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Ⅰ-1. 선조

張萬玉 2012. 1. 4. 11:53

아버님의 고향은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구산리,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의 산골마을이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고향의 시제 때 나를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버지 생전에는 고향에 가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몰락 양반의 후예인 듯하다. 일제말에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항구도시인 군산으로 이주하셨는데, 보증을 잘못 서셔서 곤경에 빠지게 되자 감행된 야반도주라고 들었다. 그 와중에도 족보와 제사도구인 목기들은 빠짐없이 챙겨오셔서 제사 때마다 손수 손질을 하곤 하셨다.

고조할아버지 제사를 비롯하여 일 년에 제사가 열두 번이었고, 매월 초사흘에는 할머니께서 장독대에 올라가 신령님께 고사를 지내셨기 때문에 배고픈 시절에도 늘 떡은 실컷 먹었다.

 

할아버지는 산촌에서 마을 훈장을 할 정도의 한문은 익히신 듯하나 농사나 노동일과는 거리가 멀어 경제적으로는 평생 무능했던 가장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셨지만 가난한 살림 탓에 책도 변변히 구해보지 못하고 필사본 서적 몇 권을 소리 내면서 되풀이 읽곤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인지 글 공부를 하면 일을 안 하게 된다고 자식들에겐 글을 가르치시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 자신은 가난하지만 글 읽는 선비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셨고 동네에선 품위를 지닌 동네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오룡동 산동네에서 살 때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글을 깨우친 분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동네 반장 노릇을 하셨다.

6·25전쟁 중 인민군이 점령했던 때에도 동네의 원로로 대접받았고 인민군이 물러난 후에도 동네 반장 일을 계속하셨다. 좌우가 극심하게 대립했던 시절, 바로 아랫동네에서 이웃 간에 끔찍한 살상이 저질러졌지만 우리 동네에선 그런 살상이 일어나지 않은 것도 할아버지께서 애를 쓴 덕분이라고들 했으며 그 공로로 이승만 정부로부터 은수저를 선물받기도 하셨다.

자식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지만 나의 누나인 손녀딸은 끔찍이 사랑하여 명심보감이나 붓글씨 등을 가르치셨다.

말년에는 아들의 장사가 번창했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하게 사시다가 천수를 다하셨다.

장례는 꽃상여에 만장이 늘어선 전통 장례로 치러졌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내가 상여행렬 맨 앞에 서서 영정을 받들었다. 그때 기억 속의 나는 할아버지를 여읜 슬픔보다는 만장을 앞세운 행렬의 선두에서 간다는 것이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으쓱했던 철부지였다.

 

할머니는 체구가 작은 분이셨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농사일이든 집안일이든 도맡아 하셨다.

재취로 들어오셔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으셨는데 나의 아버지는 할머니의 장남이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나를 “우리 쌀강아지”라고 부르며 몹시 애지중지하셨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부담스러웠고 나를 강아지처럼 어리게만 보는 것이 창피스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올 때 작은집에 남으시라고 해도 끝까지 장손을 따라가겠다고 하셔서 내 등에 업혀 서울로 오셨지만 중풍으로 6개월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도 체구가 작으셨다. 한문을 배우셨지만 가난한 농사꾼으로 사시다 비교적 일찍 돌아가셨다.

반면 외할머니는 키가 크고 힘도 세시고 억척스러우신 분이다. 기억력도 비상하시고 99세까지 장수하셨다.

원도 산골에서 태어나신 분이라 어릴 때부터 도라지 캐러 다니면서 산삼도 많이 캐어 드셨다는데 그 덕분인지도 모른다.

