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도전의 기회로
공장설계와 건축업자까지 내정된 상태였지만 자금문제 때문에 공장건설은 계속 미뤄졌다.
일본에 발주했던 설비는 이미 도착하여 공업구 창고에 보관된 상태였다.
1년 넘게 시장개척을 위해 중국대륙을 누비고 다녔지만 제품을 한국에서 들여와 가격을 조금 낮추는 방식만으로 기존 일본제품이 점유하고 있는 시장을 공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할 뿐이었다. 통관과 운송 절차도 번잡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소량인 경우 통관비용의 비중은 더 높았다. 시장개척을 위해서는 경쟁자와 차별화된 전략이 절실하였다. 그 전략은 중국사업 초기 계획대로 현지생산, 현지공급, 현지기술서비스...... 하루라도 빨리 현지 생산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중국에 상주하다 보니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출장 다닐 때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하이 인근지역에는 텅텅 빈 공장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들 공장들은 임대료도 저렴하였다. 공업구를 찾아가 공장건설 이전에 민항구 내에서 공장을 임대하여 생산 및 영업활동을 진행하는 방안을 내놓고 승인 약속을 받아놓은 뒤에 임회장님께 장문의 의견서를 보냈다. 우선 공장을 임대해서라도 생산을 즉각적으로 개시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회장님의 대답은 조만간 은행과의 자금문제가 마무리 될 것이니 답답하겠지만 연말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때가 1997년 9월이었다.
그런데 1997년 11월에 IMF 경제위기가 닥쳤다.
본사에서 중국 사업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임대공장 계획안을 올리고, 본사가 초기에 원자재의 외상지원과 공장가동 준비 및 6개월간의 운영경비 3,000만 원 정도를 지원해주면 바로 시작해보겠다고 제안했다.
하루가 멀다고 도처에서 부도 소식이 들려오고 중국에 진출하려던 한국기업들 상당수가 사업을 철회하고 있다는데, 주재원들은 한국으로 소환되고 이미 진행하고 있는 건설공사조차 중단된 곳이 부지기수라는데, 무슨 배짱으로 중국사업을 적극 추진하자고 주장했는지 모르겠다. 중국사업을 성공시켜보겠다는 주관적인 의지가 너무 강했던 나머지 객관적인 경제위기를 위험보다 기회로 여겼던 듯하다. 돌이켜보면 이 위기는 우리에게 기회가 되었다. 상해대주전자재료 직원들의 위기의식이 사업 초기의 온갖 부족함을 감수하면서 사업성공을 향한 의지로 모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본사 대책회의 참가 전에 청웨이닝에게 민항구 주요 도로변에서 임대할 수 있는 공장을 찾아보라고 지시해두었다. 부동산소개업이 발달되기 전이라 도로변의 공장 경비실에 일일이 묻고 다니면서 찾아야 했는데, 분체도료 생산공정이 특수하여 공장 1, 2층의 고도가 일정 수준 이상 되어야 하고 전기용량이 충분해야 하는 등 그리 찾기 쉬운 조건은 아니었음에도 운좋게 일주일 만에 그런 조건을 충족해주는 임대공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건물주인 동화고압펌프공장은 넓은 부지에 제법 넓직한 공장건물을 일곱 개나 거느린 국영기업이었다.
과거에는 1,000여 명의 직원이 일하던 규모있는 기계공장이었지만 현재는 100여 명만 남아 일부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으며, 사용하지 않는 6개 공장의 임대수입으로 퇴직한 직원들의 생활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건물은 노후하였고 유리창도 상당수가 깨진 상태였다. 화장실이라고 칸막이도 없이 도랑처럼 길게 뚫어놓은 배수구가 전부라 앞사람의 엉덩이를 쳐다보면서 볼일을 보아야 했다. 고압펌프를 제조하는 기계공장이었던지라 공장바닥의 기름때를 제거하는 데만도 이틀이 걸렸다.
그래도 전력사용의 여유가 풍부하고 바로 옆 임대주의 공장에 지게차가 두 대나 있어 초기 공장운영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임대주의 공장이 기계공장이다 보니 설비가 파손되면 값싼 비용으로 수리할 수 있는 것도 예상 못한 이점이었다.
설비 설치를 전심전력으로 도와준 본사 이정일 차장과 함께 임대공장 앞에서
본사의 설비들을 철거해서 페인트를 칠하고 포장하여 중국으로 운반하고, 이 설비들을 다시 조립해서 세팅하는 일은 본사 공무팀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였다. 중국 업자들에게 맡기려니 IMF로 인한 원화 환율의 급상승 때문에 비용은 너무 비쌌다. 우여곡절 끝에 설비 세팅과 시운전을 마치고 상하이의 유명대학 출신 기술인력도 4명 선발하여 3월에 드디어 조촐한 공장 출범식을 가졌다. 한국인 4명, 중국인 10여 명의 작은 살림이었다.
