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Ⅲ - 1. 대주에서의 시작

張萬玉 2012. 1. 8. 23:14

1983년 8월말 반월공단 대주정밀화학의 사장실에서 치러진 나의 입사면접은 싱거웠다.

간단하게 준비해간 이력서는 펼쳐지지도 않았고 어느 분야에서 일할 것인지 대우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임무현 사장과 박중희 전무가 참석한 첫 대면은 9월 1일부터 출근하기로 하고 차를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끝났다. 

임무현 사장은 전국노운협 사무국장 시절 이영순 회장과 함께 맥주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보다는 김문수 선배를 통해 노동운동의 대선배로서 사업을 하시면서도 노동운동 하는 후배들을 돕고 있는 훌륭한 분이라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박중희 선배와는 면접 자리에서 처음 만났지만 이 분 역시 현장운동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형님 같은 느낌이었다. 과거 노동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통해 나라와 사회를 바꿔보려는 꿈을 함께 꾸었다는 점은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의 토대가 되었다.

우리는 정말 친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하였다. 막내인 나는 특히 두 분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나에 대한 두 분의 믿음은 나로 하여금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진정 의미있는 기업으로 발전시켜보자는 꿈을 꾸게 하였으며, 지난 18년간 대주에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붓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일하는 것이 즐거웠고 힘든 가운데서도 보람을 느꼈던 것은 온전히 이 두 분과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임무현 회장님(좌)과 박중희 부회장님(우)

 

9월 1일 출근을 하자 임사장님은 간부회의에서 나를 도전재료 사업을 담당하는 신임이사로 소개하였다. 회의를 마치고 박전무님이 직접 나를 차에 태우고 안산의 운전면허시험장으로 가 운전면허학원 등록부터 시켰다. 장사를 하려면 운전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업은 출발부터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장 필요한 일을 실행해나가기도 부족한 시간에 탁상공론 같은 관념적인 논의를 펼칠 여유가 없다. 이곳에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해 내게 가장 시급한 것은 운전을 배우는 일이었다. 어설프게 배우다가 몇 차례 시험에 떨어지면 그 자체로 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그것이 인생의 활동무대를 기업영역으로 전환한 이후 부딛힌 첫 번째 현실이었다.

당시 나의 집은 광명시였다. 퇴근 후 운전연습을 마친 뒤 귀가하고 다시 새벽에 출근하려니 너무 시간이 부족했다. 임시로 운전면허학원 근처에 여인숙을 얻어 거기서 출퇴근하면서 연습을 했다. 덕분에 한 달 만에 봉고차까지 운전할 수 있는 1종 보통면허를 취득하였다.

 

회사에 입사하면서 당황한 또 하나의 일은, 출근하여 도전재료부 사무실에 가보니 내가 앉을 책상과 의자가 준비되지 않았다. 또한 도전재료부에는 이미 이공계 박사 출신의 부장이 책임자로 있었다. 그 부장이 지방 전문대학의 교수로 옮기기 위해 임무현 사장에게 사의를 표한 상태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에는 나의 낙하산 인사로 인해 부장이 나가는 모양새구나 싶어 적잖이 불편했다. 그에 따른 질시와 저항을 무마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생소한 환경에 접했으니 힘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자세를 낮추고 열심히 배우자고 마음 먹었다. 특히 고객방문과 생산현장 순회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당시 대주의 도전재료부는 연구인력이 회사 전체 연구인력의 절반을 넘었다. 또한 박사를 포함, 병역특례의 석사학위자로 구성되어 다른 부문 연구인력에 비해 학력이 월등하게 높았다. 새로운 연구설비도 도전재료를 중심으로 보충되었고 일본인 고문의 기술지도도 받는 등 회사의 신성장동력으로서 집중적인 투자와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년째 매출은 보잘것 없이 계속적인 적자 상태로 회사 내 다른 부서의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전자부품업체들은 그 원재료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 쓰고 있었다. 고객들은 품질만 맞추면 대주 제품을 사용해주겠다고 하는데 우리 제품의 품질특성이 요구수준에 이르지 못하거나 가까스로 품질특성은 맞추긴 했어도 품질이 불안정하여 자주 대량 불량을 초래하곤 했다. 한두 번 납품하다가 불량이 발생하면 고객도 양산 적용을 꺼리게 된다.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면 사업의 성공은 점점 멀어질 뿐이다.

