 미끄러질까봐 등록하러도 못 가겠네.

이런 경사에서는 스틱도 소용없다. 아이젠이라도 끼우고 다닐까?

남 눈치 보지 말고 천진난만하게 박스 깔고 엉덩이로 내려갈까? ㅋㅋㅋ

다음 주초에 또 눈 온다는데... 언제나 이런 겁쟁이 같은 소리 뚝 그치고 겨울 속으로 뛰어나가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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