초기에 한국인 기술자 3명은 우리 집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외국인은 호텔 외에는 임의로 아무 데나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 집은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는 숙소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우선 우리 집에서 묵기로 한 것이다. 방 3개의 30평형 아파트에 여섯 식구가 살려니 공간이 부족하여 아들은 침대를 들고 거실로 나와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막 사춘기를 맞은 아들에게나, 팔자에 없는 시동생을 셋이나 거두게 된 아내에게나, 고된 일과 후 사적인 휴식이 절실했을 파견직원들에게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텐데 그 누구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기꺼이 그 시간들을 견뎌주었다.
본사에서 출장자와 함께 날아온 김치는 기름진 중국 도시락으로 지쳐가던 점심시간의 큰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아내도 공장에 매일 출근하여 사무실에서 전화도 받고 출납업무도 담당하면서 일을 도왔다. 38도가 넘는 무더위를 견디다 못해 다른 직원들 모두 에어컨 설치된 현장 1층으로 내려가면 아내 혼자 뜨거운 바람만 나오는 선풍기에 의지해서 사무실을 지키곤 했다. 물도 생수값 아낀다고 중국인들도 끓여 마시지 않는다는 수돗물을 끓여 마셨다. 매출이 일정 수준에 이를 때까지 비용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한국인 간부들부터 솔선수범하여 그토록 절실한 에어콘 한 대 음수기 한 대의 구매를 미뤘던 것이다.
5월까지는 계속 샘플만 생산하였다. 일은 벌려 놓았는데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어 지지부진하게 되면 한국 본사에도 짐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샘플을 들고 장수성, 저장성, 산둥성, 안후이성, 광둥성, 푸젠성을 휘젓고 다녔다. 고달프게 뛰어다녔지만 밤엔 잠도 오지 않았다.
인내의 결실
5월에 한 두 곳에서 도전재료의 소량 주문이 있었다. 그런데 내수거래다 보니 17%의 증치세가 부과되어 고객 입장에선 크게 가격 메리트가 없다며 지속적인 구매를 꺼렸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형식상의 외자기업으로, 수출용 원자재라는 명목을 내세워 변칙적으로 관세 및 증치세(부가가치세)의 탈세를 일상적으로 하고 있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닝보의 호우사장을 찾아가 은 분말의 공급을 요청했다. 당시 중국의 은은 인민은행의 통제하에서 국제시세보다 20% 이상 싸게 거래되고 있었다. 호우사장의 기업은 지방의 작은 향진기업이지만 전자부품용 재료인 질산은 및 은 분말, 은 페이스트를 제조하는 업체로서 인민은행에서 은괴를 구입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우리와는 도전재료의 페이스트 부문에서 경쟁관계지만 영업권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기로 하였다. 주요 원재료이므로 품질사고의 위험도 있었지만 그 방법 외에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어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정해권 주임은 중국산 은 분말을 적절히 섞어 본사로부터 수입하는 은 분말을 대체하는 실험을 성공시키고 업체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우리의 도전재료는 강력한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중국사업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행운이 이어졌다. 주룽지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경제개혁과 부패척결의 일환으로 관세와 증치세의 편법 탈루에 대한 강력한 단속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전자부품 업체들도 증치세 영수증을 발행하는 구매업체를 서둘러 찾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중국사업은 절묘하게 그 흐름에 편승하였다. 중국의 전자재료 기술수준은 아직 세계적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우리의 경쟁상대인 외국의 전자재료 업체는 아직 중국투자를 주저하고 있었다. 몇 개의 중요업체에서 우리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소문이 동종업계에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동종업계 내의 정보교류가 활발한 중국적 특성이 한몫을 하였다.
8월에 접어들면서 사업전망에 자신이 생기고 잠도 편히 자게 되었다. 이후 매출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10월에 손익분기점을 넘기면서 매출과 영업이익도 대폭 증가하였다. 어떤 제품은 생산개시 1년 만에 시장점유율 70%를 달성하였다. 아울러 몇 종의 주력제품이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면서 전자재료 전문업체로 중국 내에 자리를 잡아갔다.
