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매년 건강검진을 해왔지만 이왕 중국에서 살게 된 바에야 올해부터는 중국에서 받아보기로 했다.
검진을 받은 곳은 대만계 건강검진 전문기관인 징캉(景康)의원이었다.
리포트는 이주일 후에 나온다고 했는데, 오전에 검진을 받고 돌아와 점심을 먹고 있을 때 바로 의원에서 전화가 왔다. 혈액검사 결과 CA 19-9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와 췌장암이 의심되니 빨리 전문기관에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라는 것이다. 정상수치 범위가 1~37인데 1000이 넘는다니...... 너무 과한 수치에 설마 오진이겠지 반신반의 하면서도 마침 이틀 후 한국출장이 잡혀 있기에 한국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2010년 12월 7일 오전 9시 고려대 구로병원 진료실. 이틀 전에 찍은 CT 결과를 확인하였다.
중국에서의 건강검진 결과가 잘못이었기를 기대했던 희망은 무산되고 비장과 간, 임파선으로 전이된 췌장암 4기라는 냉엄한 선고에 직면하였다. 서둘러 중국에 있는 아내에게 귀국하도록 전화를 하고 임회장님께도 사정을 알리고 난 후 마지막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면서 흥분된 마음을 달랬다.
이후 수술의 기대를 안고 서울대병원을 찾았지만 수술도 불가, 방사선 치료도 불가하고 항암약물로 생명을 일정 기간 연장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항암치료를 위해 중국 근무도 중단하라니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사의를 표하고 후임 인선을 부탁하였다.
영정사진과 뒤늦게나마 첫 가족사진을 찍는데 만감이 교차하였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상해로 돌아가 정든 중국생활에 이별을 고했다. 살던 집도 처분하고 이사짐을 꾸리고 간단하게나마 업무도 인수인계하였다.
길어야 일 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내가 남양주시 수동면 축령산 자락에 나의 마지막을 보낼 전원주택을 얻었다.
눈 속으로 난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다니며 쉽게 산책할 만한 길을 탐색한 끝에 4킬로 이상 완만하게 이어지는 호젓한 잣나무 숲길을 찾아내었다.
산책길 입구부터 늘 뒤를 쫄랑거리며 따라오던 동네 강아지도 한 마리 분양받아 산책길 동무로 삼았다. 그 길을 걷고 또 걷는 동안 사계절이 지나갔다.
많은 친구들이 수동면까지 나를 찾아와주었다. 특히 임무현 회장님과 권형원 전무님은 주말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 들러 전복을 사들고 방문하셨다. 노동운동을 함께 해온 옛 동지들과 대우어패럴의 노동자들, 청계피복노조의 동화모임 멤버들, 경동교회의 친구들과 후배들에 이르기까지 그 옛날의 인연들이 40여 년의 간격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다. 정말 고마운 이들이다. 말이 짧은 나로서는 그 고마움을 일일이 표현하지도 못하겠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고 나가듯 역사는 흘러간다. 우리의 인생도 그 속에 묻혀 흘러가다가 생을 마감한다. 어떤 사람은 짧게 어떤 사람은 조금 더 길게 살겠지만 결국은 유한한 인생이다. 이젠 유한한 인생의 막을 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두렵지 않다. 담담하게 인생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려 한다. 다만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특히 결혼 이후 동지로 친구로 살아오면서 내 뒷바라지에 전념한 아내에게 미안하다. 어릴 때부터 아빠의 부재를 감수하면서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자라준 아들, 이제 꽃을 피울 그의 장래를 함께해주지 못하는 것이 여한이라면 여한이다.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 옛 동지들에게도 미안하다. 이젠 더 같이 있을 수 없다. 인생이란 원래 이런 것인데 어쩌랴.
소년시절엔 진리를 찾아 통일교회에 미치기도 했고 대학시절에는 경동교회에서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의 세례를 받으며 노동운동에의 투신을 결심했다. 그 결심이 바탕이 되어 30대부터는 노동운동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열정을 불태웠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상이 있다. 젊은 시절에 품은 이상은 별처럼 반짝이며 한 사람의 일생을 이끌고 간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나 역시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 산업현장에서 경영자의 길을 걸었다.
광활한 중국대륙을 누비는 장사꾼의 길도 노동운동 못지 않게 의미있고 다이나믹하였다. 노동운동을 할 때는 세상을 비교적 단선적으로 보아왔는데 사업의 세계에서 본 사람과 세상은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어쨌든 노동운동가의 길도 중국에서 걸었던 장사꾼의 길도 내겐 모두 의미있는 길이었다.
군사독재정권하에서 노동운동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면서 그 고비마다 일정한 역할을 해냈고, 그 역할을 통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단초를 마련하였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인생길이었던 산업현장에서도 중소기업이라는 좁은 영역이지만 선봉에 서서 중국사업의 기초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
세 번째로 인생의 전환을 도모하려던 북한에서의 사업이라는 꿈은 결국 현실화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십 오륙년에 한 번씩 새로운 길을 찾아나설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감사해야 할 내 인생의 복이다.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었지만 자기 신념에 따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은 총체적으로 행복한 인생이다. 이제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우리 세대가 꿈꾸었던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은 미완의 과제로서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졌다. 어쩌면 다음 세대는 새로운 시대적 명제로 우리 세대들의 명제를 대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지 않은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흙에서 왔으니 이젠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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