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를 떠날 무렵 나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노동운동과 중국에서의 사업경험을 토대로 북한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하나 꾸려볼 수 있다면 남은 생애에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이 꿈은 처음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날 때부터 꾸었던 꿈이었다. 10년 후엔 북한에 가겠다는 막연한 꿈이긴 했지만 그 꿈을 놓지 않는다면 꼭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해왔다. 2000년대엔 개성공단사업 등 남북간의 경제협력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작으나마 북한에서 사업을 꾸려서 그 사업이 일정하게 자리잡고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되면 북한의 기업가와 관리자들의 멘토로서 기업경영의 노하우를 전하고 싶었다.
2007년 6월말 사직에 대한 임무현 회장의 최종 동의를 받아내고 귀가하는데 김문수 지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임회장님으로부터 나의 사직 소식을 듣고는 바로 전화를 한 것이다. 경기도에서 자기를 도와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장기적인 꿈이야 있었지만 구체적인 향후 계획을 가지고 한 사직이 아니라서 조금은 막연한 상태였는데 과거에 뜻을 함께했던 동지의 부름은 마음에 큰 의지가 되었다. 세월의 간격을 넘어서서 여전히 나를 신뢰하고 반겨주는 분들이 있으니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다.
보좌관 생활을 시작하면서 김지사께 나의 꿈은 기회가 되면 북한에 가서 경제 쪽 일을 해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 바 있는데 이를 잊지 않은 지사님의 배려 덕분에 북한과의 교류협력 실무협상방문단과 함께 개성 및 평양을 수차례 방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오랫동안 북한과의 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해온 사람들로부터 북한과의 협력사업과정에 대한 솔직한 의견들을 듣거나 개성공단에 진출한 경영자들을 만나 사업상의 문제를 포함한 북한 노동자들 및 북한 관료들의 의식변화 과정 등 다양한 경험들에 대해 들을 기회도 갖게 되었다.
제한된 경험이지만 보고 느낀 결론은, 남북 간의 경제발전 수준의 격차 때문에 남북 간의 경제협력은 남북 상호간의 경제발전에 분명한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치적 장애가 남북 경제협력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정경분리의 원칙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북한사회의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북한과의 교역이나 개성공단 이외의 지역에 직접투자하는 것은 사업 리스크가 너무 커서 시기상조라는 판단이 들었다. 북한 사업이 주관적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절대적으로 규정받는다는 사실을 재삼 실감해가면서 내 꿈은 일단 저만치 밀어두어야 했다. 북한의 지도자가 세계의 변화에 부응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없는데 기다리는 방법 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경기도시공사 상임감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북한대학원에서 북한경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북한사회를 깊게 이해하는 방법이라 생각되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라 쉽지는 않았지만 재미있었다.
북한 경제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북한의 사회주의계획경제는 해방과 6.25전쟁 이후 초기 경제 재건과정에서는 자원배분의 집중을 통해 비교적 빠른 성장을 이룩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 이후 사회주의계획경제의 근본적인 결함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1990년대초에는 사회주의권 붕괴의 충격으로 사회주의계획경제 시스템의 붕괴에 직면한다. 고난의 행군기간을 경과하면서 자생적으로 등장한 부분적인 시장경제가 배급제를 대신해 인민들의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데,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 및 당과 군의 재정을 조달하기 위한 궁중경제와 국가기관의 통제 밖에서 인민들 간에 광범하게 확산된 시장경제가 함께 공존하는 이중경제, 그것이 오늘날 북한경제의 모습이다. 김일성의 경제사상이 항일빨치산 시절의 자력갱생이라는 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김정일 역시 반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경제사상을 답습하여 대안의 사업체계와 청산리 정신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없는 기술로 결론이 내려진 비날론 생산공장을 고집스럽게 재건하는 모습은 그들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경제이론가들도 마찬가지다. 몰락한 사회주의계획경제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는 거의 볼 수 없으며, 물질적 인세티브제 도입에 대해서도 정치적 자극과 물질적 자극을 결합하되 정치 우선이라는 김일성의 지침 내에서만 극히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나의 석사학위 논문 주제는 <개혁개방 시기 중국기업의 경영전략 연구>였다. 중국 개혁개방 시기에 성공적으로 변화를 수용함으로써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기업들과 그렇지 못했던 기업들을 비교연구함으로써 북한 국유기업 개혁에 관한 시사점들을 찾고자 했다.
전면적인 경제개혁 없이 독자노선을 추구하겠다는 북한지도부의 사고가 변하지 않는 한 북한의 개혁개방은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지속적인 협력을 통해 개혁개방의 유효성을 확인시켜주는 방식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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