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熱情時代

Ⅴ - 4. 나의 영원한 사부, 한배 형

張萬玉 2012. 1. 12. 09:03

김준용 / 전 대우어패럴노동조합 위원장

 

 

촌놈이 서울 와서 처음 본 청계천에 대한 기억은 거대한 고가 다리와 지게꾼들, 귀청을 때리는 굉음, 그리고 어두컴컴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주눅뿐이었다.

회색빛의 음울한 도시에서 나의 인생 역시 회색빛으로 버무려질 때쯤 한줄기 햇살을 만났다. 경동교회 야학 동화모임에서 한배 형을 만난 것이다.

객지에서 '따블 백' 소리만 듣고 살았던 나에게 한문을 잘 쓴다고 칭찬해주던 한배 형은 늘 아랫목처럼 따뜻했고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여준 창이었다.

형은 좋은 회사 때려치우고 건설 현장에서 노동을 하기 시작하여 나를 놀라게 하더니, 어느날은 현장에서 일하다가 머리를 크게 다쳐 붕대를 감고 나타났다. 그 사건은 나에게 한배 형을 따라 노동운동가로 살리라고 다짐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군에서 말년 휴가 나왔을 때 한배 형은 나를 데리고 구로공단을 구경시켜주면서, “너 제대하면 원림산업(대우어패럴)에 들어가서 나랑 노동조합 만들자”고 하였고, 나 역시 흔쾌히 동의하였다. 이후 노동조합을 조직해나가는 과정에서 형과 나는 완전히 환상의 복식조였다. 형은 내가 필요한 부분을 잘 파악하여 치밀하고 노련하게 뒷받침해주었고, 나는 형의 지원과 격려에 힘입어 더 힘있게 활동할 수 있었다. 형이 앞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조합원들이 알지 못하지만 사실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탄생과 활동의 바탕에는 한배 형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배 형은 내가 어려움과 유혹을 이기고 버텨낼 수 있게 해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85년 6월 나와 강명자, 추재숙이 구속되고 구로연대투쟁이 벌어졌을 때 나는 한배 형과 심상정이 남아 뒷감당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배 형은 굳이 시위의 주동을 자처하여 스스로 징역살이를 택했다. 구속된 노동자들과 아픔을 함께 하고자 했던 그 남다른 책임감이 어쩌면 내가 형님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출소 후 내가 서노협과 전노협을 준비하고 있을 때 형은 전국노운협을 만들어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하고 지원하였다. 형과 나는 참으로 손발이 잘 맞는 콤비임에 틀림없다.

청계피복노조, 대우어패럴노조, 서노협, 전노협 등 노동운동이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던 그 모든 고비마다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했던 한배 형님. 그는 나의 진정한 사부이다. 나의 노동운동 인생에 김문수 형이 아버지였다면, 한배 형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이제 그 사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형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열정과 헌신으로 젊은 날을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날 수 있도록 한배 형의 사슴처럼 맑은 눈망울을 정성을 다해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