2000년에는 공장건설에 착수하였다. 공장건설 및 설비증설자금은 본사 보증으로 상하이의 상업은행에서 인민폐 대출을 받아 마련했다. 이후 토지, 건물, 기계설비를 전부 담보설정하고 부족한 부분은 본사가 보증을 서는 방식으로 변경하였지만 어쨌든 건설자금문제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당초 6개월로 계획된 공정은 중국 건설업체의 능력부족으로 1년이 걸렸다. 공사 지연과 자재의 품질, 비용 등 갖가지 문제로 건설업체와 수없이 다퉜다. 사회주의 시절 건설공사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진행하면서 자신들의 실속만 챙기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는 이러한 지긋지긋한 다툼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할 정도였다.
가까스로 2001년에 새 공장으로 이전하였다.
설비도 증설하여 생산능력을 대폭 확장함으로써 전자재료를 전문으로 제조하는 외자기업의 면모를 갖추었다. 공장 바닥은 자체 생산한 최고급 에폭시도료로 깔고 사무실과 실험실의 책걸상과 비품들도 모두 교체하였다. 공장 준공식에 전국의 고객들을 초청하였다. 중소기업의 작은 행사였지만 상하이총영사와 민항구 부구청장도 참석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전자재료 전문기업으로 중국 내수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생존기반을 구축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금융위기의 위험을 극복하고 이토록 짧은 시간에 중국 내수시장에서 자리를 잡아나간 것은 충분히 자축할 만한 일이었다.
사람 사업의 어려움
그러나 이러한 고속성장의 뒷면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위기가 함께 존재하였다.
그중 하나는 99년 중순 기술을 총괄하면서 분체도료 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J차장과의 갈등이었다.
J차장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대단히 명석한 직원이었다. 그러나 조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었다. 본사에서 분체도료 사업 초창기에 필름콘덴서용 분체도료 개발을 성공시키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사업을 한다며 떠났으나 사업에 실패하여 어려움을 겪다가 중국사업 참여의 명분으로 재취업하였다. 나는 구체적인 기술에 문외한인지라 기술적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인 책임과 권한을 그에게 위임하고 고객방문이나 라인테스트, 기술토의에 참여하는 등의 지원만 했다.
99년 하절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한 업체에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생산공정을 약간 변경해보고 잘 안 되면 그냥 팽겨쳐버리는 안일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고객불만이 누적되어갔다. 제품에 대한 고객불만이 증가하고 품질문제 해결이 지연되는 것은 사업을 실패로 치닫게 하는 첩경이다. 그의 대응방식을 보고 위기를 느낀 나는 그가 일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개선을 요구했지만 조금도 개선하려 하지 않자 내가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경험적인 감각은 인정하지만 그에게는 막혔을 때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집요한 노력이 결핍되어 있었다. 본래 성품은 착하지만 직접적인 개입에 더욱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는 끝내 결근과 사의 표시로 저항하였다. 무책임한 행동에 분노한 나는 그의 사표를 즉각 수리하고 본사에 보고하였다.
그때부터 분체도료 기술과 생산을 직접 장악하면서 내가 직접 문제해결에 매달렸다. 본사의 기술, 생산, QC담당자에게 전화로 하나하나 물어가면서 기술과 생산을 직접 지휘하였다. 다행히 본사의 김동호 대리가 한 달에 보름 정도를 중국 출장에 할애하여 고객들의 품질불만을 차례차례 해결해나갔다. 이를 계기로 아울러 실험방법, 공정관리 및 품질관리 시스템도 완전히 재정비하였다. 사업 초기에 맞닥뜨린 이 총체적인 제품의 품질위기를 극복해낸 분체도료 사업은 차츰 중국사업의 두 번째 주력품목으로 성장하였고 상하이와 동관공장에 생산라인을 증설하면서 중국 내 시장점유율 1위 품목으로 성장하였다.
그때의 나의 결정이 사업의 성공을 위해 결과적으론 필요한 결정이었다 할지라도 인간적으로는 두고두고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 뛰어난 장점과 결정적인 약점을 가진 인재는 그 장점만을 살려 나가도록 하고 약점은 다른 사람을 통해 보완하게 하는 것이 인재활용의 원칙인데 당시에는 너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후배가 경쟁사에 입사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자리잡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가슴이 아팠다.
이런 와중에 지금은 웃어넘기지만 당시로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있었다.
분체도료 생산은 몇 개 공정이 연속된 장치산업이다. 당시 한 개의 생산라인으로 여러 가지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제품이 바뀔 때마다 생산라인의 청소가 필수적이다. 또한 설비가 노후되어서 설비고장도 잦았다. 분쇄공정 일부 모터의 이상으로 제품 교체시점에서 모터를 교체한 이후에 분쇄물의 입도가 이상해진 것이다. 각 공정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조정해봐도 도무지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밤 늦도록 관계자들이 점검하고 또 점검한 결과, 엉뚱하게도 한 직원이 설비에 모터의 회전방향을 잘못 표시했기 때문임이 밝혀졌다. 잘해보려고 표시한 방향이 엉뚱하게도 혼란을 일으켜 종일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던 것이다.
