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Ⅰ- 2. 성장기

張萬玉 2012. 1. 4. 12:14

어린시절

 

 

나는 경주 최씨의 32대손으로,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난 장남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큰집의 세 누나들을 포함한 열두 명의 대가족이 방 두 칸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오룡동 산동네의 도시빈민이었다. 이후 형편이 좋아져 명산동 시장 동네로 이사 오면서 작은 장사를 하는 도시 서민층이 되었지만 그래도 방 두 칸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커다란 이불 하나에 가족들이 모두 어깨를 맞대고 누워 겨울이면 양쪽에서 끌어당기다가 야단맞으며 자랐다.

외아들에 장손인 나는 젖도 늦게까지 먹었다. 몇 살 위인 큰집 누나가 나를 업고 오룡동 산동네에서 어머니가 일하시는 시장까지 매일 젖을 먹이러 다녔다.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그랬던지 나는 고집이 센 아이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겨울 땔감용으로 장작을 한 수레 구입하였는데 산동네 아래까지는 소가 끄는 수레로 운반하지만 산동네까지는 온가족이 나서서 이고 지고 날라야 했다. 겨우 여섯 살밖에 안 된 이 꼬마도 신이 나서 욕심껏 가슴에 한가득 안고 날랐는데 다시 내려와 보니 어른들이 다 날라버려 내가 나를 것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가 나를 것을 달라며 데굴데굴 굴렀다. 어른들이 부스러기를 쓸어담아 한가슴 안겨주어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음력 2월생이라 만 여섯 살도 안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처음 가본 학교란 곳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화장실이 무척 무서웠다. 달걀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떠도는 화장실은 낮에도 깊고 컴컴하였다.

한번은 도저히 대변을 참을 수 없어서 산동네 집까지 달려와 볼일을 보고 학교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물론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이 사실은 비밀로 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연습시간에 나보다 머리 하나쯤 큰 여학생과 짝이 되었는데 너무 부끄러워 살그머니 도망치기도 했다.

그렇게 겁도 많고 수줍음도 많았지만 학교생활에서는 아주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키가 작아 항상 첫째 줄에 앉았기 때문에 수업시간만은 선생님의 말씀에 매우 집중하였다. 숙제도 많지 않아서 특별히 집에서 공부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방과 후에 또래들을 따라 동네 골목으로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지만 6년 동안 개근상, 우등상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학과공부는 늘 반에서 1, 2등이었지만 체육, 미술, 실과는 젬병이었다. 동네에서 놀 때도 자치기, 구슬치기, 썰매타기 등 몸을 잘 놀려야 하는 놀이나 손재주가 필요한 놀이에서는 항상 또래들에 뒤처졌다. 그래도 공부 잘한다고 잘난 척도 안 하고 잘 못논다고 기죽지도 않으면서 늘 사이좋게 어울려 다녔다.

 

명산동 시장 골목에 내 동갑내기는 모두 4명이었다. 그중 나를 제외한 3명은 모두 곰보였다. 살짝곰보에서 깨곰보, 왕곰보까지 구색을 두루 갖추었다. 내가 이사 오기 전 이 동네에 천연두가 유행하여 내 또래 동갑내기들이 모두 곰보가 되었던 것이다.

