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Ⅳ -1. 중소기업 CEO의 도전

張萬玉 2012. 1. 11. 08:38

2006년 3월, 10년간의 중국생활을 정리하고 본사 대표이사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개인적으론 영예로운 자리였다. 그러나 잘해보겠다는 의지만 있었을 뿐 준비되지 않았던 나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부터 느껴야 했다.

본사의 사업환경은 10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코스닥에 상장되어 경영상태가 외부에 그대로 공개되고 있었고, 제품구조도 전통적 전자부품용에서 최신부품용으로 이동되었다. 당연히 경쟁업체도 미국, 일본 등의 유수업체로 바뀌었고 신제품 개발에서 경쟁하는 구조로 변해 있었다. 매출구조도 삼성SDI의 PDP사업부문 비중이 매출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특정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있었다.

PDP용 유리재료의 제품개발 성공으로 매출이 급성장했고 이익도 증대되어 코스닥에 상장을 했기 때문에 시장확대를 예상하고 신규 설비투자를 과감하게 추진하였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와 맞닥뜨려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의 원인은 삼성SDI의 PDP사업 부문이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그에 따른 지속적인 제품가격 인하요구였다. 원재료가격의 인하요구에 부응하지 않자 삼성SDI는 새로운 국내업체를 개발하여 공급물량의 70%를 신규업체에 배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영향으로 2005년 하반기 이후 매출은 급감하고 경영은 적자로 악화되었다. 새로운 제품개발에 성공하면서 약간의 매출회복을 이루고 있어 그나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임하자마자 삼성에서는 다시 가격인하를 요구하였다. 삼성은 매분기별로 가격인하를 요구하면서 우리를 압박하기 위해 2차, 3차 공급업체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품의 개발과 승인과정에서 이미 기술의 상당부분이 노출된 상태이므로 그들이 2차, 3차 공급업체를 개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삼성의 구매팀은 우리 회사 근처에 호텔을 잡아놓고 가격인하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삼성측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자다. 그러나 이 요구를 거절하여 매출이 감소되면 더 큰 적자가 초래될 뿐 아니라 삼성과의 관계도 악화될 것이다. 영업을 담당하는 임일지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2006년에는 2, 3차 공급업체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조건을 내세우고 분기별 가격인하 협상을 마무리하였다. 현재로는 적자 가격이지만 내부의 불합리한 부분을 개선하면 흑자로 전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가격인하 협상을 마무리한 이후 유리재료 부문의 원가절감에 착수하였다.

먼저 제조원가의 20~30%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백금도가니 수리비용 절감에 착수하였다. 수리비용의 폭증은 유리재료사업 부문의 총체적인 관리 부재 문제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삼성측의 공정변화에 대응하여 한편으론 제품개발을 추진하고 채택되면 즉각적으로 양산에 돌입하면서 항상 납기 맞추기에 허덕이다가 삼성측의 생산이 중단되면 이에 따라 생산을 중단하는 구조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주야 교대와 주말 특근까지 장시간 근무를 강행하면서 한국인 생산직을 구하지 못해 생산직의 대부분을 중국인 일용직으로 그때그때 때워가는 것도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작업표준과 설비관리는 엉망이 되었고 이는 설비고장과 수리비용의 증가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TF팀을 구성하고 직접 이들을 지휘하였다. 다른 부문의 생산직인원을 차출하여 유리재료부문에 투입하면서 휴일에 교대로 쉴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수리비의 단가인하도 추진하였다. 수리비용이 70%이상 절감되기도 하였으나 방심하면 바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내가 직접 지휘하는 방식이 단기적 효과는 있으나 장기적 정착을 위해서는 혁신과제와 주체를 선정하고 지속적으로 점검, 지원하면서 현장에서 스스로 혁신하게 하는 것이 보다 조직적인 방식이었던 같다. 조직적으로 혁신을 추진하는 방식에 대한 당시 내 안목의 한계였다.

