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다리 걸쳐 알게 된 부동산으로부터 주소를 받아들고 혼자 찾아왔던 작년 크리스마스 전날,
동네 아래에서 치올려보이던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니 울퉁불퉁한 돌계단에 며칠 전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집 뒤에 바로 잣나무숲이 병풍처럼 버텨선 산 아래 첫집이라 최고의 공기, 최고의 전망을 갖춘 집이지만
가파른 비탈, 가파른 돌계단, 그걸로 부족해 2층계단까지....
혹시라도 남편에게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 오면 나 혼자 대체 어쩔 것인가 싶은 일말의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119를 믿고!) 과감하게 결정해버렸더니
이런 카드 속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집은 아니고... 우리 마당에서 보이는 옆집들 풍경.ㅎㅎ)
비록 눈 내리면 곧장 눈 쓸러 출동해야 하고, 실내외 온도차로 현관 문지방이 얼어붙으면 가끔 망치로 두드려깨줘야 했지만
잘 지은 벽돌집은 영하 16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으로부터 우리를 아늑하게 보호해주기에 충분했고
머지 않아 봄이 왔다.
부지런한 집 주인은 1층 마당과 2층 화단, 집 뒤 텃밭, 돌계단 주변 할 것 없이.... 흙 한 주먹이라도 있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뭔가를 심어두었다.
서울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 번 내려오는데, 내려오면 이삼 일 정도...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 일만 하다 돌아간다.
정작 자신은 가꾸어놓은 것들을 언제 즐기려는지, 누구 보라고 저렇게 가꿔주는지 본의 아니게 호강을 하게 된 우리는 그저 황송할 뿐이다.
운치있는 정자까지 딸린 이 특급 별장을 즐기는 건 우리 두 사람뿐....아침 저녁 뒷짐 지고 위 아래로 한 바퀴씩 돌아주시며 주인 행세 하는 기분이란! ㅋㅋㅋ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이 살다 간 자리를 이제 철쭉, 라일락, 민들레, 양지꽃, 꽃잔디, 앵초, 제비꽃, 할미꽃이 차지했다.
1층 마당에선 상사화, 작약이 출연대기중이고 시금치로 뒤덮였던 2층 화단은 이제 열무, 고추, 가지.... 등등 무수한 채소의 어린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다.
창문을 열면 뒷산 비탈에 선 병꽃나무와 잎이 무성해진 개나리 가지, 미처 꺾지 않아 쇠어버린 두릅이 손짓을 하고
이미 시원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부지런히 잣나무 향기를 실어나른다.
꽃의 계절, 혹은 신록의 계절 5월이 봄비로 씻어낸 말간 미소를 보내며 어서 나오라고 손짓한다.
어찌 그 부름을 거역할 수 있으리... 오늘도 우리는 등산화끈 조여매고 집을 나선다.
뭐니뭐니 해도 이 집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빼어난 전망이다.
거실에서 바로 축령산, 서리산, 주금산으로 이어지는 800미터급 산봉우리들을 마주할 수 있는.....
막 비가 그친 오후.... 주금산 능선이 구름을 마구 피워내고 있다.
서리산 능선도 구름에 휩싸였다.
그러나 우리가 서리산보다 더 사랑하는 앞산 능선길의 윤곽은 오히려 더 뚜렷하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능선이 뚝 잘린 데가 축령산 가는 길목에 뚫린 터널 위쪽. 조봇한 오솔길로 이어지던 우리의 산책길 코스에서 갑자기 시야가 툭 터지는 지점이다.
구름 그림자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맑은 날.
다 좋은데.... 오른편의 '마빡이'마을이 눈에 딱 걸린다. 자연스러운 산의 흐름을 단 한방에 깨주는군.
사실 우리 동네도 맞은편에서 보면 역시 기계충 먹은 머리 모양일 테지만... 앞동네처럼 꼭대기까지 밀진 않았으니 그나마 덜 미안하다. ㅜ.ㅜ
이 동네에서 가장 전망좋은 집에 살고 있는 견공 반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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