분체도료사업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아픈 기억이 있다.
공무로 채용한 조선족 B씨는 중졸 학력이지만 오랫동안 공장생활로 단련되어 설비의 보전 수리까지도 아주 깔끔하게 잘 해냈다.
나이도 있길래 설비관리가 중요한 분체도료의 생산책임자로 발탁하였다. 생산책임자로서의 그의 업무수행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의 부인도 회계로 채용하고 급여도 우선적으로 인상해주었다.
분체도료 사업이 지속적인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던 시점인 2000년말, 생산책임자로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그가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고향에 돌아가 요양을 해야겠다면서 사직서를 냈다. 끈질기게 만류한 끝에 휴직처리로 합의하고 고향에서 요양하는 데 보태도록 금일봉까지 주었다. 그런데 두세 달이 안 되어 분체도료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국도화학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국 톈진의 카이화란 업체에서 특수 에폭시 수지를 포함한 원자재에 대한 구매 문의가 왔다는 것인데, 그 특수 에폭시 수지는 우리 회사가 국도화학과 협력해 개발하고 독점공급과 기술비밀협약을 체결한 원자재였다. 그동안 기술유출을 염려하여 문서상으로 암호화하고 일부는 라벨까지 바꾸기도 했지만 생산과 기술발전을 위해 책임자들과의 일정한 공유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즉시 조사에 착수하여 기술유출의 장본인이 B씨임을 밝혀냈다.
회계를 담당하고 있는 그의 부인을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하였지만 부인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며 남편은 현재 고향에서 요양중이라고 주장하였다. 기술유출 혐의로 남편이 민형사상의 고발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남편과 회사와의 대화 자리를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B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카이화에 기술 이전의 조건으로 취업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카이화에서는 이미 퇴직하였다고 하였다. 회사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거절하면서 그동안 회사에서 섭섭했던 일들을 털어놨다. 핵심적인 문제는 가장 고생하면서 열심히 일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는데 항상 대우와 발전 면에서 대졸 기술자들과 차이가 나는 것이 불만스러웠다는 것이다. 능력도 있고 성실했던 부부 두 사람 모두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져왔고 나름대로는 그에 값하는 대우를 해주려고 특별히 신경을 써왔는데...... 인간적 배신감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인간의 욕심은 좋은 인연도 악연으로 바꿔버릴 수 있음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이것으로 B씨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그 후에도 그들의 소식을 간간이 듣기는 했지만 그리 좋은 소식들은 아니었다.
중국사업 기간 중에 인간적인 배신감으로 충격을 받았던 일은 또 있었다. 장본인은 본사에서 기술부장을 지낸 O부장이다.
2001년 신공장 준공 및 이전과 함께 사업의 발전을 위해선 기술력의 강화가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다. 본사에서는 기술력 강화를 위해 통계적 기법과 사고를 적용하는 식스시그마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중국 기술진들도 이 방법론을 익혀 기술개발 부문에 적용하도록 해보려고 본사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강성학 위원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기술은 방법론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기술의 근본 원천을 강화하기 위해선 기술인력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였다. 마침 O부장이 중국사업을 자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O부장은 전남대에서 학생운동 관련으로 제적당한 이후 본사에서 액상에폭시 관련 제품을 개발해온 능력있는 인재였다. 나는 그를 이후에 내 뒤를 이어 중국사업을 맡을 만한 인재로 판단하고 부총경리로 임명해 일정 부분 권한을 위임하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부임한 다음해에 이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부임한지 2년째 되던 해 우리의 주요 고객이었던 일본계 외자기업인 니세이전자 구매담당과 합작해서 경쟁사를 창업하였다. 니세이전자에 공급하는 원자재 대체개발이 최종완료단계에 접어든 시점이었는데 우리 회사의 담당기술자까지 데리고 퇴직한 것이다. 임회장님도 직접 나서서 설득했지만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
지나놓고 보니 그가 중국 근무에 지원한 것도 중국에서의 창업을 염두에 두었고 그동안 중국에서의 활동도 창업을 준비해가는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된 것 아닌가 싶었다. 이용만 당했다는 허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업이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엮여진 조직이라 하지만 사람간의 믿음과 신의를 그렇게 쉽게 저버릴 수 있다니......
기존의 주요 고객을 대상으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의 사업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럭저럭 유지는 해도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창업에 참여했던 초기사람들도 대부분 그의 곁을 떠났다. 사업도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과의 좋은 인연을 악연으로 만드는 사람은 사업을 크게 성공시킬 수 없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도 있었다.