다음으로 해결한 것은 분쇄과정에서 양산되는 미분 폐기물 문제다. 미분은 다시 용융공정에 재투입되는데 재투입 미분이 백금도가니의 손상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단순하게는 분쇄과정에서 발생한 미분을 혼합하여 제품화하면 로스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기술진은 이 방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임무현 회장이 수일간 직접 분쇄생산라인을 지휘하면서 새로운 생산조건을 수립하고 그 조건하에서 생산한 제품을 고객에게 공급하였다. 수리비용 및 미분문제의 개선으로 유리재료의 손익을 겨우 맞추게 되었으나 계속되는 삼성측의 가격인하 압박은 가혹하기만 하였다.

삼성SDI는 공정불량의 상당부분이 원재료의 이물질 때문이라 분석하고 원자재 업체의 이물관리개선을 혁신과제로 선정하였다. 대상업체로는 우리와 P업체가 선정되었다. 프로젝트 총책임자는 품질관리를 책임지는 SDI 임원이었고 우리는 대표이사, P업체는 공장장이 나섰다. 삼성측의 이물관리 전문가가 공장실사를 통한 문제점 지적과 개선방향을 지도하고 삼성의 품질관리팀은 매 로트별 이물검사를 실시하여 격주로 실시되는 프로젝트 추진회의에서 발표하게 되며, 우리는 개선계획과 개선활동의 진행사항, 개선결과를 격주단위로 회의에서 발표하고 평가와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경쟁사와 함께하는 프로젝트이므로 회사의 이미지와도 관련되어 열심히 진행하였다.

이물이란 공기중의 먼지, 의복, 장갑, 청소도구에서 발생하는 실오라기, 배관 속의 철분 및 퇴적물, 원료 등 조대입자 등으로 일정량의 시료에 포함된 이물의 개수를 제로수준까지 관리해야 하며, 시료의 이물을 분석하여 어떤 공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개선대책은 무엇인지를 발표하게 된다. 이미 개선된 이물이 재발생하거나 개선의 진도가 느리면 회의장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나는 유리재료의 품질관리 책임자로 손종기 대리를 임명하였다. 손종기 대리를 중심으로 한 품질관리팀의 노력으로 이물관리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격주 단위의 프로젝트 점검회의는 3개월 가량 지속되었다.

삼성은 무서운 조직이다. 과제와 목표가 주어지면 담당자들은 목표달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조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구매팀, 품질관리팀, 생산팀, 기술팀 등 각 부문에서 모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무섭게만 느껴졌다. 최고의 인재에게 어려운 임무를 부여하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즉각적인 인사조치가 이루어지는 기업문화가 오늘의 삼성을 이룩하였지만 미래에도 이러한 기업문화가 통용될 수 있을까.

 

일 년간의 대표이사 재직기간 중 삼성SDI와 관계하면서 마치 주인에게 마지못해 끌려 다니는 노예와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적자를 감수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기술개발에서부터 납품에 이르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동반자라기보다는 하인 부리듯 고압적이었다.

그러나 같은 삼성그룹이지만 삼성전기는 달랐다. 특히 삼성전기의 강호문 사장은 협력업체와의 상생발전을 경영철학으로 강조하면서 이를 실천하였다. 연말이면 다음해에 협력할 모든 업체들과 상생프로젝트를 수립하고 구매전략팀이 관장하여 매 프로젝트가 성공하도록 지원하였다. 우리와는 칩 부품 페이스트의 국산화 프로젝트 등 여러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는데 생산라인에서 공동으로 실험을 진행함은 물론, 삼성전기의 페이스트 기술고문을 파견하여 우리 개발팀을 직접 지도하게 하였다. 결과는 프로젝트의 진척도가 이전과는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프로젝트 성공률도 높아졌다.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나오는 이익을 양사가 공유한다는 원칙도 지켜졌다. 삼성전기 협력업체 사장단 모임에 참석하면 협력파트너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임직원들의 태도도 SDI와는 다르다. 강호문 사장은 정말 능력도 있고 존경할만한 경영인이다.

