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가 구구절절 길어지는 걸 피하기 위해 어디서 어디까지 무얼 타고 어떻게 갔다.... 이런 얘긴 생략하려고 했는데
그 소소하고 뻔한 얘길 여전히 떠벌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인천에서 보딩패스를 받을 때 나리타행 좌석뿐 아니라 나리타에서 갈아탈 알 이탈리아나 항공 좌석까지 받았다. 당연한 얘기다.
좀 특이한 것은 나리타에서 내린 곳은 2청사였는데 갈아타려면 1청사로 가라고 해서 셔틀버스를 타고 1청사로 이동해 대기하고 있었다.
(웃기게도 비행기 탈 때는 다시 2청사로 이동시켜준다. 이해가 좀 안 가지만 뭐 그럴 사정이 있겠지. 그게 요점은 아니고...)
대합실에서 4시간이나 대기하는데 혼자 맹숭맹숭 갈 리 있나... 또 길동무를 사귀었다.
직장 사직하고 4개월간 유럽을 떠돌겠다고 나선 30대 중반의 아가씨다.
서로의 코스를 묻는 등 한참 수다를 떨고 있는데 알 이딸리아나 항공사 직원이 와서 보딩 패스를 보여달라더니 따라오란다.
JAL 항공에서 overbooking 하는 바람에 내 좌석이 없어져서 새 좌석 배정해 주려고 한참 찾았단다.
어쩐지 방송에서 내 이름 비슷한 발음이 두어 차례 나오는 것 같더니...
헛, 그런데 좌석번호를 보니 비즈니스석이다. 허허, 살다 보니 내 팔자에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구나.
아가씨 말이, 아까 부를 때 왔으면 이코노미석 맨 뒷자리(화장실 옆.. ^^)를 받았을 텐데 그 자리는 다른 누구 차지가 되었고
오히려 늦게 온 게 행운이 된 거라나.
세 좌석 놓을 자리에 두 좌석을 놓으니 이건 완전 운동장이다.
왼쪽 팔걸이 속에는 모니터가, 오른쪽 팔걸이 속에서는 식탁이 나오고 의자 아래에도 푹신한 발걸이가 붙어 있고
완전 좋은 건 이 발걸이를 좌석과 평면을 이룰 정도까지 올릴 수 있고 등받이도 그 각도까지 제낄 만한 공간이 나오니....완벽한 침대모드도 가능하다는 사실....
게다가 근사해 보이는 회색 파우치까지 하나씩 나눠준다.
열어보니 세면도구다. 시간 비행으로 용모가 좀 흐트러져도 눈꼽이나 떼고 심하게 삐져나온 머리칼에 물이나 발라 재우면 그만인 내겐 별로 필요치 않은 물건이지만
비즈니스맨들은 공항에서 바로 바이어 만날지도 모르니 이런 게 필요한지도 모겠구나.
그래도 그렇지.... 치약, 칫솔이며 면도기는 기본이고 얼굴크림, 립크림, 향수에 양말까지 갖춘, 선물세트라고 해도 부족함 없는 완벽한 일습이다.
(신기해서 아들넘 갖다주려고 챙겨놨다가 배낭 무거워지는 게 무서워 결국 민박집 아저씨 드렸다.ㅎㅎ)
식사 시간이 되니 VIP 대접이 절정을 이룬다.
일단 하얀 식탁보 깔아주시고....
달고 향긋한 빨간 오렌지 주스(자몽주스인 줄 알았다) 한 잔씩 서빙해주더니 고급 브로셔처럼 만든 식사메뉴와 포도주 메뉴를 나눠준다.
이탈리아 음식도 포도주도 잘 모르데 이 일을 어쩐다?
평민 티 안 내려고 브로셔에 코를 박고 있는데 막상 서빙할 때는 '치킨? 생선?' 뭐 이 정도로 상냥하게 물어봐주더군. ㅋㅋ
늘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야 별걸 다 가지고 호들갑이라고 웃겠지만 평생을 무수리로 살아온 이 아줌마에겐 완전 로또이기에....
내 무수리 친구들에게 보여주려는 일편단심으로 비즈니스 클래스의 런치 테이블을 열심히 촬영을......ㅎㅎㅎ
요리가 서빙되기 전에 맨 왼쪽 막사발 같은 데는 애피타이저인지 술안주인지 암튼 여러 nut가 담겨나왔고
왼쪽 유리잔에 담긴 노란 액체는 soave classico라는 white wine.
(스페인어 suave로 유추하여 순한 와인이라고 짐작하고 딱 외워뒀다가 늘 먹는 와인인 척 심상하게 주문하는 데 성공.. ㅋㅋ)
크기가 제대로인 스테인레스 나이프와 포크가 E클래스에 없는 냅킨에 단정하게 싸여 서빙되고 별도의 소금 후추 통까지.... 제대로다.
야채를 드시겠냐 쇠고기를 드시겠냐 해서 선택한 야채파스타.
브로컬리와 토마토, 파슬리에 크림치즈를 적당히 얹은 담백한 맛이다.
약간 덜 익힌 듯한 파스타의 쫄깃함마저도 이탈리아로 향하는 기분을 고조시켜주었다.
생선의 육질을 보아하니 대구 스테이크였던 듯.
볶은 콩줄기와 당근, 샐러리와 감자를 곁들였다.(흰 것이 샐러리, 노란 것이 감자)
이건 한국의 퓨전 서양음식 웬만큼 하는 집에서 맛볼 수 있는 정도.