2000년 봄 임회장님과 함께 광둥 출장중이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상하이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 직원들이 함께 출근하다가 회사 앞에서 시내버스와 충돌하여 정해권 과장이 의식불명이 되었으며 신속하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할 수도 있다고 한다. 상하이의 한국인 지인들과 청웨이닝에게 수소문하니 상하이의 화산의원이 뇌수술 방면에선 중국 내 최고라고 하길래 지체 없이 화산의원으로 옮기고 뇌수술을 진행하도록 지시한 뒤 곧바로 상하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업 초기부터 온갖 고생을 함께 한 동료가 생사를 오가고 있다니......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정이 착잡했다.
상하이에 도착하니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있었는데, 수술이 잘 되었다는데도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임회장님도 남은 광둥 출장일정을 서둘러 마무리짓고 병원으로 오셨다. 회장님께서 “정해권!” 하고 큰 소리로 부르자 의식이 없던 정과장이 깜짝 놀란 듯 깨어나더니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후 한 달 가량 화산의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회복된 뒤 한국에 들어가 화산의원에서 수술했던 결과에 대해 다시 검진을 받도록 했다. 다행히 한국의 병원에서도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다만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많이 걱정했는데, 몇 개월 후 꽤 양호한 상태까지 회복되어 다시 출근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생사의 고비를 이기고 살아난 정해권 과장(현재는 이사)에게 정말 감사한다. 만약 그 때 잘못되었다면 나도 평생 큰 짐을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또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남편 곁에서 회사를 믿고 의연하게 처신해 준 정이사 부인에게 감사드린다. 위기의 순간에 본 모습이 드러나는데 정이사는 참 훌륭한 부인을 맞은 것 같다.
사고 당시의 운전자는 O부장이었다. 원래 운전솜씨와 순발력이 뛰어난 그가 신호가 바뀌기 직전에 자기 실력을 믿고 급좌회전을 하다가 마주오는 버스에 받혀 사고가 난 것이다. 자기가 낸 사고로 동료가 사경을 헤메고 있는데 그의 태도는 뜻밖에 태연하였다. 실수에 대한 가책과 동료에 대한 미안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병문안도 인사치레로 한두 번 다녀갔을 뿐이다. 사람이 이토록 다를 수도 있음에 마음이 씁쓸하였다.
고속성장의 뒤안길에서 작은 사고도 빈발하였다.
임대공장에 있을 때 우리는 지게차를 사지 않았다. 공장주의 기계공장에 지게차가 두 대나 있었고 지게차 전담기사도 있으니 굳이 살 필요가 없었다. 기사에게 월 일정액을 지불하고 수입원자재 하차 등 지게차 쓸 일이 생길 때마다 도움을 받았다. 그가 일하는 공장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다.
그런데 그가 우리의 기계설비 수리를 돕다가 이층 높이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것이다. 산재로 처리되었지만 보상액이 그리 충분치는 않았다. 안쓰러운 생각에 그의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그의 집은 허름한 농촌주택에 회칠도 제대로 안 되어 있고 세간살이도 정말 보잘 것 없었다. 자기 집에서 만난 그는 회사에서 대할 때보다 훨씬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 공장의 외국인 사장이 병문안이라고 집까지 방문한 데 대해 어찌할 줄 몰라 한다. 부상이 완치되고 다시 출근할 때까지 적은 금액이나마 지속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는 다시 출근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일을 도왔다. 이런 사람들의 도움이 모든 게 부족했던 초기사업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회사에 근무하면서 취침시간에도 핸드폰을 켜놓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또한 함께 일하는 모든 책임자에게 항상 핸드폰을 켜놓으라고 요구하였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기업이다. 위기관리의 기본이 연락체계의 유지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새벽 4시에 핸드폰이 울리기도 했다. 야간작업중인 근무조에서 롤러에 손이 끼어 사람이 다쳤다고 했다.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상자를 치료중인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지만 손가락 몇 개를 절단해야 했다.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야 하는 그에게 보상조치를 한 후 그를 공무팀에서 근무하도록 하였다.
중국에서 법에 따른 보상이라고 해봐야 몇 푼 되지도 않는다. 그는 이제 손가락 불구로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회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에게 지속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회사를 위해 일하다 난 사고 아닌가. 회사가 나서서 직원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직원들이 회사에 충성하려고 할까. 비록 말단 생산직 노동자라 해도 그의 충성심은 회사의 소중한 자산이다. 엄격한 규율도 필요하지만 따뜻한 배려도 함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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