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중국 출장
96년 1월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하루 동안의 여정 끝에 칭다오에 도착하였다.
박전무님을 인솔자로 하여 영업부 대리를 포함한 우리 일행 4명은 대절택시로 칭다오에서 이난까지 이동하였다.
우리가 대절한 자가용영업 차량은 놀랍게도 한국의 현대자동차였다. 칭다오시 외곽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공안들이 차를 세우고 검문을 했다. 검문은 사람뿐 아니라 차량에 대해서도 실시되어 본닛을 연 뒤 엔진의 차대번호까지 확인하였다. 선물인 양 제공한 담배 한 갑 때문이었는지 별 탈 없이 통과하였다. 산둥반도에 최근 수년간 한국의 중고차가 대량으로 밀수입되어 특별단속이 진행중이라는 기사의 설명이었다. 이러한 자동차 밀수는 중국 해군과 관련기업들이 결탁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들어온 경로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칭다오 시내 곳곳에 눈에 띄는 것이 한국 현대차였다. 자본의 원시적축적은 이렇게 부정부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이루어지는 것일까? 사회주의국가의 인민해방군이 밀수와 부정부패의 주역이라니.... 혼란스러웠다.
저녁식사를 위한 휴식을 제외하고 택시는 너덧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나는 택시 맨 앞자리에 앉았다. 캄캄한 시골 밤길에 등도 켜지 않은 채 짚을 잔뜩 실은 경운기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오른발로 급브레이크를 밟는 모션을 취하곤 했다. 밤길에 추월하는 차량을 다시 추월하는 묘기를 보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마주 오는 차량들이 추월하는 차량을 피해 양보해주는 것이 그들 나름의 안전을 위한 질서인 모양이다.
도착한 곳은 혁명 과정에서 농민봉기의 성지가 된 이몽산취의 이난이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대만과 합자한 현대식 세라믹콘덴서 공장이 이곳에 세워졌다. 지방산업 육성을 위한 혁명성지에 대한 배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공장이 왜 이곳에 입지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밤늦게 이난의 가장 좋은 국영호텔 영빈관에 투숙하였다. 겨울인데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두꺼운 이불을 더 얻어서 푹 둘러싸고 자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이 차지한 면적은 널찍하고 건물도 크게 지었지만 투숙객들은 우리 일행밖에 없는 것 같았다. 복무원들의 일하는 솜씨도 어설프고 느려 보인다. 수요나 효율은 고려하지 않고 상급기관 출장자를 위해 외관만 그럴듯하게 지어놓은 관료들의 행동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상담을 마치고 칭다오로 다시 돌아가며 살펴본 산둥성의 산야에는 숲은 고사하고 나무도 거의 보이지 않는 황량한 농촌이 계속되고 있었다. 과거의 우리나라처럼 산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땔감으로 사용한 모양이다. 먹고 살기 힘들면 사회주의적 도덕성도 누울 자리가 없는가 보다.
칭다오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새로운 공업단지와 부두 도로를 건설하느라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중이다. 도로공사에 투입된 대우와 현대의 중장비가 곳곳에서 활약중이었다. 중장비가 부족한 곳에서는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사람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 도로공사를 진행중이다. 기간 내에 공정을 완료하기 위해 장비든 인력이든 가리지 않고 최대한 동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시는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해변 별장지대에 위치한 유럽식 건물과 해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야시장은 북적거렸고 칭다오의 푸짐한 해산물은 우리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20인승 프로펠러비행기를 타고 칭다오에서 난징까지 날아갔다. 비행기가 낡고 소음도 심해 좀 위험하게 느껴졌지만 이런 비행기 타보는 경험도 흔한 게 아니다 싶어 흥미로웠다.
난징비행장에는 우리의 통역을 담당할 난징대학 유학생 이행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권 시절 잘 알던 후배인지라 더 반가왔다.
난징은 중국의 6개 왕조의 수도였고 국민당정부의 수도이기도 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상하이, 선쩐과 같은 연해지구에 비해 발전 속도는 느리지만 장수성의 성도로 한때는 전자산업의 중심이었다. 난징에서 생산되는 숑마오TV가 중국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적도 있었다. 이와 연관되어 난징도자창, 난징무선전1창 등 역사가 오랜 전자부품업체가 밀집해 있고 대만계 전자부품업체도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었다.