조선 말 강원도에서도 의병이 크게 일어났지만, 조직이 지리멸렬해지면서 산골 사람들의 식량도 약탈하곤 했던 것 같다. 제 식구 먹고 살기에 급급한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식량을 빼앗는 자는 모두 화적패였을 터, 외할머니의 옛 얘기를 듣다 보면 얘기 속에 나오는 화적패들이 혹시 의병 잔당이 아니었을까 싶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어쨌든 화적패가 출몰하는 뒤숭숭한 시대에 외할머니 일가는 칠성교란 신흥종교에 이끌려 흉년과 난리를 피할 수 있다는 계룡산 신도안 지역으로 이전해오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서 외할아버지를 만나 2남1녀를 낳았지만 평생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달프게 사셨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정말 꿋꿋하셨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힘겹게 자식들을 키우면서도, 심지어 자식들 모두 앞세우고 말년엔 외손주에게 의탁하여 사시면서도 신세 한탄 한번 하시는 법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기가 꺾이는 법이 없던 분이셨다. http://blog.daum.net/corrymagic/9475773

 

아버지는 3남 1녀의 둘째다. 그러나 이복형과 형수가 딸 셋만 남기고 해방 직후 콜레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고향을 떠나 군산으로 온 이후 돌산에서 돌 깨는 인부로, 부두의 하역노동자로, 그리고 6.25전쟁 이후에는 장사꾼으로 살아가셨다.

서당이나 학교 근처엔 가보지도 못하고 어깨 너머로 배웠기 때문에 한글을 겨우 읽을 줄만 알고 쓸 줄은 모르셨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자식들은 잘 가르치려 하셨고 자식들 공부 잘하는 것이 큰 낙이셨다.

아버지는 부두노동자 시절에 남로당과 연계되어 약간의 정치학습과정을 거친 듯하다. 당시 아버지 형제들은 날마다 골방에 모여 밤늦도록 무언가를 열심히 토론했다고 한다. 장항제련소 노동자였던 작은아버지는 국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셨다. 인민군이 제련소를 점령했을 당시에도 일을 했다는 것이 부역죄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역시 후퇴하던 인민군을 따라나서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막상 대열이 집에서 자꾸 멀어지자 집안의 가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대열에서 이탈하셨다. 연좌제의 공포가 시퍼렇게 존재하던 그 시절에 집안에서는 당시의 일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다. 이 모든 얘기들은 아버지 사후에 어머님으로부터 조금씩 주워들은 것이다.

어쨌든 해방 이후 6.25전쟁이란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친동생을 뺏기고 본인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그 충격을 아버지는 평생 잊지 못하셨던 듯하다. 바쁜 와중에서도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 나가 연설내용에 귀를 기울이실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있으셨지만 남들 앞에서는 결코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선 생전에 입버릇처럼 ‘당에 들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께 정치는 사회변화를 위한 지극한 관심사항이었지만 동시에 가정을 파탄시키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빈농의 2남1녀의 둘째다. 외조부를 닮아 체구는 작지만 외조모를 닮아 부지런하고 기억력이 비상하셨다.

일제말에 정신대 차출을 피해 어린 나이에 열두 살의 연상, 그것도 재취 자리로 시집을 오셨다.

물론 당사자들의 대면 한 번 없이 집안 어른인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사이에서 결정된 혼인이었다. 중매는 외가 이웃집에 사시던 작은어머니가 서셨다.

어머니는 시집오자마자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있던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인민군 대열을 따라가다 이탈하신 아버지가 숨어계시던 고모 집에 옷수발 하러 드나드시다가 거기서 깨 한 말을 빌려 시장에 펴놓기 시작했는데, 이 변변치 못한 장사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신 뒤에는 가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전라도 충청도 일대의 시골 장을 돌아다니며 곡식을 사들이고 어머니는 명산시장에서 소매를 하는 분업이 이루어졌다.

시간이 지나 가게도 마련하고 살림살이도 나아지자 아버지는 인근 장을 돌아다니는 생활을 중단하시고, 장사하며 사귄 친구들에게 물건을 고정적으로 구입하면서 소매에만 전념하셨다. 이때의 생활과 관련되어 아버지만의 독특한 자식생일 기억법이 고안되었다. 누나는 강경 장날에 출생했다 하여 갱갱이장, 나는 판교 장날에 출생했다 하여 너덜이장 등으로 우리의 생일을 기억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오룡동 산동네에서 명산동 시장골목의 곡식창고까지 딸린 집으로 이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가정의 경제형편은 근근하게나마 형님이 남기고 가신 세 딸을 부양하고 동생이 남기고 간 작은집 가족들 생계까지 돌볼 만큼 안정이 되었다.