골목길 우물 건너편 유재수네는 아들부잣집으로 아들만 4명인데 재수가 그중 막내였다. 일본가옥 식으로 지어진 재수네 집은 그 작은 뜰에서 화초도 키우고 닭과 토끼까지 키웠다. 재수는 형이 많고 손재주도 좋아 팽이, 썰매, 자치기, 구슬치기 등 기구를 갖고 노는 놀이에서는 항상 최고의 실력을 보였다. 옆집의 살짝곰보 강종원의 아버지는 시장에서 튀밥기계를 돌리셨다. 옥수수를 집어넣고 불에 뒹굴뒹굴 돌리다가 펑 하고 튀기면 고소한 냄새와 함께 강냉이가 하얗게 터져나온다. 시장에서 우리 꼬맹이들의 호기심을 가장 자극하는 종목으로 우리 가게의 대각선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 동갑내기들 집 중에선 우리 집 안마당이 가장 넓고 햇볕이 잘 들었다. 동네에서 제일 넓은 마당을 가진 집은 우리 집 맞은편 기와집이었지만 보통은 대문이 잠겨 있었고 우리 또래의 남자애가 없어서 우리들에겐 개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집 안마당이 늘 우리의 놀이터로 애용되었다. 닭장, 장독대에 연이어 지은 곡식창고와 햇볕 잘 드는 토방마루로 둘러싸인 오붓한 안마당은 구슬치기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우리 동네 골목과는 좀 떨어져 있지만 시장 안에는 옛 일본인이 유곽으로 지어놓은 2층 목조건물이 있었다. 초기에 이곳에 시장이 형성된 것도 일본인이 운영하던 유곽과 관련이 있는 듯 명산시장은 유곽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앙에 널따란 정방향 뜰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높은 목조건물과 난간복도를 배치한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이었다. 피난민 수용소로도 이용되었고 몇 번의 화재에 시달리며 음침한 폐허로 전락하였지만 우리들의 술래잡기 장소로는 최고였다.

우리들의 놀이터는 시장 골목에 국한되지 않았다. 진달래, 벚꽃이 피는 봄이면 월명산 주변의 산 능선을 따라 해망동으로 은적사로 헤젓고 다녔고, 아카시아꽃 따먹는다고 금광사 뒤쪽 가파른 벼랑을 훑고다녔다. 더운 여름철엔 은갯뜰의 수로에서 멱을 감거나 군산중학교 옆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탱자나 메뚜기를 찾아 들판을 헤매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때 우리 반에 거지대장의 아들이 있었다. 나이는 우리보다 두어 살 위지만 체구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 아이는 소금장수 이야기 등 옛날얘기를 아주 구수하게 잘했다. 선생님이 잡무로 바빠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아이가 앞에 나서서 옛날얘기를 들려주었다. 때론 재탕도 있었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미술시간에는 뒷산에 올라 멀리 건너편 산 위의 외딴집을 즐겨 그리곤 하였다. 산 위의 외딴 집은 항상 신비스럽기만 하였다.

 

당시엔 무상교육이라 수업료는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학교운영을 위해 기성회비라는 것을 걷었는데, 기한 내에 기성회비를 내는 아이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가장 전형적인 기성회비 독촉은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는데, 우리집의 경우 버젓한 점포가 있어서 기성회비를 못 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항상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아이들 속에 끼어 집에 갔다가 왜 제때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어머니께 야단을 맞기도 했다. 어린 생각에 왠지 제때 맞춰 기성회비를 내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도시락만 해도 그랬다. 6학년이 되어서야 도시락을 싸가기 시작했다. 쌀집에 쌀이 없어 도시락을 못 쌀까. 하지만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혼자 도시락을 싸가기 싫었던 것이다. 이름만 점심시간이지 입담 좋은 친구들이 진행하는 오락시간이었거나 공을 차는 시간이었다. 나는 밥 먹는 것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더 좋았다.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6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은 내게 자기가 가르치는 과외팀에 공짜로 들어오라고 했다. 헌데 내게 과외비를 안 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팀에서 선생님 대신 친구들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선생님이 술 마시러 나가면 우리는 화투를 쳤다. 그런 기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평소엔 별로 개의치 않던 선생님이지만 시험 때가 되면 집에서 철필로 긁고 있던 시험문제를 내게 주며 아이들에게 풀어주라고 한다. 그것이 내 역할이었다.

 

 

통일교에 빠진 사춘기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가던 무렵으로 기억한다. 한 학년 위인 선배가 방학 동안에 한자공부를 무료로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고 꼬였다.

강종원과 함께 가보니 ‘세계복음통일교 신령협회’라는 간판 하나 달랑 걸린 적산가옥이었다.