업체를 방문하고 상담과 저녁식사까지 마친 후 호텔로 돌아왔지만 식사 때 마신 백주에 얼큰해진 끝이라 우리는 이행원의 안내를 받아 조선족이 운영하는 조그만 맥주집으로 갔다. 몇 잔 더 하고 맥주집을 나서자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밤거리는 어둡고 택시도 안 보였다. 택시를 기다리던 이행원이 소변을 본다고 뒤쪽으로 갔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주민들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30명 정도가 뛰쳐나오더니 우리 일행을 둘러싸고 몰매를 놓기 시작한다. 술김에 호기를 부려보던 우리 일행은 중과부적이라 각자 흩어져서 줄행랑을 쳐야 했다. 나도 길가에 나뒹구는 일행의 구두를 수습하여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비상시에 대비해 호텔을 나설 때 호텔 명함과 비상금을 챙기도록 독려한 박전무님의 준비성이 그나마 큰 도움이 되었다.
키가 가장 큰 박전무님이 행패를 가장 많이 당했고 호주머니의 여행경비 봉투까지 모두 탈취당했다. 양복을 입고 술이 취해 밤거리를 활보하던 우리 일행을 일본인으로 오인하여 삽시간에 주민들이 몰려든 것이다. 난징대학살의 처절한 기억 때문에 중국에서 반일감정이 가장 강한 지방이 난징이란다. 맞아도 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돈까지 강탈해간 것은 너무한 것 같았다. 어떻든 중국대륙 입국신고식은 제대로 치렀다. 이후에도 난징만 가면 그때 생각이 나서 일본사람으로 오인 받지 않으려고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되었다.
난징에서 기차를 타고 쿤산에 도착했다. 외국인의 기차요금이 내국인의 배나 비싼 기차 좌석에는 새하얀 시트가 깔려 있었고 실내도 나름대로 깨끗하였다. 난징에서 상하이로 이어지는 장수성은 끝없는 평원이었다. 거미줄처럼 엮인 수로와 기름기 넘치는 검은 흙, 겨울인데도 가로수마저 푸르른 평원은 산둥성의 황량한 산야에 비하면 천양지차였다. 어떤 곡물이든지 뿌리기만 하면 저절로 잘 자랄 것 같은 축복받은 땅처럼 보였다.
쿤산의 완펑전자에 도착하니 조선족인 박총경리를 비롯한 간부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곳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우리 업무를 도와주고 있는 청웨이닝을 처음 만났다. 키도 나보다 작고 꾸부정한 그리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으면서 드러내지 않고 일행을 섬세하게 보살피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 나와 최경환은 상하이를 거쳐 한국으로 귀국하고 박전무님은 광둥지역으로의 영업여행을 계속하였다.
회사에 돌아온 뒤 10여 일 후 여러 사람이 함께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임회장님은 ‘중국이 어떻더냐’고 물으셨다.
‘살기는 별론데 돈은 벌 수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 중국에 가서 한번 해볼 건가?’ 하고 다시 물으셨다.
‘네, 가서 한번 해보죠.’ 웃으면서 던진 이 한 마디로써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대주의 중국사업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임사장님은 한국에서 갈고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대륙에서 사업을 키워보겠다는 꿈을 일찍부터 키워오셨다. 국교수립도 되기 훨씬 전인 1988년부터 그는 중국 각지의 연구소를 방문하여 중국 과학기술의 장단점을 파악하였고 매년 두세 차례씩 난징, 상하이, 광둥지역 전자부품업체를 방문하면서 중국 부품업체 간부들과의 인맥을 형성해왔다. 아울러 대만 고객들의 중국진출 움직임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정보와 인맥을 축적했다. 광둥지역 차오저우시에 있는 삼환전자의 간부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교류를 확대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투자에 대한 협의가 진행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투자 문제에 있어서 주요한 고려 대상은 공장입지 문제 경영권의 주체 문제였다.
