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Ⅱ- 1. 노동현장으로의 투신

張萬玉 2012. 1. 4. 13:48

가슴으로는 노동현장으로의 투신을 고민하였지만 나의 가정형편은 만만치 않았다. 누나의 초등학교 교사수입으로 그럭저럭 5인가족의 생활을 꾸려지긴 했지만 누나도 이제 결혼을 해야 하니 가족의 생계가 내 어깨에 걸려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주식회사 코오롱에 취업하였다. 코오롱에 취업하면서 잠실에 13평짜리 임대아파트도 마련하였다. 입주 초기에는 임대로 시작하였지만 곧 할부분양으로 전환되었다.

서울의 떠돌이 전세생활 5년여 만에 갖게 된 내집마련의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온가족이 나서서 천장과 벽에 벽지를 바르고 떠돌이 이삿짐을 5층까지 져나르면서도 힘들기는커녕 즐겁기만 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누나도 결혼을 하게 되고 나의 방위 생활도 순조롭게 지나갔다. 집안형편 때문에 어렵사리 서울대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둘째누이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우체국에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대기업 직장생활 3년은 가정의 경제적 형편은 낫게 하였지만 나의 관심을 직장의 업무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였다. 직장에서의 업무보다는 퇴근 후의 야학이나 교회 대학생부 활동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으니, 퇴근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마자 상사 눈치도 아랑곳없이 넥타이를 풀어 서랍에 집어넣고 곧바로 퇴근하는 용감한 사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3년간의 직장생활 동안 마케팅실, 인사과, TQC사무국 등 여러 부서를 전전하게 되었다.

 

내가 코오롱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기간 중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강제로 해산되고 노동조합 사무실과 노동교실이 폐쇄되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노동교실을 사수하기 위해 노동교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하였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이 되면 농성에 참여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노동교실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경찰은 골목길 입구부터 봉쇄하였다. 농성노동자들 중 신승철은 칼로 자해를 해가면서, 민종덕은 건물에서 투신하면서 경찰의 강제진압을 저지하려 하였지만 결국 경찰에 의해 농성은 해산되었고 농성자들은 모두 연행되었으며 노동자들의 모임공간과 교육공간은 강제 폐쇄되었다.

 

나는 교회 대학생부와 교회 당회를 설득하여 교회 교육관에 노동교실의 과정을 모방한 노동야학과정을 개설하였다. 이 과정의 수료생은 동화모임이라는 자치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소그룹 모임으로 재조직된다. 모임의 목적은 탄압으로 침체된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재건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었다. 물론 소모임 대부분의 활동은 노동조합의 조직부장, 교선부장 등의 간부들과의 긴밀한 의논하에 진행되었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탈환하고 노동조합이 노동교실의 활동을 정상화할 때까지 교회의 노동야학은 지속되었고 동화모임의 회원들은 노동조합 사무실 탈환 등 훗날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재건하는 주역들로 성장해갔다. 동화모임 회원 중 김준용, 황만호, 강석호 3인으로 구성된 소모임은 정치, 경제, 역사, 노동운동사 등 좀더 깊이있는 내용을 가지고 나와 문성현이 특별지도를 하였다. 이들 중 김준용은 1983년 대우어패럴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어 구로공단지역 민주노동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988년 서울노동조합협의회,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며 황만호는 청계피복노동조합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노동조합의 부위원장이 된다.

 

다른 한편, 나 자신의 노동현장 투신을 위한 준비로서 성수동 지역에서 카톨릭노동자회(JOC) 회원으로 활동하던 해고노동자 박문담씨를 만나 노동자 소모임활동에 대한 경험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오롱에서의 직장생활을 정리한 후 그의 도움을 받아 성수동의 삼미전자의 공원으로 취업하게 된다.

삼미전자는 스피커를 만드는 회사로 1,0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한 비교적 규모 있고 경영도 탄탄한 회사였다. 내가 배치된 작업은 합성수지 원료를 배합하고 열처리를 하여 스피커의 재료를 만드는 배합작업으로, 작업자는 단 두 명이었다. 죽 모양으로 배합된 재료가 다음 공정에서 스피커 모양으로 성형되고 건조된다. 스피커의 음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공정이지만 작업은 단순하였다. 잔업도 많지 않고 힘들지도 않았다.

