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애월리 四季

빈 밭의 다이나믹스

張萬玉 2015. 6. 16. 10:50

엄동설한에도 굴하지 않고 겨우 몇 송이 목숨을 부지하며 빈 집을 지키고 있던 금잔화.

봄비를 맞으며 더 진한 주황색 꽃등불을 피워올려 나를 감동시키더니

4월 중순 들어서자 제 영역이라고 정해준 구역을 넘어 채소밭 여기저기까지 침범하며 전성기를 구가......(이 무렵이 우리 마당이 가장 화려했을 때)

헌데 5월말에 들어서자 정말 어느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폭삭 늙어버렸다.

무성한 잎이 말라비틀어지자 드러나는 징글맞은 木質의 종아리, 누렇게 쪼그라든 얼굴들......유한한 생명의 말로란 이런 것이었다. 흑흑...

그냥 놔두자니 내년 봄에 더 무서운 기세로 덮쳐올 것 같아 일단 쑥쑥 뽑아서 담장 아래 쌓으니 장작더미 쌓아놓은 것처럼 수북하다.

참 이상도 하다 그 어마어마한 부피가 빠져나간 화단은 잔치가 끝난 뒤처럼 휑하긴 한데 묘한 안정감을 주니 말이다.

그녀석들 기가 너무 쎘던 거야, 주인의 기를 압도할 정도로.. ㅋㅋ

 

헌데 그 빈 밭을 다시 채우기 시작하는 녀석들.... 보름이 지난 요즘은 버베나가  제 세상을 만나 화단을 온통 뻘겋게 태우고 있다.

지금의 기세로 봐선 사계절 내내 끝모르게 번져갈 것 같은데, 이 녀석들의 말로는 어떨지 정말 궁금하다.

 

어허라, 얘네들 좀 봐라. 지 에미가 떠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또 올라온다.

한 개체의 생은 유한해 보였지만 그 생명은 몸을 바꾸어 다시 나의 밭으로 돌아왔다. 

'나'라는 개체에 집착하는 것은 거시적으로 볼 때 유아적인 생각일 터. 

 

 

그리고 요 이상한 녀석은 뭐냐, 난 종류인 모양인데, 멋대가리 없이 기다란 모가지에 퉁퉁 불어난 굵직한 봉오리 하나 달고 올라오더니

한순간에 터지면서 여러 송이의 베이비페이스를 내놓는다.

바로 옆에 있던 자란의 꽃봉오리는 한 일주일 머물다 떠나갔다.

 

      

처음엔 노랗게 시작하던 수국 꽃이 진분홍으로 변해가고, 걔 옆엔 언제 올라왔는지도 모르는 보랏빛 수국이 연분홍 꽃잎을 피워낸다.   

이 녀석들도 해를 거듭하며 널리 번져갈 것 같다.

 

일찌감치 보내버려야 했던 녀석들이 또 있었다.

채 먹지도 못했는데 꽃대가 올라오면서 재빨리 늙어버린 녀석들이다. 

 

1번타자 청경채. 싱싱할 때 겉잎을 떼어 내 중국 살 때 해먹던 것처럼 표고와 함께 볶아서 두세 번 먹었나?

그러고 나니 꽃이 올라왔다. 모종 열두 개 심은 것 모두 뽑아 된장국거리 용으로 데쳐놓았다.

나만 먹은 건 아니다. 새도 먹었다. 그것도 엄청 많이...

겨우 한 달 간의 동거였다. 다음엔 이거 안 심는다. ㅋㅋ

 

2번타자 치커리

상추쌈에 샐러드에 열심히 끼워넣었지만 그래봐야 몇 잎 들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갈무리도 안 되는 식물인지라

허리까지 올라올 정도로 키우다가 너무 억세진 것을 확인하고 뽑아버렸다.

심을 때는 여리기 한량없는 녀석이었는데 늙으니 목질화된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ㅠ.ㅠ

이 씁쓸한 녀석을 얼마나 먹겠다고 모종을 열두 개나 심었다냐. 한 포기만 해도 충분하다.

 

3번타자 쑥갓

딱 두 개 심었는데 열 포기 넘게 번졌고, 역시 몇 번 먹어볼 사이도 없이 꽃을 내보냈다.

꽃 보는 재미로 놔두지만 머잖아 정리해고해야 할 녀석들.