최종적으로 상하이 인근 지역에 독자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방침을 굳힌 1996년 3월, 임회장님은 중국출장 중 상하이 신좡공업구에 토지를 계약했고 일주일 만에 중국법인을 설립하였다. 호텔방에서 서둘러 관련 서류를 준비하여 납입자본금 50만 달러의 외자기업을 출발시켰던 것이다. 이때 청웨이닝과 이행원이 임회장을 수행하며 결정을 뒷받침하였다.
나는 4월 1일자로 상해대주전자재료의 총경리로 발령을 받고 국내업무를 인수인계한 후 상하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는 청웨이닝과 조선족인 최송림이 마중 나와 있었다. 최송림은 아시아나항공의 상하이지점에 근무하던 김수천이 특별히 구해준 조선족 통역이었다. 그는 조선족으로서는 드물게 영어 독해가 가능한 대졸 출신의 우수한 인재였다.
차오바오루 부근 작은 호텔을 근거지로 하여 우리 3인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공업구의 주요 간부들과 식사를 하면서 인맥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세무등기, 설비의 면세승인 등 회사설립과 관련한 후속조치는 청웨이닝의 책임 아래 공업구의 협조를 얻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외국인 투자와 관련된 상하이지역 관료조직은 그래도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려움은 공장건설을 위한 건축설계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한국공장의 설계도면을 제공하였지만 양국의 건축법체계가 다르고 건축설계의 개념도 달라 처음부
터 다시 설계를 해야 했다. 한국의 공장은 보편적으로 철골구조에 지붕과 벽을 조립식 판넬로 시공하는데 중국은 육중한 콘크리트로만 기둥과 지붕을 해야 한다고 한다. 천장 보의 두께를 1.2미터 이상 두껍게 해도 공장 중간에 기둥을 증설해야 하니 공장 내에서 지게차가 움직이기 어렵게 된 구조다. 철강, 철근, 시멘트 등 재료의 품질이 다른 데다 건축자재는 중국산만 사용해야 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든 설계회사를 선정하고 계약을 체결하였다.
공장설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시장개척이었다.
중국에서 생산을 시작하기 전에 본사제품의 시장개척이 이루어지면 중국사업의 성공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이를 위해 임회장님과 박전무님이 10여 년간 번갈아 출장을 다니며 시장개척활동을 했지만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어렵사리 샘플 시험에 성공하여 작은 주문을 받은 경우에도 정식 주문제품에서 작은 문제가 발생해 원점에서 재출발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생산현장이 중국 내에 있다면 문제 발생 즉시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도 많았다.
중국시장 공략을 위해 현지생산, 현지영업, 현지기술서비스를 책임질 수 있는 투자의 필요성이 당위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일본기업들이 중국에 생산공장을 건설하기 전에, 그리고 중국대륙의 전자재료산업이 시장에 진출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시장을 개척해서 중국시장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일정 시간 안에 이를 이루어내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져버린다. 시장개척의 성패가 중국사업의 성패와 직결되는 상황이었다.
먼저 우리 제품과 관련된 전자부품 업체를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회장님과 전무님의 중국업체 방문 메모를 복사하여 재정리하였다. 시장개척을 위해 직접 방문해서 상담했던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가장 신뢰성 있는 시장조사 기록이었다.
다음으로 중국 전자부품업체 목록에서 우리 회사 제품과 관련 있는 전자부품업체를 선별하여 리스트를 작성하고 전화로 실체를 확인해갔다. 상당수의 기업들이 목록에는 존재하긴 하지만 이미 생산을 중단하고 문을 닫은 기업들이 많았다.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춘 현대적 전자부품업체가 등장하자 수공업적 시스템으로 생산하던 기업 중 상당수가 경쟁에서 도태되어버린 것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도태되어버리는 경쟁법칙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된 업체에 대해서는 계획을 세워 직접 방문하였다.
다행히 업체들은 우리들의 방문을 허락했고 책임자들과의 상담도 이루어졌다. 외국인이라고 특별히 관심을 표시하면서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라 할지라도 식사비용은 방문을 받은 쪽에서 부담하는 것이 관례인지라 얻어먹기만 하였다. 내가 볼 때는 비슷한 음식인데 중국인들은 자기 지방의 술과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손님 앞에서 자기 지방 음식의 특수한 조리법을 자랑하면서 음식을 권하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즐거운 모양이다. 덕분에 대도시의 식당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중국 대륙 곳곳의 특색 요리와 술을 접할 수 있었다.
