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토부가 제공해주는 훌륭하고 저렴한 숙소와 인연을 맺게 된 게, 본격적으로는 올해 여름부터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첫 인연은 우리가 중국으로 이사가기 전인 1997년 초여름 축령산 자연휴양림에서 시작됐구나. 그렇게 치면 15년도 넘었네.
국립(혹은 군립)자연휴양림 숲속의 집(혹은 산림휴양관)은 공기 좋은 숲에 안겨 밤하늘 별을 헬 수 있는 통나무집에서의 하룻밤도 좋지만
대개 풍광 좋은 관광지들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숙소를 거점으로 이곳저곳을 여유있게 돌아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가격은 4~5인실 기준 평일 4만~5만 원이니 1인당 만 원꼴, 취사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니 진짜 백 점짜리 숙소 아닌가.
문제는 매달 1일(지방에 따라서는 3일) 인터넷으로 선착순 예약을 해야 하는데 지원자가 폭주한다는 점.
하지만 숲길 거니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부지런한 셋째시누이 덕분에 언제부터인가 자연휴양림은 '자매유람단'의 공식 숙소가 되었다.
올해 6월, 인제군립 광치휴양림을 시작으로 9월 무주자연휴양림, 순천 민속휴양림, 남해 편백휴양림을 거쳐
무려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라는 10월 하순에 용대휴양림과 방태산 휴양림을 선점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예약일에 맞춰 '일단 예약'을 강행한 결과 이번 여행길에는 멤버 다수가 불참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약간 아쉽......
하지만 그리하여 오붓하기도 했던 三人行의 2박3일, 단풍여행 일기.
10월 23일(수)
첫 숙소인 인제군 용대휴양림에서 가까운 백담사를 일단 목적지로 정하고 출발,
홍천 가는 국도를 타고 달리니 11시 반경 백담사 입구에 도착했다.
2008년에 후배들이랑 왔을 때 먹었던 그 식당이 여전히 성업중이다. 주메뉴인 황태구이보다 밑반찬으로 나온 산나물에 열광했던 기억이 나서 리바이벌.
백담사에서 오세암까지 걸을까 했는데, 등산객이 바글거리는 백담사 쪽보다는 십이선녀탕 쪽이 낫다는 식당 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차머리를 돌렸는데
도착해보니 돌길이다. 요즘 무릎 상태가 수상쩍어, 출발 전부터 이번 여행은 평평하고 푹신한 길만 걸으리라, 절대 낚이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왔는데 말이지.
일행들을 먼저 올려보내고 나는 뒷날을 위해 계곡을 따라 노라리노라리 올라가기 시작한다.
비록 단풍은 절정을 살짝 지나 말라들어가고 있지만 백담사 길 못지 않은 계곡 절경이 점입가경이다.
여기서 스탑!
웬만하면 복숭아탕까지는 가려고 했지만 마지막 급비탈 구간 10여분 거리 남겨두고 계곡에서 멈췄다. 만족한다.
입구에서는 단체관광 온 아줌마(할머니?)들 한 떼가 쿵짝쿵짝에 맞춰 막춤 삼매경이다.
익숙한 광경이긴 하지만 하필 더벅머리 카수가 불러주는 곡이 The Young ones 여서 그랬나, 할머니들의 필사적인 춤사위가 좀 짠했다.
지난번 남해에 갔을 때 미조항에서 우럭 몇 마리 사다가 끓어먹었던 것처럼 이번엔 대포항에서 장을 보자고 속초 쪽으로 가는데
코스로 보자면 당연히 미시령을 넘어야 하지만 한계령 단풍이 최고라는 주장에 따라 한계령을 넘었다.
와, 역시 단풍은 역시 설악산......만산홍엽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가을색이 제대로 들었다.
게다가 올라갈수록 구름이 두터워지면서 안개에 젖은 풍경까지 보태져 말을 잊게 만든다. (그 안개 때문에 정작 정상에서는 발 아래 풍경을 보지 못했다.)
산 하나 넘었을 뿐인데 이 동네엔 비가 내린다.
비에 젖은 대포항도, 미시령 밤길도 좋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로...
용대휴양림은 휴양관보다 야영데크가 압도적으로 많은 휴양림.
야영장이 많다 보니 매표소에서 휴양관까지 들어가는 길이 꽤 길다. 동행한 셋째 시누이네는 이번 여름에 이곳 7야영장에 텐트를 쳤다고 한다.
어둑한 숲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 꼭 텐트를 들고 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시설은 지금까지 다녀본 휴양관 중 최고.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넓고 깨긋한 건 기본이고 옷장에 정수기, 샤워부스까지 갖추었다.
아, 그리고 이부자리에 찍힌 저 마크는 다른 휴양림 이부자리에도 있었다. 식기들도 죄다 같은 디자인의 새 물건들.