문제는 임금이었다. 한 달 동안 일하고 받은 급여가 3만 원이 안 되었다. 당시 코오롱에서 받던 급여가 상여금을 제외하고도 25만 원 정도였으니 팔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첫 월급봉투를 받아드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청계피복의 미싱사들도 그보다는 훨씬 많았다. 비록 기술이 없는 공원이지만 군대도 마치고 나이 서른을 앞둔 성인 남자가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인지 답답하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지만 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현실은 예상보다 더 냉혹하였다. 그 정도 소득으론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삼미전자의 공원생활을 정리하고 아파트 건설 공사장의 배관공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파트 건설공사의 배관공은 일용직이지만 초보자도 일당이 3,000~4,000원은 되고 경험을 조금만 쌓으면 6,000~7,000원은 받을 수 있었다. 강남 일대에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참이라 겨울철에도 일거리 걱정은 없었다. 처음에는 초보자인 데모도로 시작하였지만 도면을 볼 줄 알고 자질도 하고 전기용접과 산소절단을 약간 익히니 수년 경력의 기술자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서너 달 동안 두어 군데 일터를 옮기면서 기술자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틈틈이 전기용접과 산소절단을 연마하였음은 물론이다. 배관공이 되자 가족들의 생계도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었다.

 

배관공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변의 인간관계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교회에서의 공식적인 활동들은 모두 정리하고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중심적으로 유지하였다. 동화모임 김준용, 황만호의 소그룹과 청계피복노동조합 학습소그룹의 경제학 학습 등은 지속적으로 지도하면서 JOC출신 해고자인 유동우와 전태삼, 청계피복의 양승조, 민종덕, 이숙희, 신순애 등과의 교류도 이어나갔다. 물론 노동현장에 가기로 한 문성현, 정금채와는 더 자주 어울렸다. 학생회장을 지냈던 탓에 졸업 후에도 동향파악대상자였던 정금채는 형사들의 감시를 피해 우리집에 기거하면서 나의 데모도로 시작하여 배관공 생활을 함께 하였다. (그때의 인연으로 그는 내 둘째누이와 결혼하여 나의 매제가 되었다.) 

 

청계피복노조와 관련해서 창동 이소선 여사 집에서 밤새워 토론하고 막바로 도곡동 우성아파트 건설현장으로 출근했던 어느날엔 산재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밤을 새워 잠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루 내내 조심스럽게 일을 하여서 무사히 일과를 마치는 듯 했는데, 작업 종료 후 5층에서 사용하던 산소통을 어깨에 메고 1층의 창고로 운반하다가 1층 창고 앞까지 다 왔을 때 흩어진 파이프에 발부리가 걸렸던 것이다. 몸이 휘청거리면서 어깨 위의 산소통이 바닥에 떨어졌고 떨어진 산소통이 흩어진 파이프를 내리치자 그 파이프가 내 앞이마를 때렸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눈은 피했지만 난생 처음 병원에 입원하여 열세 바늘을 꿰매야 했다. 그때 생긴 이마의 흉터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건설노동자는 숫자도 적지 않고 직업안정, 안전 등 근로조건의 취약점도 많아 잘 조직되면 상당한 세력화가 될 가능성은 크나, 일터가 흩어져 있고 떠돌이 생활에 젖어 있는 노동자들이라서 조직화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다. 이 점을 깨닫게 되면서 다시 공장노동자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나이와 경제적 소득까지 고려한다면 단순작업직보다는 기술직이 취업에 유리하였다. 전기기사, 용접기능사나 선반기능사자격을 취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위험물취급기능사와 열관리기능사는 실기시험 없이 1, 2차 필기시험만 합격하면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우선 이 두 가지 자격증을 취득하여 공장 보일러실에 취업하기로 했다.