상하이를 출발하여 기차와 버스로 쿤산, 수저우를 거쳐 우시, 창저우, 난징으로 이어지는 루트가 기본적인 여정이었다.
내킨 김에 난통, 쩐장, 양저우까지 갔다가 난징에서 다시 안휘성으로 또는 산둥성으로 돌아다녔다. 저장성 방향으로 들어서면 항저우, 닝보는 물론 진화, 신안장까지 다녔다. 항저우에서 신안장 가는 도로는 때마침 공사중이라 거의 여덟 시간 가까이 걸렸다.
신안장 통하오를 방문하니 멀리 한국에서 온 손님을 접대한다며 특별히 방금 잡은 뱀의 피와 쓸개를 술잔에 따라 마시도록 권한다. 술이 얼큰해지자 노래방 기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시작하는데, 잘 하지는 못하지만 노는 자리에서 결코 빼는 경우가 없는 나인지라 덩실덩실 한국 춤을 추며 그들과 어울렸다. 한국 사람들은 술이 세다며 계속 권해대는 탓에 과음을 했고 호텔에 들어와 전부 토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연분이랄까. 이때 저녁식사를 함께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후 사업상의 중요한 파트너가 된 사람이 닝보의 호우 사장이다. 그는 도전재료 부문에서 우리의 경쟁업체로, 자체 기술로 은분과 도전재료를 생산하여 국내시장을 개척하고 있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샘플시험차 방문하였는데 저녁식사에 함께 초대되었다.
강 언덕에 위치한 호텔에서 바라본 신안장의 아침 풍경은 말 그대로 선경이었다. 강물은 피어오른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그 위로 아침 햇살이 은은하게 쏟아지며 주변의 산과 어우러져 있는 풍경은 숨이 멎을 정도로 고요한 아름다움이었다. 항저우의 서호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그때 신안장의 아침풍경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광둥지역의 여정은 푸지엔성 샤먼에서 시작되었다. 샤먼은 타이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 바로 앞에 금문도가 있다. 샤먼은 중국의 대외개방이 시작되면서 타이완 자본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다. 따롄, 칭다오와 함께 중국 제일의 아름답고 깨끗한 해양도시로 손꼽히는 샤먼은 겨울에 덥지 않고 여름에 춥지 않은 해양성 기후에 해산물도 풍부한 살기 좋은 도시이다. 이 지역에는 타이완 TDK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고 중국 제일의 필름콘덴서 업체인 파라전자가 토착기업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샤먼에서 업무를 마치고 오후 4시경 버스를 타면 다음날 아침 광저우에 도착한다. 광저우 인근의 업체를 방문하고는 광둥성 북부에 있는 자오칭까지 나간다. 드넓은 호수를 곁에 낀 자오칭도 아름다운 도시다. 자오칭에는 중국 최대의 종합전자부품기업 집단인 펑화그룹이 있다. 자오칭에서 길을 돌려 다시 버스로 둥관, 선쩐을 거쳐 산터우, 차오저우까지 갔다가 산터우에서 비행기로 상하이로 돌아오면 광둥지역의 비즈니스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선쩐과 둥관은 개방 이후 급속하게 공업화가 이루어진 대표적인 도시이다. 선쩐은 중국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사전에 출입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경제특구 지역이다. 홍콩과 인접한 시골마을이 지금은 중국도시 중 1인당 소득이 가장 높은 산업도시로 변모하였다. 선쩐 뿐 아니라 선쩐, 둥관, 광저우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주변에도 각종 공장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외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존해 설립된 기업이지만 어떻든 중국의 고도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광둥지역엔 특히 대만계 중소기업들이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들 기업의 상당수는 세금을 절약하기 위해 광둥지역에서 생산하여 홍콩으로 수출한 후 다시 대륙의 고객에게 공급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사업을 위한 편법이나 불법도 무리없이 통용되는 듯했다. 도시개발 상태도 선쩐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이 난개발인데다 치안도 어지럽고 택시 승차거부나 바가지 요금도 비일비재하여 비교적 준법하는 상하이와는 여러 면에서 크게 비교되었다.