새로운 제품의 특성을 맞추는 분야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성공해본 제품의 품질이 불안정해지는 일은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원인파악을 위해 시간만 나면 생산현장에서 살았다. 현장노동자들과 기계 청소도 같이 하고 생산관련 과거의 자료를 분석도 해보았다.

내가 분석한 근본 원인은 제품의 주원료인 은 분말의 품질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더구나 생산일정에 쫓긴다는 핑계로 규정된 품질검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은 분말의 생산공정도 투입속도와 반응온도 표준이 불분명하고 그것마저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하였다. 은 분말 생산현장의 작업환경은 열악하였다. 작업자들은 품질보다는 생산목표 달성에 급급해 있었고 불량으로 반품된 제품은 재생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은 제품 및 은 분말의 품질검사를 철저히 하도록 조치한 뒤 이를 수시로 체크하였다. 은 분말 생산공장의 작업환경 및 공정개선에 대해 작업자와 책임자가 함께 모여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결정된 사항이 집행되도록 지원하면서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 수시로 현장을 드나들었다. 회사 내에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기술도 잘 모르는 문외한이 현장에서 설쳐대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문제는 대단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품질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상식의 문제였다. 위에서 아무리 강력하게 품질을 외쳐도 말단 작업자들은 자기 편한 대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지금 우리나라 제조업의 품질과 공정관리 시스템이나 운영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지만 당시 중소기업인 대주정밀의 수준은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깨우쳐나가는 초보적 수준이었다.

 

작업자들의 이러한 품질의식에 대한 밑바닥에는 작업자들의 사기 문제도 있었다. 특히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기술인력들의 사기는 완전히 침체되어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장기간 매출실적이 부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도전재료의 기술인력은 전문대 출신으로 제조를 책임지고 있는 기술인력과 병역특례생인 석사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기술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도전재료 초기부터 생산과 제품개발을 해온 전문대 출신들은 석사 출신의 병역특례자들이 대거 입사하자 소외감을 갖게 되었다.

이들 중 윤세원 대리는 스스로 일본어를 공부하여 일본인 기술고문과 직접 대화를 나누면서 중요한 기술을 전수받은 인재였다. 나는 고객을 방문할 때 대개의 경우 윤대리를 대동하였고 자연히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영업, 기술, 생산 문제 등을 긴밀히 의논할 수 있었다.

 

퇴근 후에는 직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사업의 기초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주 자리를 함께하면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대중사업에서 터득한 방법이다. 입사 후 초기 6개월 정도는 내 월급 절반을 직원들과 술 마시는 데 소비하였다. 술이 약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직원들이 나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품질불량이 현저히 개선되고 매출도 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사기도 높아졌다.

 

내친 김에 연내에 월매출 1억을 달성하면 한번 거하게 쏘겠다며 도전적인 목표를 제시하였는데 정말 11월에 월매출 1억을 달성하였다. 밀어내기로 달성한 것이긴 하지만 매출에 탄력이 붙자 계속해서 월매출은 1억을 초과하였다. 입사 때 월매출이 5~6천만 원 정도였는데 3개월 만에 매출을 두 배 가까이로 증가시켰으니 대단한 행운이라 여겼다, 기업에서는 운도 실력이라고 한다. 이미 준비된 역량들이 목표로 잘 결집된 결과 아니겠는가.

도전재료의 매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회사 내에서 나의 능력도 인정받게 되었다. 회사는 94년에 시화공단의 신공장으로 확장이전을 했고 윤대리는 석사 출신을 제치고 최초의 전문대 출신 과장이 되었다.