 

겨울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늙는 기미 없이 싱싱한 먹을거리를 계속 공급해주는 건 상추와 부추.

원래 두 포기인 줄 알았던 상추는 지금 당당한 다섯 포기가 됐고, 그 포기에 붙어 옆으로 포기를 내려고 기를 쓰는 녀석들도 한둘이 아니다.

도대체 저 상추의 일생은 어떻게 되는 건지 매우 궁금하다.   

 부추 역시 마찬가지. 베어먹어도 먹어도 계속 올라온다. 이웃들에게 가장 많이 가장 자신있게 나눠주는 품목. ^^

이 대열에 깻잎도 합류했다. 순 따서 나물해먹고 먼저 크는 놈 따서 풋절이 해먹고 여기저기 넣어 먹고...

그러고도 여전히 싱그럽게 성장중이다. 녀석도 언젠가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내겠지.

 

씨 뿌려 키운 얼갈이배추와 열무도 갑자기 꽃을 내는 바람에 기념사진 한 장 찍을 새 없이 수확을 해버렸다.

열매 맺는 자식들 못지 않게 짠한 자식들이 씨뿌려 얻은 자식들이다.

훅 불면 날아갈 좁쌀만한 씨앗 속에 어떻게 그런 힘이 깃들어 있는지....

그 무거운 땅을 뚫고 나오는 것도 신기하고, 솎아줄 때 보이는 실낱같은 뿌리들도 신기하고...결국은 우깃우깃 올라와 싱싱한 속살을 마음껏 뽐내는 녀석들.

수확을 하고 나면 꼭 다 큰 자식들 출가시키는 듯 시원섭섭하다. 

 

 

요즘 내가 애지중지하는 녀석들이다. 가지, 토마토, 고추... 열매 맺는 녀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제일 재밌는 것 같다.

인삼과립 물에 타서 준 게 효과가 있는 건지 때가 되어서 그런 건지 두어 주일 사이에 키도 훌쩍 크고 무려 열매까지 조롱조롱 달고 있다.

자식바보처럼 뿌듯한 마음을 어디가서 털어놔야 할지 모르던 중, 남의 밭에 가보니 에구....화학비료 먹고 자란 이 밭 고추들은 청년이네.

식물을 잘 키우려면 비료가 관건인데, 닭똥이라도 구해다가 썩여볼까 하다가도 그노무 벌레랑 냄새 무서워 엄두를 못내겠고(앞집 할머니 야단하신다)

농협에서 파는 퇴비라도 좀 사다줘볼까 궁리중이다.

 

  

부록 : 내가 심지도 않았건만 어디선가 쑥숙 올라와 꽃까지 보여주는 신기한 녀석들.

작년에 사시던 할머니가 여기에 호박 속을 버리셨던 건지... 무슨 호박인지도 모른다.

내가 심은 호박씨 몇 알은 기별이 없는데 말이지. 아무튼 열매 볼 날이 기다려진다.

처음엔 겨우 두세 군데에서 모습을 보이던 방풍이 밭 구석구석에 번져가더니 드디어 꽃을 피웠다.

좋은 거라고 많이 먹으라고들 했는데 어쩌다 한 번씩 쌈 싸먹고 나물 둬번 무쳐먹고 나니 끝났다. 부지런 떨어서 장아찌나 좀 담아두는 건데...

도라지는 사시던 할머니가 묻어놓으신 건데 땅속 사정은 모르겠고 땅 위로는 허리 높이까지 꽃대가 올라왔다. 곧 꽃망울이 터지겠다.

 

에휴, 열무랑 얼가리배추를 수확하고 나니 밭이 휑해졌다.

이것저것 다 털고 내려와 있는 나를 보는 기분이다.

겉보기엔 비어 있는 밭이지만 저 땅 속은 새로운 생명활동으로 엄청 분주하겠지.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는 잡초 뿌리들로부터 달팽이 굼벵이 지렁이 이름 모르는 별별 벌레들까지.......

내 속에도 아직 뭔가 남아 있을까?

 

토마토, 가지, 고추, 근대, 상추, 깻잎이 아직 남아 있지만 빈 밭이 너무 넓어서 다시 뭐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뭘 심지?

새로 시작한다는 건 새로운 정성을 각오해야 한다는 건데, 아... 유월의 태양은 너무 뜨겁고 밭에 모기도 너무 많다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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