10여 일의 출장기간 내내 매일 밤 통역과 함께 상담내용을 정리하고 내일 방문할 업체에 대한 현재까지의 진행내용을 확인했으며 정리된 방문보고서는 그때그때 팩스로 한국으로 보냈다. 그렇게 한 달, 또는 두 달 간격으로 중국을 드나들며 한편으론 공장설계를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개척을 위해 중국 대륙을 휘젓고 다녔다.
한국에 있는 기간중에는 코트라나 무역협회를 방문해 자료조사를 하였고, 저녁에는 중국어학원에 등록하여 중국어 학습에 매진하였다.
당시 학원의 중국어 강사는 조선족이었는데 매주 당시 한 수와 중국노래 한 개씩 외우도록 하였다. 또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맨 첫 과부터 배운 과까지의 본문 내용을 암송시킨다. 5과 정도에서 시작한 나는 일주일 내에 이미 나간 진도분을 모두 암송해야 하니 진땀깨나 흘려야 했다. 집에서고 차 안에서고 틈만 나면 책 본문을 암송해댔더니 ‘니 하오’도 모르는 아들놈까지 따라서 줄줄 암송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식으로 책 한 권을 모두 암송을 시키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들어가게 했던 강사의 무식한 교육방식 덕택에 표준중국어교본 한 권을 몽땅 외울 수 있었다. 그때 배운 只要你過的比我好(오직 당신이 나보다 잘되기를 바란다)가 나의 중국노래 십팔번이 되었다.
내가 중국을 드나들면서 중국어 교과서를 암송하는 동안 중학교 1학년인 아들놈은 한 술 더 떠 곧 중국으로 이사갈 꺼라고 2학년 교과서 신청을 하지 않아 뒤늦게 교과서를 구하느라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아들의 전학은 새학년 1학기를 마치고서야 이루어졌다.
상하이 상주 시작
1996년말에는 보다 적극적인 영업활동을 위해 사무실을 개설하고 상주 근무체제로 돌입하기로 했다. 시내에 번듯한 사무실을 차리는 것은 비용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중국에서 외국인처럼 살면 돈 벌기 힘들고 중국인처럼 살면 돈 벌 수 있다는 얘길 들었다. 그 정도로 당시 상하이의 외국인 거주지역 사무실이나 주택의 임대료는 중소기업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매출도 없는 상태에서 굳이 외국인 거주지역으로 가서 월 3,000불씩 내느니 차라리 신좡공업구에서 가까운 서민아파트를 임대하자고 마음먹고는 청웨이닝이 사는 단지 내 13평짜리 아파트를 하나 구해 사무실 겸 나의 거주공간으로 꾸몄다. 내부 장식이 전혀 안 된 공간에 비닐장판을 깔고 벽에 벽지를 바르고 냉난방 겸용 에어컨과 침대와 책상 등을 준비하니 최소한의 사무실 공간이 마련되었다.
큼지막한 모토로라 휴대폰도 하나 장만했다. 휴대폰이 보급 초기에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될 정도로 귀해서 大哥打(큰형님이 거시는 전화)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공중전화가 발달되지 않은 사정 때문인지 중국의 휴대폰 보급이 오히려 한국보다 빨랐던 것 같다. 한국에선 임원인 나도 휴대폰이 없었는데 중국에서는 상주를 시작하자마자 휴대폰부터 구입했던 것이다.
삐삐도 빼놓을 수 없는 필수 휴대품이었다. 한국에선 잠시 유행하다 휴대폰 보급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지만 중국에선 휴대폰과 상당 기간 공존하였다.
본격적으로 영업활동을 시작하려는 와중에 통역을 맡았던 최송림이 다른 직장으로 옮겨버렸다. 충분한 급여도 보장되지 않고 장래의 비전도 아직은 불분명하니 붙잡을 수도 없었다.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도 커서 내친 김에 통역 없이 청웨이닝과 영업을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청웨이닝이 눈치가 빨라 그와는 그런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업체와의 미팅 결과는 청웨이닝이 보고서로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다시 토론하는 가운데 나의 중국어 실력은 일취월장하였다. 말문이 트이기 전까지는 한국 사람들과의 접촉도 최대한 자제하였다.
