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가 왕창 밀려,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요약할까 하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知己였다.
저절로 떠오를 정도이니 아주 익숙한 단어임이 분명한데 갑자기 속뜻이 궁금해져서 한글사전을 찾아보니
과연 한자 뜻풀이 그대로였다. 자기
곡절 많은 인생길을 지나다 보니 이런저런 계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정말 '인연'이라는 게 있는 건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얽히는 사람들이 생기고 '친구'라는 말로 관계가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친구'의 범주 속에는 '아는 사람'(요즘의 인간관계를 잘 나타내주는 단어, 知人)도 있고
예전의 어떤 기억을 공유하는 '옛친구'도 있으며(관계를 현재로 가져오려면 새로운 추억을 키워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현재 하고 있는 일이나 관심사, 취미 등을 중심으로 맺어진 '동료 내지 동호인'도 있고(그 분야 외에는 공통부분이 크지 않은)
'의리'로 맺어진 관계도 있고(근거리에 있다거나 어려운 일을 함께 겪었다거나 '홍반장' 같은 오지랖이라거나 해서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생활 사이클이 비슷하다보니(독거노인.. ㅋㅋ) 외로움을 피하는 공간을 같이 사용하는 관계도 있다.
어찌되었건 인연이라는 건 하늘이 낸 것이니(내 마음대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점에서) 모두 소중한 관계이긴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카테고리들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밀쳐내기도 하면서 내게 '거리조정'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밖에서 만나 커피 마시면 좋을 친구가 있고 밥까지 먹으며 좀 느긋하게 수다 떨고 싶은 친구가 있고
산책이나 드라이브로 만남을 연장시키고 싶은 친구가 있고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친구가 있고
집에 데려오더라도 거실에만 모시고 싶은 친구가 있고 집 안팎을 맘대로 휘젓게 해도 괜찮은 친구가 있고
자고 가라고 붙잡고 싶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기약없이 머물러도 상관없겠다 싶은 친구가 있다. (사실 이건 두고 봐야 안다. ㅋㅋ)
내 품이 넓고 기운이 좋을 때는 모두 안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공간의 문은 꽤 넓게 열려 있었고, 네 친구는 내 친구였고, 불한당이 아닌 이상 웬만큼 헤집고 다녀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원하는 바'보다 '친구'가 원하는 바에 따라 '응대'를 해야 내가 기뻤다.
그런 기쁨이 깨진 게 아마도 남양주로 이주한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대부분 남편 병문안차 찾아온 고마운 발걸음들이긴 했지만 남편의 인연들이라 내가 처음 뵙는 어려운 분들도 있었고
나 고생한다고 위로차 찾아온 친구들은 남편에게 생소한 인연들이었다.
거실과 부엌이 한 공간에 있었고 남편이 누워있는 곳은 안방이었다. '사적인' 공간이 없었다.
인간관계가 넓다 보니 어떤 날은 하루에 세 팀도 다녀갔다. 어떤 팀은 산천경개 좋은 그 동네를 같이 탐사하고 싶어하기도 했다.
나의 신경은 (심지어 아픈 남편조차도) '응대'에 집중했고 우리에게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 집에서 처음 알았다.
그렇다고 면회를 사절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적적한 날은 친구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문제는 '거리조정'이었다. 남편도 나도 그런 걸 자유자재로 할 만큼 '세련된 사람'은 못됐던 것이다.
제주로 이주하면서 그때의 갈등이 되살아났다.
해보는 말인지 진심인지 모르지만 '놀러갈께, 각오해!', '나도 가서 같이 살면 안 될까?'란 말들을 듣는 기분이 묘했다.
외로움을 자처하여 떠나는 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애들이 저들 중 몇이나 될까.
이게 다 내 '업'이로구나. 민박집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마음의 불을 지펴 '친구'라는 이들을 '응대'해줄꺼나.