위험물취급기능사와 열관리기능사 자격을 차례로 취득한 뒤 사설 직업소개소를 거쳐 경인전자, 대한제지, 대우어패럴의 보일러실로 자리를 옮겨 다녔다. 구로공단의 경인전자와 성수동의 대한제지는 보일러실 실무경험과 경력을 쌓는 과정으로 각각 수개월간 근무하였다. 대한제지는 장치산업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기업이었으나 종업원 수가 적었고 3교대 근무에 노동조합도 조직되어 있어 근로조건도 비교적 안정된 회사였다. 1980년말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의 보일러실에 취업할 때 나는 어느새 2년간 건설공사 현장에서 익힌 배관, 전기용접, 산소절단 기능과 1년여 동안 경인전자, 대한제지에서 익힌 보일러 운전 및 펌프 보전수리 기능, 그리고 충분한 경험을 갖춘 숙련 기능공이 되어 있었다.

 

1979년 말 건설노동자의 생활을 정리하고 구로공단의 경인전자에서 보일러공으로 일하기 시작한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하고 1980년 서울의 봄과 함께 학생운동이 활성화되던 시기였다.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수만 시위대열이 서울역에 집결하면서 학생운동은 고조기를 맞게 되었지만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이미 학생 신분을 떠나 노동운동에서 미래를 찾기로 결심한 터였다. 정금채는 건설노동자 생활을 정리하고 공장노동자로 진입하기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고, 문성현은 군 복무 후 선반직업훈련소를 마친 뒤 훗날 통일중공업과 합병된 동양기계에 입사하여 선반공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은 우리를 경악시켰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비상계엄이 발표되고 계엄군이 거리를 장악하고 언론이 완전히 통제된 상태에서 광주사태의 첫 소식은 우리 아파트 아래층에 살던 고속버스 안내양으로부터 전해졌다. 광주에서 군과 시민들이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고 광주로의 통행이 차단되었다고 했다. 뒤이어 관영매체는 광주에서 북한이 사주한 폭동이 발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광주의 시민항쟁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관영매체의 보도 이외에는 어떤 보도도 완전히 통제되었다.

그때 마침 임상택이 집으로 찾아와 광주에서 일어난 사실을 설명하면서 이 사실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문성현, 정금채, 나는 임상택의 제안을 받아들여 임상택이 준비한 유인물을 도곡아파트와 잠실아파트에 배포하기로 하였다. 배포방식은 인적이 없는 밤 늦게 아파트 집집마다 유인물을 신문처럼 집어 넣는 ‘집들이 방식’이었다.

 

 

함께 노동운동을 하기로 '도원결의' 했던 문성현(위)과 정금채(아래)

정금채는 내 둘째누이와 결혼하여 나의 매제이자 동지이자 이웃이자 친구로 늘 내 곁을 지켜주었다.

 

첫날밤은 임상택과 문성현이 도곡동 아파트에서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둘째날 밤엔 임상택, 정금채, 나 셋이서 잠실아파트에 배포하였다. 아파트 지리를 잘 아는 나는 단독으로 행동했고 정금채와 임상택은 한 조가 되어 배포에 나섰다. 배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임상택이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배포 도중에 잠복중인 형사들에게 정금채가 붙잡혔다는 것이다. 일단 아파트 유인물 배포활동은 중단하였다. 정금채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유인물을 작성한 임상택은 수배되었다. 정금채는 노동현장에 투신한 나와 문성현을 보호하기 위해 수사과정에서 우리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우어패럴에서의 첫 2년 동안은 일주일씩 주야간 교대를 했지만 노동강도는 헐렁한 편이었다. 보일러실 인원은 주임1명 교대근무자 2명 총 3명이었다.

주간에는 증기 및 상하수, 오수관련 시설을 비롯한 각종 공장 내 시설을 유지, 보수, 제작하는 일과 보일러를 운전하여 공장의 생산라인에 증기를 공급하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잔업시간에 맞춰 밤 늦게까지 생산라인에 증기를 공급하고 아침에는 식당에 증기를 공급하는 일을 했다. 2교대 근무였지만 야간근무시에는 자유롭게 현장의 생산라인을 돌아다니면서 작업자들과 담소도 나눌 수 있고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는 수면도 취할 수 있는 조건이 꽤 좋은 직무였다. 결혼 초기까지도 2교대 근무를 했지만 주임이 퇴직하고 내가 보일러실 주임이 되면서 주간만 근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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