처음에 천자문으로 시작한 한자공부는 몇 주 지나지 않아 원리학습으로 전환되었는데, 그 내용이 학교에서 공부하던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사물의 근본이치를 논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를 강론했던 것이다. 상대성이론과 분자학, 원자학, 소립자론은 물론 동양의 음양사상까지 결합하여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야기하고 세계의 5대문명에서 기원하여 유럽, 미국을 거친 인류의 문명이 동방의 등불 아래서 활짝 꽃피운다는 예언과 재림 예수의 사상 등등.....

난생 처음 이런 거대담론에 접한 나는 지적 개안의 희열을 느꼈고 통일교 교리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렸다. 통일교 교리는 기본 개념인 '상대성 원리'를 가지고 우주의 법칙에서 종교, 인생철학에 이르기까지를 전일적인 체계 안에 포괄하고 있는데, 이 정합적인 논리체계가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한 젊은 내외로, 통일교단 상층부에 속하는 36가정 중의 한 가정이었다. 그들의 지적 수준과 열정은 밥벌이를 위해 마지못해 가르치던 학교 선생님들과 차원이 달랐다.

 

 

날이면 날마다 저녁에 통일교회에 나가 교리공부를 하고, 토요일이면 교회 예배에 해당하는 종교의식을 한다. 일요일에는 일반 교회에 나가는데 그 목적은 교리논쟁을 유발함으로써 통일교를 전파하려는 것이다. 방학이면 인근 농촌으로 포교활동을 하러 가거나 다른 지역 신자들과 합숙훈련을 했다.

합숙훈련에 가보면 교회라고 방 두어 칸짜리 가정집에 100명 가까운 인원이 모여 보리밥 몇 술씩 나눠먹고 칼잠을 자며 교리공부를 하는데 그 분위기가 마치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같았다.

통일교 조직의 기본은 세포다.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세포조직은 교리공부를 통해 성장하며, 세포는 분열하여 다시 교리강의자를 배출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엘리트들은 다시 세포를 형성하여 낯선 환경에 투하된다. 이 세포들은 오로지 종교적 열정 하나로 교회를 개척해낸다. 모든 것이 자력갱생이다.

군산지역의 지역장이었던 젊은 내외도 결혼자금을 몽땅 들고 내려와 생면부지의 땅에 교회를 개척하려고 고군분투하였으나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무슨 헌금이 나올 리도 만무여서, 피같이 아껴쓰던 자금이 바닥나자 끼니마저 거를 지경에 이르렀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나는 집에서 몰래 쌀바가지를 퍼나르기도 했고 아침 등교길에 교회 문 앞에 몰래 점심도시락을 두고 가기도 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중 구역장이었던 남편이 더 이상 병역을 기피할 수 없어 군대로 끌려가고 젊은 아내 혼자 몇 달 동안 교회를 지키다가 결국 서울로 돌아간 뒤 교단은 후임자로 36가정의 아래 레벨인 108가정 안에 드는 구역장을 단신으로 부임시켰다.

그래도 이번에는 엔지니어 출신 문선명씨가 개발하여 생산판매에 들어간 공기총을 같이 내려보내주어 먹고 살 길을 마련해주었다. 팔아서 30%만 상납하고 나머지는 운영자금으로 쓰라는 것이었다. 점포를 낼 능력이 없으니 공기총 판매는 당연히 신자들 몫이 되었다. 나도 별로 팔지는 못했지만 가끔 외판을 나갔다.

 

 

잠자고 학교 가는 일 외의 나의 일상을 완전히 통일교 활동에 바치다 보니 내가 통일교회의 열성분자임이 학교와 집안에까지 알려졌다.

통일교회 내에서는 내일의 지도자로 촉망받는 젊은 인재였지만 교회 다니시는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어머니는 필사적이었다.