'친구'의 카테고리들을 분석하여 그에 걸맞는 '응대' 매뉴얼을 만들어볼꺼나.
헌데 그런 관념적인 갈등에 휘말리기도 전에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다행히 모두 知己들이었다. 구태여 '응대'가 없어도 개의치 않는, 이해 안 되는 짓을 하더라도 굳이 해명할 필요없는......
11일 밤에 긴급히 찾아온 친구는 상해 한국학교 재직 시절 동료 교사이자 좋은 이웃으로 인연을 맺어온 15년지기다.
아이들 모두 한국 대학으로 진학한 뒤 자기도 더 나이 먹기 전에 한국에서 자리 잡아야겠다고 (사업하는 남편 떼어놓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여의치 않자 중국어가이드나 해야겠다고, 나더러 같이 자격증을 따자고 조르더니
결국 가이드 시험에 합격하고 중국여행사 소속 실습 가이드가 되어 나타났다.
실습 가이드는 (보수는 고사하고) 모든 비용을 자비로 해결해야 한다니 당연히 우리집에 와야지.
한 동네 살면서 서로의 생활에 무시로 드나들던 사이라 허물도 없고, 자기 스케줄을 갖고 있으니 '응대'가 필요없는 최적의 손님 아닌가.
일 마치고 저녁에 돌아와 풀어놓는 '중국인 관광의 실상'도 흥미롭고 (대단한 '르뽀'깜인데, 이 친구가 이 직종에 몸담고 있는 이상 절대 쓸 수 없다. ㅠ.ㅠ)
내가 두고 온 상하이 한인사회의 뒷소식도 듣고, 예전에는 세세히 몰랐던 그녀의 과거(헉, 노동운동 종사자였더군!)도 따라가보고......
이렇게 깊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떠들썩한 회식자리보다 일대일 만남이 좋은 거다. 덕분에 즐거웠던 일주일이었다.
이 친구가 머물고 있는 동안 다른 친구들이 오겠다고 했을 때, 불편함 없이 서로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살짝 염려했지만
마치 집 주인처럼 '응대'하는 걸 보니 (내가 알기로 좀 까칠했던) 이 친구도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같이 어울려 더 풍성했던 시간이었다.
실습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날, 하루를 비워 굳이 땅을 파겠다고 한다. 쥔장은 새로 온 손님들과 놀러나간다는데......
돌아와보니 몇 군데에 흩어져 있던 꽃들을 꽃밭 쪽으로 옮겨심어놓고
잡초넝쿨 속에 숨어있어 나도 몰랐던 시금치들을 발견! 대여섯 번은 먹을 만한 양을 수확해놓았더군.
다음 실습 때의 숙박을 확보하기 위한 보험이라는데 너의 훌륭한 매너가 이미 크게 보험을 들어놓았으니.... Mi casa Su casa!
18일에 우리집을 찾은 내외는 25년지기다.
남편이 감옥에 들락날락하던 1990년대초, 동네에 비슷한 이웃들이 많이 살았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세상이 휙휙 변해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던 때였다.
아내와 나는 먹고살기 위해 방문학습지 교사를 했었다. 남편과는 영어학원 동기였고. ㅋㅋ http://blog.daum.net/corrymagic/1877232
그 와중에도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겠다고 여섯 가족 30여 명이 시골집을 찾아가 3박4일 즐거운 북새통을 벌이기도 했다.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던 꽃같은 시절이었다.
우리는 중국으로 떠났고 부부는 교사가 되어 서로의 소식을 바람결에 전해 들으며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제주로 이사하기 며칠 전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20년 전의 그 목소리 그 말투 그대로.
겨울방학을 맞아 6일부터 20일까지 제주에 머문다길래 우리집으로 오라고 했더니 제주를 한 바퀴 일주할 거라고 서쪽으로 가서 연락하겠다고 한다.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서먹하진 않을까. '응대'가 필요할까?
공연한 사설로 포스팅이 너무 길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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