포도주 안주 하라고 준 듯한 finger food
오른쪽은 당근과 샐러리, 말린 살구를 곁들인 두 가지 치즈(저 갈색 테두리 있는 치즈 이름이 뭔지 생각 안 나는데 쫄깃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왼쪽은 설명이 필요없겠지.(단, 머루포도 종류인 듯한 포도가 엄청 달더군)
배가 터질 지경인데 나더러 어쩌라고....
딱 한입꺼리라지만 엄청난 달콤함으로 날 위협하는.... 그러나 도무지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위험한 녀석들....
게다가 커피맛.... 두말할 필요도 없다. 천상의 맛이라고 해둘까?
여행 다니면 2~3킬로 정도 빠지는 게 보통인데 이탈리아에서 식생활이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클나겠다. 2~3킬로가 오히려 늘겠는걸.
요건 점심보다 간단했던 저녁... 사진엔 크림치즈를 얹은 연어 스테이크가 빠졌군.
근데....내가 지금 너무 오바하고 있나? ^^ (즐거운 기분은 오바할수록 배가되는 법이라.... ^-----------^ )
헌데 이 해피한 와중에도 습관처럼 삼천포로 빠지는 내 삐딱함이라니... 못말리겠다.
여기 앉든 저기 앉든 도착하는 시간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나같은 평민들과는 달리, 여유있는 사람들이 좌석에 돈을 들이는 것은
여행의 조건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겠지. 실제로 편안한 조건과 이에 덧붙어오는 대접받는 기분은 여행의 고단함을 좀 덜어주긴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서비스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장거리 비행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듯...
즐거운 식사시간은 잠깐, 첫새벽부터 뺑뺑이친 끝에 지나치게 피곤했던 내 눈과 귀는 최신 영화도 신선한 음악도 완전히 거부했고 침대급 잠자리와 푹신한 면이불로 유혹해보지만 아예 숙면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3년 전 멕시코 갈 때 걸린 시간의 절반밖에 안 되는 비행인데도 그때보다 두 배는 괴로운 시간을 보냈으니....
몹시 고단했던 끝이라든지.... 영화목록을 열어보니 언젠가 보려고 점찍어뒀던 영화들이 수두룩하더라든지
들고 온 책이 아껴먹으려고 남겨둔 간식처럼 애타게 재밌다든지 노트북 속에 level clear를 목전에 둔 게임이나 로그온을 기다리고 있는 채팅친구가 있다든지....
일정 시간 내에 결정을 내려야 할 고민거리가 있다든지 목하 연애중이라 아무리 떠올려도 질리지 않는 애인 얼굴 하나가 마음 속에 있다든지 등등등....
아무리 다리 펴기도 어려운 옹색한 E클래스, 자주 흔들리고 화장실 냄새까지 희미하게 감도는 뒷자리에 앉았다 해도 이런 것들이 있으면
비즈니스 클래스의 대접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천리길을 한 걸음 같이 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문제는 마음이고 의욕이고 열정인데....
외부적인 조건에 집착하는 세태에 휘둘리다 보니 그 뜨거운 알맹이를 어떻게 되살려내야 할지를 점점 잊어가는 듯하다.
내가 오늘 받은 대접은 실제로 별 건 아니지. 하지만 작은 일에 기뻐하는 그 마음이 별거 아닌 대접을 더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어준다는 것,
그런 마음의 불씨가 오히려 실질적인 조건보다 삶에 있어서 훨씬 강렬한 연료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련만,
왜 우리는 비즈니스석에 앉지 못해 안달일까. 왜 부자되세요, 가 최고의 덕담이 되고 말았을까.
별것도 아닌 것 갖고 참 길게도 떠들었다. 자다가 얻어먹은 떡 한 조각 때문이다. 그리고 가도가도 끝나지 않는 지루한 비행도 한몫.....^^
뒷날 여행이 지루한 국면에 접어든다 해도 이런 '개똥철학' 활동으로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 ㅎㅎㅎ
이건 후지산이다.
여기는 몽고에서 북쪽 지점 어딘가의... 러시아 영토.
총 비행거리는 만 킬로가 넘었다.
북쪽으로 항로를 잡은 비행기는 러시아의 동토를 동에서 서로 길게 길게 가로질렀다.
세상에, 비행기로 10시간 넘게 날아가도 끝이 안 나는 러시아라는 나라.....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나라 아닌가.
상 페테르부르크 부근 어디쯤인가?
지저분한 창문을 통해서나마 계속 찍어본다. 지상에서는 찍을 수 없는 풍경이기에....
최고의 사진이 아니라고 주눅들지 마라. 내 사진이 최고의 사진이지.
(이런 오바가 여행을 꽉 차게 만들어준다는 걸 절대 잊지 말아라...고 다짐..^^)
알프스의 상공이라니 로마가 멀지 않았다.
비행 내내 백열하던 태양이 드디어 붉은빛으로 수그러들었다.
어느 순간에 어떻게 변한 것일까? 석양은 어떻게 오고 밤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지구를 돌아갈 때마다 난 이게 늘 궁금했는데 눈을 찌르는 태양빛 때문에 창문을 닫아둬야 하니 그 궁금한 순간을 늘 놓치고 만다.
드디어 떼르미니 공항에 도착했다.
수경을 쓴 조각상이라니.... 정말 Romantic하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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