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어패럴 근무기간 중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내가 빨리 결혼하기를 원하셨다. 나도 결혼을 하려고 생각은 하는데 짝이 없었다. 마음에 두고 데이트를 해온 여성은 내가 공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내 프로포즈를 외면하고 시집을 가버렸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후로는 부지런히 소개를 받았다.
내가 원했던 배우자의 조건은 간단했다. 좋기야 나처럼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 일로 바빠서 바가지 긁을 시간이 없는 여자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조차 여의치 않고 집에서 살림만 할 여자라 해도 내가 하는 일에 반대만 안 한다면 상관없었다.
2년 동안 대략 일곱 명을 소개받았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지 않으니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상대방의 응락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좋은 직장 마다하고 노동운동을 한다는 게 비난이 아니라 응원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막상 그런 사람의 평생 반려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사기 위해 좀더 공을 들여야 했을 것인데 노동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소개자의 말만 믿고 겨우 두 번째 만나면 바로 청혼을 하다니 나도 정말 순진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소개를 받은 것이 지금의 아내였다.
당시 아내는 23세였는데 대학을 휴학하고 현장활동을 시작한 지 몇 개월 안 되는 신참내기였다.
아내는 현장활동을 지도해줄 선배를 찾던 중이었다고 했다. 소개자가 나에게는 결혼상대자로 소개를 했지만 아내에게는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는 선배로서 소개를 했던 모양이다. 당돌해 보이는 첫인상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노동운동을 하려는 사람이라니 더 따질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아내가 결혼 상대를 찾으려고 나를 만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결혼에 대해 언급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헌데 서로 몸 담고 있는 현장상황을 이야기하다가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대우어패럴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1공단의 2공장 나는 3공단의 3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이런 것을 두고 천생연분이라고 하지 않나 싶다.
천생연분이라는 증거를 대자면 그뿐이 아니다.
소개자는 같은 경동교회 대학부 출신이기는 해도 한참 후배라 그리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내 역시 소개자와는 예전에 친구 만나는 자리에서 인사만 나눴던 사이였는데 최근 가리봉시장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되어 가끔 연락하고 지낸다고 했다. 소개자는 어떻게 자기와 각별히 가깝지도 않은 우리 두 사람을 연결해줄 생각을 하게 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개자는 하늘이 우리를 위해 내려주신 중매쟁이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현장의 조직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만나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구로공단에서 좀 떨어진 반포에 약속장소를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만났다. 보안문제를 염려하여 혹시 약속이 어긋나더라도 별도의 연락 없이 그 다음주 약속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오기로 했다.
현장활동을 위한 만남이라 해도 그녀를 만나는 날엔 보일러실에서 깨끗이 샤워를 하고 옷매무새에 신경을 썼다. 그녀와의 만남에 정성을 쏟으면 그녀도 머지 않아 나의 진가를 알아주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은 가운데 우리의 약속은 한 번의 어긋남 없이 이어졌다. 그녀에게 선배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사담은 삼갔어도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고 익숙해져가는 기회이기도 했다.
서너 달쯤 지나 그녀가 전민노련 사건 관련자와 연루되어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으로 들이닥친 수사팀에 의해 작업복을 입은 채 끌려갔기 때문에 나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수사 마무리 상태에서 사실관계 확인차 데려간 것이라서 아내는 일주일 만에 풀려났고, 단 한 번의 약속 펑크 후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예상 밖의 사건으로 대우어패럴에 대한 우리의 합작 계획은 무산됐지만 현장활동에 대한 아내의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으므로 우리의 만남은 계속됐다.