타일러도 보고 붙들고 울기도 하고... 아버지는 차마 내려치지도 못하는 절굿공이를 들었다 놓았다 조용했던 집안이 날마다 전쟁이었다.

마침 그때 나는 '단식수련' 단계를 맞고 있었다. 통일교에서는 신앙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단식수련 기간을 갖게 하는데, 마치 예수가 세상을 향해 나가기 전 광야에서 금식을 하며 사탄의 유혹과 싸웠던 것처럼 통일교 기간간부로서 세상과의 일전을 앞두고 고독한 수련기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일주일 기한의 단식수련을 시작하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고1 때였다.

사탄의 꼬임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도 함께 단식기도에 돌입하셨다.

아버지는 이번 기회에 아예 끝장을 보라며 어머니와 나를 시집간 큰집 누나가 살고 있는 충남 성주산의 한 기도원으로 보내셨다.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보겠다고 호기롭게 시작한 단식이었지만 한참 먹을 때인 나에겐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허기지고 힘이 빠지면서 졸음만 밀려왔다. 반면 어머니는 다르셨다. 아들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며 성경과 찬송가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계속할 기세였다.

단식 여드레째, 탈진 상태에서 열광적인 방언과 통성기도 소리를 아련히 들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중에 갑자기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던 어머니의 기도가 아들의 미욱함을 깨우쳤던 것일까.

사실 그 전부터도 내 마음 속에 통일교리에 대한 회의가 조금씩 싹트고 있기는 했다. 하부에게는 비밀인 또 다른 교리의 존재에 대해 조금씩 눈치채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어머니와의 종교전쟁을 계기로 증폭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통일교와 결별하고 어머니를 따라 일반교회에 나가기로 약속하면서 단식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어머니를 따라 일반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통일교회에도 한두 번 몰래 나가보기도 하였지만 이미 열정이 식어버린 듯 아무것도 성이 차지 않았다. 나의 사춘기는 전쟁의 상흔 속에서 태어난 신흥종교에 심취하여 열병을 앓으며 지나갔다.

 

 

소년가장이 되다

 

 

고등학교 2학년 되던 해 6월, 집안에 환란이 몰아닥쳤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워낙 건강하셨던 분이 하루아침에 가시다니, 우리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평생을 정신병으로 시달리셨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오고자 낮밤없이 기도에 매달리시는가 했는데 점차 환상도 보고 방언도 하면서 이상해지신 것이다. 교회 목사님의 권유에 따라 정신병 치료를 잘한다는 기도원으로 어머니를 보냈는데, 한 달 후 면회를 가보니 오히려 훨씬 악화되었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공포에 질려 있었고 야윌 대로 야위셨다. 환자를 감금하고 안찰을 한다며 폭행을 가한 것 같았다. 당장 기도원에서 모시고 나와 인근의 개정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16살의 나이에 나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아버님의 갑작스런 죽음, 그 충격으로 인한 어머니의 입원... 서울로 유학 간 누나는 교육대학 2학년 졸업반이었고 내 아래 여동생 셋은 초등학생이었다. 어머니의 병원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지체없이 학교를 휴학하고 부모님의 곡물가게를 떠맡았다.

장사를 하려면 우선 자전거를 배워야 했다. 장사를 마치고 밤늦게 학교운동장에서 친구 유재수의 코치를 받아 자전거타기를 배웠다.  운동장 연습을 마치고 첫 도로주행을 할 때 내리막길에서 사람을 치기도 하였다. 혼자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빈 자전거는 타고 짐을 실은 자전거는 끌고 다녔다. 쌀 한가마니를 싣고 땀도 닦지 못한 채 뚝뚝 흘리면서 자전거를 끌었다.

부모님의 장사를 곁에서 보기도 하고 배달일을 조금씩 돕기도 하였지만 본격적인 장사는 처음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장사였다. 지금이라면 훨씬 잘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물건의 구색도 적어지고 품질도 떨어지니 손님이 줄고 외상값은 떼이고 장사는 점점 기울어갔다.