가게는 목이 좋았고 어쩌다 팔리는 곡식까지도 좋은 물건으로 구색을 갖추었다. 품질이 좋은 곡식을 골라 충분히 비축해놓고, 곡식이 깨끗하고 실하게 보이도록 늘 정성을 기울이셨으며 자전거가 닿지 않는 산동네 골목집도 마다 않고 꼬박꼬박 배달하셨다. 이익만 따지는 야박한 장사꾼은 아니셨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겐 외상도 주고 거지들이 모아온 동냥곡식은 후하게 쳐서 다른 곡식과 바꿔주곤 하셨다. 좋은 물건과 구색까지 두루 갖춘 가게, 그리고 정성으로 고객을 대하고 인정을 베푸는 것이 그가 익힌 장사의 기술이자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곡물가게로는 다른 집을 제치고 가장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정말 성실한 가장이셨다. 머리를 짧게 깎고 새 옷 한 벌 제대로 없이 늘 물들인 군복 아니면 기운 옷을 입으셨으며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검소하고 부지런한 분이셨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셨어도 일가친척간의 우애는 끔찍이 챙기셨고 동넷분들과의 의리도 돈독하셨다.

옛날 어르신들이 그랬듯 아버지 역시 자식 귀애하는 티를 내지 않는 엄한 분이셨지만, 앞으로 장손 노릇을 해야 할 외아들의 역할을 가르치시느라고 그랬는지 어릴 때부터 집안 대소사에는 꼭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명절 때 친척들에게 쌀푸대를 돌리거나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 다닐 때, 경조사를 당해 친척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릴 때, 매년 여름 아버지 친구분들과 바다 건너 장항 백사장으로 모래찜하러 갈 때, 개 잡을 때 등등... 그런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든든한 거목 같다.

아버지의 문제는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드시기 시작한 술이었다.

술에 강한 체질은 아닌데 늦게 배운 술버릇이 고약하여 점심식사 하시면서 한 잔 시작하기만 하면 막소주에 김치나 마른멸치를 안주삼아 저녁까지 계속 들락날락 한 잔씩 들이키시다가 해 저물녘이면 이미 기분 좋게 취하셔서 가끔 길거리에서 주무시기도 하고 집 앞 도랑에 빠지기도 하셨다. 한참 바빠지는 오후 장사는 당연히 어머니 몫으로 떨어지고 배달이나 장사가 끝난 후 가게 물건을 집에 딸린 창고로 옮기는 일은 가족들이 맡아야 했다. 그나마 할아버지 생전에는 나은 편이었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빈도가 더 심해졌다.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현세의 고달픔을 내세의 희망으로 견뎌내고 위로받으시면서 새로운 세계에 곧바로 빠져버리셨다. 주일예배는 물론 새벽기도, 구역예배도 한 번 빠지지 않으셨고, 틈만 나면 성경을 읽으셨다. 어깨 너머로 배우신 한글이라 처음에는 어려운 글자를 자식들에게 일일이 물어가며 읽으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글 읽기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기억력이 좋으신 분이라 늘 성경귀절을 줄줄이 외우고 다니셨다.

어머니의 기도가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결국 아버지께서도 술을 끊고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교회에 다니시면서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셨다. 어머니가 빨래하실 때 우물물을 길어다 주시는 등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주신 적 없는 자상한 모습은 어머니는 물론 우리들까지 어리둥절하게 만드셨다.

장사는 여전히 잘 됐고 첫딸인 누나는 서울교대에 단번에 합격하여 서울로 유학을 떠났으며 당시 통일교회에 빠져 부모님의 애를 태웠던 나도 어머니의 간절한 정성에 항복하여 통일교회를 정리하였다. 돌이켜보면 그 때가 우리 가족으로서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평생 잔병치레도 거의 없이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뇌일혈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청소로 생계를 이어가는 과부를 도와 시장청소를 마치시고 촛불 아래서 성경책을 읽고 주무셨는데, 그렇게 누우신 채 영원히 잠드셨다. 50년의 고달픈 인생을 마감하셨던 그때가 1967년.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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