 

삼성, LG의 계열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도 진행되었다. 국산화 프로젝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삼성, LG의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에 부응한 재료 개발 프로젝트들이었다. 이미 우리 회사는 전자 부문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는 기업들과 제품개발로 협력하는 대열에 서게 되었다. 30여 년을 오로지 전자재료의 제품개발에 전념해온 임무현 회장의 집념으로 이루어낸 결과다. 이처럼 다양하게 진행되는 기술개발을 영업적으로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론 아직도 매출의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전통부품의 고객들을 찾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이들 고객들의 대부분은 과거에 비해 사업규모가 축소되었다. 10년 전의 고객들이라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우전자와 거래하다가 IMF 때 부도를 맞아 파산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회생한 필름콘덴서업체의 사장은 매출의 20% 이상을 한 기업에 의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특히 기억나는 업체는 저항기 제조업체였다. 한국에 저항기 제조업체가 생존해 있는 것 자체부터 신기하였다. 대부분의 저항기 제조업체는 중국업체에 밀려 해외로 이전하거나 문을 닫았으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한때는 5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제법 규모있는 업체였는데 지금은 사장을 포함하여 10여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 그래도 생산량은 이전 생산량의 70% 수준에 이른다고 한다. 생산직 직원의 핵심은 고도로 숙련된 4~5명의 설비관리 기사들이었다. 생산의 모든 기능에 숙달된 이들이 생산의 윤활유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공정이 서로 연결되어 설비가 무인화시스템처럼 작동되는데, 설비에 문제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정지되고 경보기가 작동하면 기사들이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야간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생산이 이루어지고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정지된 상태로 생산이 중단된다. 그렇다고 대단한 자동화설비를 도입한 것도 아니다. 단지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자동으로 정지되고 경보기를 작동시키는 장치만 보완된 것이었다. 비록 성장은 멈췄지만 기업의 생명력이 이렇게 끈질길 수 있다는 점이 새로웠다. 이처럼 전통부품 업체들 대부분이 문을 닫는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생존해가는 기업들도 적지 않았다.

 

매출의 30%를 차지하는 삼성SDI와의 문제해결에 집중하면서도 신제품 신시장 개척활동 및 기존제품의 영업활동 지원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한편 틈을 내어 새로 시도되는 생산부문의 TPM 활동에도 솔선수범의 자세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기업 리더의 핵심적인 활동은 기업의 방향을 잘 잡아나가는 것이며, 특히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내어 정체상태에 머물고 있는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할 임무가 내게 있었다.

그러나 중국생활 10년 동안 완전히 달라진 본사의 사업환경은 나 스스로 역부족을 느끼게 했다. 다양한 신제품의 개발이 시도되고 있지만 성과도 전망도 불투명하였고 내겐 이에 대한 판단능력조차도 부족했다. 한국을 떠난 10년간 한국에서의 인적 네트워크는 빈약해져 있었다. 새롭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도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분야를 주도하는 고객기업 주요간부들의 연령층은 이미 30~40대로 젊어져 있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자신 있지만 그래봐야 현상유지일 텐데, 이제 우리기업에 새로운 젊은 지도자의 등장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하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일 년 동안 지켜본 바 임일지 상무의 능력과 자질이면 한번 맡겨볼만 하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기업을 일궈낸 회장님도 계시고 삼성SDI에서 퇴직한 김재욱 부회장도 계시니 이 두 분이 받쳐주신다면 임일지 상무도 틀림없이 잘 해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단을 내리고 용퇴를 결심하였다. 열정을 다해 키워보고자 했던 조직을 위해 현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그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쉽지 않은 설득이었지만 두 달 만에 임무현 회장과 박중희 부회장으로부터 결국 동의를 얻어내었다.

전 직원이 함께 한 퇴임식에서 대주의 미래는 새로운 젊은 세대의 몫임을 당부하고 대주를 떠났다. 내가 떠난 이후 대주는 임일지 사장의 새로운 지도력이 강화되면서 한동안의 침체를 딛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도 그때의 용퇴가 참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