최근에 국립자연휴양림이 전국의 시설들을 일제히 점검한 모양이다.
이 숙소에는 다른 휴양관들과는 달리 2층에 널찍한 노천 휴게공간이 두 군데나 있다. 훌륭하다!
10월 24일(목)
방이 뜨끈해서 푹 잤더니 무릎이 조금 부드럽다. 뻣뻣한 느낌은 여전히 가시지 않아 오늘은 단풍에 홀려 무리하는 일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
연무 속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잠깐 산책. 아침 먹고 난 뒤에 본격 산책.
사람인가 단풍인가.
일부러 맞춤해 입고 온 것도 아닌데...... ^^
산책로는 좋았지만 너무 짧았다. 하긴 인근에 깊은 숲과 준봉들이 널린 용대휴양림은 숙소라는 역할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일행이 조촐하니 여유만만이다. TV도 좀 보고 노라리노라리 하다가...... 행동식으로 충무김밥을 말아가지고 점심 때가 좀 못 되어 출발.
방태산 휴양림 가는 길에서 벗어나 원대리 자작나무숲으로 갔다.
인터넷에서 보고 가졌던 기대에는 좀 못미쳤지만 (특히 멋대가리없이 넓게 밀어놓은 길이 가파르기까지 하여)
전나무도 빡빡하고 자작나무숲을 굽어볼 수 있는 지점까지 올라가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마침 서쪽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니 멀리 보이는 낙엽송 군락지와 아름다운 단풍까지 어우러져 한 폭의 서양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정상 부근에 조성되어 있는 게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인 건 맞지만 단체관광팀이 많으니 속삭임은 듣기 어렵다.
희고 날씬한 자작나무 사이를 조금 거닐다가 발길을 돌린다.
셋째 시누이네는 자전거도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나는 그 길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올라간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정상에 있는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그냥 돌아나왔는데 입구 쪽에도 화장실이 없어서 이 한 몸 숨길 곳 찾느라고 진땀깨나 흘렸다. (4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가야 화장실이 있다고 한다. 이 소문난 관광지에 화장실 사정이 이리도 열악할 수가!)
주차장도 따로 없어서 길가에 줄줄이 세워놓는다. 분명히 국유림일 텐데...... 슬슬 소문도 나고 하니 내년쯤 오면 좀 달라져 있으려나?
차머리는 방태산 쪽으로 향한다.
작년에 두 번이나 왔던 곳이지만 여름과는 또다른 분위기.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더 분위기가 좋다.
하지만 지은 지 오래 되어선지 휴양관 시설은 최근 지어진 시설에 비해 좀 떨어진다.
(게다가 죽이면 악취 풍기는 집게벌레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기까지)
10월 25일(금)
지난 여름에 한 바퀴 둘러만 보고 갔던 그 길을 다시 한번 돌았다.
겨우 2킬로 남짓한 짧은 산책로로는 양이 안 차는 시누이네가 등산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갔다 오겠단다.
나는 가을햇볕에 보석처럼 빛나는 개울가에 주저앉아 이어폰 대신 물소리에 귀를 귀울여본다.
발 아래 맴돌며 조약돌들과 희롱하는 물줄기는 다정한 목금 소리,
놀다 놀다 낙엽을 끌어안고 저 멀리로 사라져가는 물줄기는 발라드 가수의 한숨 섞인 속삭임.
말 그대로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버렸는지 모르겠다. 이런 걸 명상이라고 하나?
올해 단풍은 예년에 비해 그리 곱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단풍이 얼마나 화려한가는 별 문제가 아니다.
단풍만 보러 갔더라면 백양사나 정읍사가 더 훌륭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단풍 숲’보다 바위와 계곡, 이런저런 잡목과 마구 헝클어진 숲(게다가 절정이 살짝 지나 어느 정도 떨어지고 어느 정도 말라버린)이 더 ‘가을스러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듯하다.
방태산에서 나오는 길에 방동약수 들어가는 길목의 ‘마당 너른 집’을 찾았다.
지난 여름에 왔을 때 이 집에서 막국수와 메밀만두를(그리고 슴슴한 물김치를) 어찌나 맛있게 먹었던지 그 기억을 더듬어 두 번째 걸음이다.
시즌으로 치면 성수기가 맞는데 햇볕 한 자락이 나른하게 떨어지는 넓은 홀에서 서빙하는 언니가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우리를 반기며 책을 덮는데 흘깃 보니 유시민씨의 ‘어떻게 살 것인가’다.
오는 길을 국도로 찍었더니 홍천까지 오는 길이 정말 훈훈한 지방도다.
번호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철장 방향의 왕복 2차선 도로였다.
아직 베지 않은 황금빛 들녘과 함께 이번에는 줄줄이 늘어선 은행나무가 눈부시게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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