 

회사에 입사하면서 생긴 생활상의 중요한 변화는 자동차를 갖게 된 것과 골프를 치게 된 것이다.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제공되는 차량이지만 휴일엔 가족과 함께 나들이도 갈 수 있었다. 골프는 상층 영업에 필요하다며 임사장님이 손수 실내 골프연습장 사용권까지 끊어주며 연습을 독려하셨고 기회만 있으면 필드에 데리고 나가셨다. 퇴근 후 귀가길에 연습장에서 매일 500여 개씩 공을 쳐봤지만 운동엔 소질이 없는 쪽이라 실력이 잘 늘지 않았다. 한동안은 드라이브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쳐야 했지만 업체 사장님들과 함께 하는 골프인지라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필드에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매월 꼬박 꼬박 월급이 나오니 경제적 어려움도 없어졌다. 어느새 중산층에 진입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좋은 점은 이젠 나도 밥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식당에서 후배들에게 오늘 계산은 내가 한다며 당당하게 계산대로 나갈 수 있다는 것, 경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약간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자존심을 크게 지켜주었다. 그동안은 주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94년말경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일본 원자재 공급업체와의 업무협의를 하러 가는 팀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비행기 아래 펼쳐진 산과 들은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고 산골짜기 사이사이의 좁은 땅을 개간하여 농사짓는 모습이나 마을의 모습, 마을과 마을을 굽이굽이 연결하는 도로도 비슷하였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려 차를 타고 다니며 본 마을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조그마한 시골마을의 뒷동산도 몇십 년 된 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시골마을 집집마다 나무와 꽃을 가꾸고 있어 농촌의 풍요로움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도시의 생활모습도 인상 깊었다. 비록 호텔 방은 비좁아 답답하였고 음식가격도 비쌌지만 도시는 좁은 뒷골목까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질서정연했다. 공장들도 화려하진 않지만 매우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음식점에서 다다미방으로 들어서는 손님들은 한결같이 자기 신발을 자기가 가지런히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선다. 전철역 승강장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승객들은 출입구 양 옆으로 정연하게 줄을 서 있다가 내리는 승객들이 모두 하차한 후에 서두르지 않고 차례차례 승차하였다. 지금이야 우리나라도 지하철 승하차 질서가 웬만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들의 모습은 내게 적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업무협의에 출석한 50대 후반의 기술자들의 태도는 진지하였다. 기술지도차 매월 대주를 방문하던 일본인 기술고문이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한국 연구원들과 함께 직접 실험을 진행하며 보여주었던 장인정신을 이들 50대 후반의 일본인 기술자들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제조기술은 과연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일본은 이미 우리가 쉽게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나가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과연 일본과의 경쟁에서 우리가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시장개척을 위해 두 번 대만을 방문한 느낌은 일본과 사뭇 달랐다.

전자부품공장들이 대부분 도심의 아파트형 공장들이다. 제품 공정별로 분업화되어 있어 이들 소규모 분업공장들이 한곳에 밀집하여 산업적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비좁은 도로에 높게 솟은 빌딩의 1층은 상가이지만 상층엔 여러 개 공장들이 입주하고 있었다. 이들 공장들의 작업환경은 한국의 부품업체보다 열악해 보였다.

만찬에는 우리 일행 외에 업계 주변의 친구들도 함께 초대되어 시끌벅적하게 식사와 술을 나눴다.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업계의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업계 정보를 공유하는 듯했다. 업종 내에서 공정별로 분업화된 구조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를 통해 일감도 자연스럽게 나누고 거래까지 성사시키기도 한다. 경쟁자들과도 정보를 공유하는 중국상인들의 전통인 듯하다. 상담 중에는 어딜 가나 가격 이야기다. 친구끼리도 잇속은 철저히 따진다고 했다.

