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 초반의 15년간을 현장의 노동운동가로 후반의 15년간을 중소기업의 경영자로 살면서, 한때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며 살았고 또 한때는 자본가를 대신하여 경영을 책임지며 살았다.
언론에서는 종종 한국의 노사갈등을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로 지적하며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기업 차원에서 본다면 기업의 흥망성쇠의 책임은 전적으로 기업가에게 있다. 노사관계를 파국으로 끌고 간 책임도 전적으로 기업가에게 있다.
기업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사업의 방향과 전략을 올바르게 수립하여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는 상황하에서는 노동자에게 배분할 몫의 여유도 생기게 된다. 강성 노동조합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현대자동차 나 현대중공업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기업의 경영상태가 계속 어려워지면 노사간의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인재들이 서둘러 직장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내부의 잠재력은 약화된다. 노동자에게 분배할 몫이 적어지고 대량의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노사갈등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평소에 노사간 신뢰관계가 축적된 기업에서는 그나마 대안을 찾아나갈 수 있지만 노사간의 신뢰 없이 대립적인 노사관계를 지속해온 기업의 경우는 결국 힘의 대결로 치닫게 된다. 쌍용자동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많은 기업가들은 강성노조가 현장의 질서를 파괴하였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노조의 대의원이나 간부들이 작업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 걸핏하면 관리자들과 마찰만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현장관리자들이 노동조합에 동조하거나 소신 없이 눈치만 보기 때문에 발생한다. 또한 현장관리자들이 평소 현장노동자에게 상사로서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자기가 일하는 직장에서 인격적으로 존경받으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현장관리자들과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분위기, 즉 기업문화야말로 노사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80년대초 내가 근무했던 구로공단의 봉제공장들에서는 현장의 반장들이 작업자들의 조그만 실수에 대해서도 인격적인 모욕과 엄청난 꾸지람을 주었다. 남자 관리자들이 지나가면서 여성 작업자들의 엉덩이를 툭툭 치고 다니는 일은 다반사였다. 당시 사회에 팽배해 있던 억압적인 군사문화가 기업문화로 만연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우어패럴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한 후 내걸었던 일차적인 현장활동의 목표는 가장 억압적인 현장관리자를 선별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장활동은 노동조합의 힘을 확인시켜주면서 현장노동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1987년 울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노동운동의 배경에는 이러한 군사적 기업문화에 대한 현장노동자들의 분노가 깔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기업에서는 기업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그러나 중간관리자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건전한 기업문화를 육성하는 것은 기업가의 책임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가의 경영철학이다. 기업의 활동은 이미 사회적인 활동이다. 기업 활동은 소비자, 대리상, 구매업체, 임직원들의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업가들이 자신의 사적 탐욕의 수단으로 기업을 악용하면 이해관계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가가 임직원들의 체불임금과 납품업체의 외상값은 나 몰라라 하고는 원청업체에서 받은 물건대금을 챙겨가지고 해외로 야반도주하는 일들이 산업현장에서는 적잖이 발생한다. 이들은 중국 등지에서 같은 방식으로 다시 야반도주하여 나라의 체면까지 손상시키고 있다. 이러한 경영철학을 가진 기업에서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 한진중공업 사주의 경영철학도 야반도주하는 기업가의 경영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개별기업 차원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원리적으로 공존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부가가치의 창조과정이 자본과 노동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분배 몫을 둘러싼 분쟁도 기본적으로는 기업의 경영상태에 의해 결정되므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바른 경영철학과 건전한 기업문화를 가진 기업은 경영상태가 조금 악화된다 해도 심각한 노사갈등으로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기업이 천하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건전하고 활력있게 움직일 때 우리 사회의 경제생활이 풍요롭게 유지될 수 있고, 따라서 기업이 건전해야 사회도 건전할 수 있다. 건전한 기업가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은 쉽게 자본가의 사적 탐욕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통제되지 않은 자본의 탐욕이 누적되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도 자본의 탐욕이 누적되어 불러온 결과이다.
사회세력으로서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경제활동 상당부분은 10대 재벌의 영향력 아래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자본의 집중현상과는 다르게 자본 내에서도 다양한 분화가 발생하였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산업자본 외에도 부동산과 주식투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이들은 기본적으로 기존 시스템을 지지하고 있지만 이들 상호간, 또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자 간에는 모순과 갈등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분화도 단순하지 않다. 비정규직노동자들과 대기업과 공공부문에 소속된 정규직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상당히 다르다. 고소득 전문직 봉급생활자들은 자신이 노동자로 분류되는 데 반감을 갖고 있으며, 여윳돈을 부동산과 주식 등에 투자하여 일정하게 부를 축적하고 있다. 근로조건을 보아도 다양한 사무직, 전문직과 생산직은 상당히 다르며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이들과 또 다르다. 뿐만 아니라 자본이나 노동에 편입하기 어려운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이처럼 사회가 다양하게 분화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도 다양한 편차를 갖게 된다. 특히 세대간 가치관의 차이는 훨씬 더 극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사회에는 분명히 기득권을 보호해주는 기존 시스템을 옹호하는 세력과 시스템의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노동운동가로서 활동할 때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노동조합이 단순한 이익집단을 넘어 사회시스템의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의 중심에 서기를 희망하였다. 노동운동을 떠난 지금도 나는 그러한 기대를 갖고 있다.
기업 구성요소로서의 노동자들은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자본의 탐욕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특히 세력으로 조직화된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은 이익집단의 틀을 뛰어넘어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본의 탐욕을 통제하고 건전한 기업풍토를 조성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몇 가지 제도를 바꾼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운동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다. 북유럽국가들이 높은 복지수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이유는 기업과 사회의 투명성지수가 세계 최고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노동운동은 군사독재에 맞서고 기업 내부의 군사문화에 맞서는 투쟁으로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젠 계급투쟁과 반자본주의의 낡은 옷을 벗어던지고 건전한 자본주의를 육성하는 세력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할 때다. 세상 변화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자들이 진정한 진보세력이다. 세상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고 낡은 틀에 집착한다면 스스로를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전락시켜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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