아름다운 가을날이었다. 모처럼의 연휴여서 그랬을까, 무슨 명분을 내세웠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의 발길은 강화도 마니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길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비록 비탈길을 오르내릴 때 도움을 주는 형식이었지만 자그마한 그녀의 손이 전해주는 따뜻한 느낌이 마치 나에 대한 마음처럼 느껴졌다. 마니산 소풍을 계기로 우리는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날 현충원 앞 주차장 벤치에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의 입술이 따뜻하게 나의 입술을 받아주는 것에 자신감을 갖고 드디어 그녀에게 청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의외였다. 결혼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고 혹시 5년 뒤에는 생각해볼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실 결혼을 생각하기엔 그녀는 너무 어렸다. 그녀의 생각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운명이라 생각하고 당장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접고 우선 노동운동 선후배로서의 관계를 잘 맺어나가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런 와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 그녀는 새로 들어간 공장에서 동료들과 배드민턴을 치다가 발목을 다쳐 기브스를 하게 되었다.
기숙사에 있던 그녀는 당장 갈 곳이 없자 비상연락망을 통해 연락을 해왔다. 임시로 광명시에 있는 동생 집으로 옮겨주고 동생에게 보살펴주도록 부탁하였다.
어머니의 간호와 장례로 바짝 마르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녀는 뒤늦게 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아내 역시 현장에 온 뒤로 이런저런 불운이 겹쳐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지지부진 하던 끝이라 이대로 혼자 가다간 이 대열에서 탈락할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다. 결국 혼자보다는 같이 의지하며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면 온갖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우리를 맺어준 것이다.
그해 8월 우리는 5월에 결혼한 문성현 내외와 현장에 있는 그녀의 친구 둘, 그리고 우리 형제들만이 광명시의 둘째동생 집에 모여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두 사람 다 노동현장에서 생활하고 있던 터라 처가의 반대를 명분으로 조용한 결혼식을 택한 것이었다. 신혼여행도 배낭을 메고 야간열차를 타고 덕유산 산행길에 올랐다. 마침 여름 휴가철이어서 무주구천동 일대에는 숙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숙소를 구하려고 자정이 다 될 때까지 헤매다가 산자락에 있는 송어횟집에서 간신히 문간방을 하나 얻어 첫날밤을 보냈다.
아내는 지금까지도 간소했던 결혼식과 신혼여행에는 여한이 없지만 송어횟집의 더러운 이불만은 용서가 안 된다고 농담을 한다.
'언약식' 같은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살림을 시작한 곳은 광명시의 농사꾼 집 문간방이었다. 당시 나는 주야간 교대근무를 할 때라 내가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면 출근하는 아내를 길거리에서 마주치곤 하였다. 어쩌다 드물게 함께 쉴 수 있는 일요일이 돌아오면 뒷산에 올라가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인근 안양유원지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빗장을 질러 대문을 잠그는 구식 한옥이었기 때문에 늦은 밤에 퇴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주인집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창문에다 대고 ‘창문을 열어다아오~’ 하고 조그맣게 노래를 부르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주던 아내. 우리는 작업장에서 눈이 맞아 단칸방에 살림을 차린 공단의 여느 청춘남녀나 다를 바 없는 한 쌍이었다.
신혼초에 외삼촌 댁에서 사고가 났다. 부부싸움 끝에 화재가 발생하여 외삼촌 부부가 화상으로 사망하신 것이다.
일단 오갈 데 없게 된 외할머니를 우리의 단칸 신혼방으로 모셔왔다. 장기적으로 모시려면 방 두 개짜리 집이 필요해 잠실아파트를 처분하고 광명시 철산동에 11평짜리 임대아파트를 구입하여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아들을 갖게 되었다.
아들을 낳자마자 정관수술을 하였다. 내가 외아들이기 때문에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컸지만 노동운동을 하면서 자녀를 둘씩 키울 자신은 없었다. 형제 없이 혼자 외로이 커나가는 아들을 보면서 뒤늦게 가장 후회하는 일이다.
아내는 아이가 젖을 떼자 처갓집에 맡기고 다시 현장에 들어갔지만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결성을 계기로 나의 신분이 드러나면서 결국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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