 

다행히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되어 두세 달 후 병원에서 퇴원하신 뒤 다시 장사를 맡으시면서 사정이 조금 나아질 만하니까 이번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게가 철거되었다. 건너편의 소주공장이 공장을 그만둔 뒤 그 자리에 상가를 건축하고 상인들을 입점시키기 위해 시청에 압력을 넣어서 시장에 있는 가게들을 강제로 철거시킨 것이었다.

초기에는 시장 상인들이 크게 반발하여 소주공장의 상가에는 입점하지 않기로 결의하였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룻밤 사이에 180도 태도를 바꾸어 상가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입점하기 시작하였다. 기회를 놓친 나는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논을 팔아 뒤늦게 방앗간 귀퉁이에 새로 가게를 마련하였지만 목이 좋지 않아 장사는 더 기울어만 갔다.

이듬해 새학기가 되자 어머니께 장사를 맡기고 복학을 하면서, 내가 처음으로 도전한 사업은 결국 실패작으로 끝났다. 당시로는 내가 장사에 실패한 이유를 꼼꼼히 따져보기보다 세상 인심의 냉혹함을 원망하고 소주공장 주인과 시청관료들의 결탁에 분노할 뿐이었다.

 

아무튼 누나의 권유로 복학한 나는 방과 후에 어머니를 돕긴 했어도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학교생활에 더욱 충실하였다. 학교 성적은 바로 좋아져서 예전처럼 전교 1, 2등을 다투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여 다시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자 나는 넷째와 막내 여동생을 서울에 있는 누나에게 보내고 장사도 정리하였다. 그렇게 나의 소년가장 시대가 지나갔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기뻐하시던 어머니, 누나와 함께

 

 

상경과 재수

 

나의 첫 서울 나들이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입시 하루 전날, 서울의 날씨는 영하 19도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연탄불까지 꺼져 바로 감기에 걸렸다. 내 딴에는 한 단계 낮춰 내심 장학생까지 노렸던 시험이었는데 감기약에 취해 수학시험문제를 한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보기 좋게 낙방하였다.

누나의 권유로 재수하기로 결정했다. 시골집을 처분하여 금호동 산동네에 방 두 칸짜리 전셋집을 마련하고 할머니를 포함한 전 가족을 서울로 이주시켰다.

중학생이던 동생은 다행히 덕성여중 편입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때부터 우리 일곱 가족의 생계는 초등학교 교사 2년차인 누나에게 온전히 의지하게 되었다.

대성학원에 입학하는 것으로 나의 재수생활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입시학원이었던지라 학원의 입학도 시험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입시학원 입학시험에는 합격하였다.

대성학원은 기업처럼 운영되었다. 우수 학생의 선발, 과목별 최고의 강사진 구성, 자체적으로 제작한 교재, 매월 실시한 자체 시험성적에 근거한 진학지도 등 목표달성을 위해 각종 수단을 최적화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성학원에서의 수업내용은 정말 신선했다. 시골 고등학교 수업과는 차원이 달랐다. 예습 복습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매일 점심과 저녁 도시락 두 개씩 준비하여 수업을 마친 후엔 학원 도서관에서 버스가 끊어지기 전까지 공부했다. 내 일생 중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때가 그때 아니었을까 싶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 다행히 서울 상대 경영학과에 무난히 합격하였다.

시험은 비교적 잘 치러서 자신이 있었는데 갑자기 언론에서 커트라인이 10점 이상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보도되었다.

겁이 덜컥 났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당시의 우리 가정형편으로 후기 사립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컷 울고 나서 나의 예상점수를 재계산해보니 커트라인은 넘을 것 같았다.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신문의 구인, 구직광고란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 대학시험에 낙방하면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관식 문제 한 두 개의 결과에 따라 인생의 길이 갈라질 운명이었다.

다행히 합격이었다. 그것도 비교적 우수한 성적이었다. 집안의 기쁨도 컸지만 나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때부터 내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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