3개월 정도 지나니 귀가 트였다. 귀가 트이니 말문도 열렸다. 식사중에 그들끼리 떠들며 웃어대는 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지만 업무와 관련한 대화만은 불편이 없어졌다.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내 표현이 부정확하면 청웨이닝이 쉽게 부연설명을 해주니 그와 함께 다니는 한 의사소통에는 기본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중국어를 중국어로 통역하는 방식이 우리 사이에서 개발된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떤 이는 청웨이닝이 한국어를 알아듣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성조도 발음도 이상한 엉터리 중국어지만 그래도 홍콩계 중국인들의 보통화보다는 내 보통화가 훨씬 낫다는 말로 위안을 받았다.
나는 이러한 중국어 학습법을 전투중국어 학습법이라고 부르며 이후 직원들도 특별한 경우 외에는 통역의 도움 없이 직접 부딪히며 중국어를 익히라고 했다. 물론 별도의 중국어 선생님도 구해서 체계적인 학습도 병행하지만,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학습방법은 중국 사람들에 포위되어 생활하는 것이다. 설사 기초학습이 없다 해도 그렇게 하다 보면 6개월 이내에 귀도 트이고 말문도 열리게 된다. 하지만 체계적인 인재훈련 시스템이 미비한 중소기업에서 어쩔 수 없이 채택한 좀 무식한 방법이라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출근은 침실에서 거실로 한다. 아침은 비스켓과 커피로, 점심은 직원들과 함께 시장에서 파는 合飯(도시락)으로 때웠다.
저녁이 되어서야 내가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요리 돼지고기 찌게로 배부르게 먹었다. 양파와 고추장만 있으면 그럴 듯한 돼지고기찌게가 완성된다.
지금이야 한국식당이나 한국식품점이 즐비하지만 당시엔 사정이 그렇지 못해 한국에서 꽁꽁 얼려 가져온 묵은김치는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손님접대용으로 냉동실에 넣어두기 일쑤였다. 난징으로 출장을 가면 난징대학교 유학생이던 이행원과, 역시 노동운동 후배인 권용훈의 안내로 값싼 한국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평소에 먹는 게 좀 부실했던지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얼굴이 반쪽 됐다고 아내가 걱정을 하길래 시장에서 커다란 뱀 한 마리를 사다가 들통에 넣고 하루종일 고아서 국물을 마셔봤는데 동면을 하지 않는 남쪽지방 뱀이라 그런지 그다지 도움이 되는 것 같진 않았다.
아내가 한번 다니러 와서 내 사는 모습을 보고는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가족의 이사를 추친하기 시작했다. 살던 집을 세놓고 그 전세금으로 수이칭싼춘에 30평형 아파트를 구입하였다. 당시 중국정부의 정책이 외국인 개인은 아파트를 구매할 수 없지만 기업은 아파트를 구입하여 직원의 숙소로 사용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회사 명의로 구입을 해야 했다. 내부 장식을 마치고 나니 외국인이 거주하기에 안전한 환경인지, 방범문, 화재방지 시설 등은 갖춰졌는지 파출소에서 나와 확인한 다음에야 거주 허가를 내주었다.
97년 8월 가족이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아들은 상하이중학 국제부 2학년으로 전학하였다. 영미계 국제학교에 비하면 수업료가 절반이었지만 그래도 1년에 12,000불이나 되니 중소기업에서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되는 비용이다. 매출도, 아니 공장건설도 시작되기도 전에 가족까지 이주를 하였으니 나로서는 중국사업에 배수진을 친 격이었다.
'그 시절에(~2011) > 熱情時代' 카테고리의 다른 글
Ⅲ - 4. 초기 중국사업의 성공요인 (0) | 2012.01.10 |
---|---|
Ⅲ - 3. 중국 사업의 출발 (0) | 2012.01.08 |
Ⅲ - 1. 대주에서의 시작 (0) | 2012.01.08 |
Ⅱ - 7. 전환을 위한 모색 (0) | 2012.01.07 |
Ⅱ - 6. 6·29선언과 공개 노동운동 (0) | 2012.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