대리점 책임자는 술이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차에 태우고 호기있게 거리를 질주하며 깔깔거린다. 대만에 아직 음주운전단속이 없던 시절이다.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선 짧은 치마를 차려입은 날씬한 아가씨들이 삥랑을 팔고 있었다. 이곳 호텔방은 일본보다 훨씬 넓었지만 밤늦게 걸려오는 아가씨들의 호객전화와 포르노 방영 때문에 잠을 설치곤 했다. 산뜻하고 정돈된 느낌보다는 어수선하고 분주한 느낌이었다. 그리 많은 업체들과 접촉한 건 아니지만, 대만 업체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의 성장동력을 발굴하려는 노력보다 당면의 이익에 집착하고 순발력 있게 변신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95년에는 도전재료 부문을 책임지면서 절연재료 부문까지 포함한 회사 전체 영업을 총괄하는 것으로 나의 업무영역이 확장되었다. 신공장으로의 이전을 계기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각 부문 생산시설의 증설은 물론 연구설비까지 대폭 확장하였다. 94년말에는 신규 연구인력도 대폭 모집하였다. 이때 채용된 신규 연구인력 중 일부는 중국 등에서 현재 임원으로 활동중이다.

회사의 외관적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를 매출이 뒷받침해야 했다. 당연히 95년의 영업계획은 의욕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2분기에 접어들면서 경기침체가 심해지자 매출도 답보상태에 접어들었다. 게다가 공장 이전을 계기로 회사의 씀씀이도 달라졌으니 경영상태는 적자로 돌아서고 자금압박이 심해졌다. 어쩔 수 없이 상여금을 우리사주 주식으로 지급하게 되고 당연히 강도 높은 비용절약과 함께 인원감축 조치까지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자연감소에 따른 배치전환을 기본으로 하지만 급격히 확대한 연구인력마저 인위적으로 조정해야 했다. 불과 6개월 전에 의욕적으로 채용한 신규 연구인력 중 일부를 퇴사시키려니 불과 몇 개월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실정이 한심스러웠다. 또한 의욕을 앞세워 모험도 감행해야 하지만 어렵다고 판단되면 지체없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보수적인 노선을 취해야 하는 것이 척박한 조건에서 생존해야 하는 중소기업의 운명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선 미래에 대비하는 선행투자가 필요하나 미래에 대한 선행투자는 현재의 부담이 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동물적 감각으로 기회와 위기를 포착하고 대처하는 것이 기업경영의 요체인 듯하다.

95년 영업전체 총괄자로서의 실적은 보잘 것 없었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행운이 항상 따라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수백여 종에 이르는 전 제품과 그 시장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이 소득이었다.

 

대주에 입사한 이후 그 동안 노동운동 과정에서 맺어온 인간관계는 대부분 단절되었다. 대신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대학동기들과의 인간관계가 차츰 복원되었다. 내가 맡은 일에 전념하여 무능한 인간이 되지 않는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노동운동을 할 때는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면 기업에선 기업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현장 작업자의 눈에서 보는 것과 기업 경영자의 시각에서 보는 기업에 대한 시각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기업이란 존재는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이다. 어떤 점에서는 상호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는 것이 양자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조건이다. 확대하자면 노동과 자본의 대립적 측면과 더불어 공존적 측면이 자본주의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요소인 것이다.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라 해도 마찬가지다. 공산당의 관료조직이 자본가의 위치를 차지하는 방식으로 변형되었을 뿐이다.

어떻든 노동운동을 해왔던 나지만 기업 경영자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데서 정신적 갈등이나 혼란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입장과 사고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의사결정에 더 도움이 되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시절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성 때문에 회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여파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는 부품회사 사장님을 만나뵌 적이 있다. 농성노동자들에게 붙잡혀 감금되다시피 했는데 사태가 종료된 후 주동자들을 색출하여 차례로 해고하면서 지금은 조용해졌다고 했다.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난 후에 87년 당시에 나도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음을 밝히자 다 지나간 일이라고 겸연쩍어 하며 화제를 돌린 적이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을 이해하고 노동자들이 기업가들을 이해한다면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상황도 적잖이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다.

어떻든 7년 동안의 노동현장에서의 경험과 5년간의 공개 노동운동 단체에서 일했던 경험, 심지어 3년 반 동안의 감옥에서의 경험까지도 기업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던 것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조직에서 부여한 내 임무에 대해 충실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 즉 직원들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되 기업 경영자의 한 사람으로서 조직 전체의 생존을 그 무엇보다 우선에 두고자 하는 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