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터키 7-1 : 안탈랴 / 여행자거리와 숙소

張萬玉 2017. 10. 7. 01:04

같은 아홉 시간 장거리버스라도 터키에선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건 드라마틱한 창밖 풍경, 그 풍경이 자극해주는 영혼의 어느 지점...
그러나 카파도키아에서 콘야까지 오는 길은 그저 밋밋한 평원이라 어쩔 수 없이 버스가 제공하는 빈약한 미디어에 의지했다.

지난 여정에서는 포기했던(자막도 없이 터키어로 더빙되어 나오니 이해불가) 영화 두 편을 끈덕지게 봐냈다. 하나는 beast of no nation 또 하나는 big eye. (이거 한국에서도 개봉됐던 영화인 것 같은데, 한국 타이틀로는 뭔지?)
음악이 좋으면 음악만 들어도 충분할 텐데 거의 클럽 음악이라 10분만 들으면 질려버린다. (Bruno Mars나 Daft punk 등 귀에 익은 곡도 좀 있지만 거의 라틴계 아니면 터키곡) 콘야부터는 다행히도 창밖 산악극장....
버스가 자주 서는 편인데, 경유 도시 터미널에서 서는 것은 10분, 휴게소에 서는 것은 30분이다.

터키어로 말하니 처음엔 몇 분 서는지 몰라서 같은 버스 탄 사람들만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젠 감이 잡혀서 내 발 가자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와도 된다.


터키 와서 처음으로 불쾌한 경험을 했다. 안탈랴 오는 길 마지막 구간 산 속 휴게소에서다. T 뭐시기로 시작하는 지명이었는데...

홍차 한 잔 마시고 가져다준 종업원에게 물었더니 3리라란다. 대도시 이스탄불에서도 2리라를 넘지 않고 말만 잘하면 공짜로도 주는데... 산속이라 그런가 하고 카운터에 가서 3리라를 내미니 1유로란다. 유로 없다니까 4리라를 내라는 거다. 이런 도둑놈들... (한두 푼 갖고 욕이 너무 과한가? ㅋㅋ)
당장 종업원을 데리고 홍차 마시고 있는 다른사람에게 가서 너 얼마 주고 마시는 거냐고 물으니 2리라란다.
거봐라 요놈들아! 보란듯이 1리라 동전 두 개를 쥐어주고 나오는데 어찌나 통쾌하던지... 내가 터키말을 못할 뿐이지 바보는 아니거등!

근데..자백하자면... 최근 들어 부쩍 바보짓이 잦다.
어제 로즈밸리 투어 하면서 모자를 차 안에 두고 내렸다. 그걸론 부족했는지.....안탈랴에 도착해서 가방을 푸는데 여왕의 침실 열쇠가 나오네. 이걸 어째!
두고 와야 할 껀 가져오고 가져와야 할 껀 두고 오고.... 집에 갈 때가 되어가나보다. ㅎㅎ



가장 종교적인 도시라는 콘야. 잠시 내려서 하루 묵어갈까 하다가 너무 큰 도시 같아서 참았다.





안틸랴는 예상보다 큰 도시였고, 여행자들이 주로 머무는 곳은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관광 지역.

엄청나게 큰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트램으로 바꿔타고 열 정거장 정도 가서 내려 다시 '히드리아스의 문'을 지나서.... 여행자 숙소가 즐비한 골목으로.





새 우는 작은 정원이 있는....내가 원하던 바로 그 숙소.
단점은 와이파이가 션찮다는 건데...옛날 생각하면 뭐 이 정도도 황송하지.



햇볕 좋은 정원에서 즐기는 조식. 주인 아저씨도 친절하고 숙박손님들끼리도 쉽게 모여 잡담하는 분위기 좋은 숙소 Lazer Pension 강추.





집 떠난 지 3주 만에 대대적인 빨래를 할....수가 없어서 백만 년 만에 빨래 서비스 맡기고 골목 탐방에 나섰다.

한국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진 숙소 시벨 판시온이 같은 골목에 있었다.




이 동네의 랜드마크, 오래된 미나레









이 동네 해변에서는 별로 바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한 레스토랑이 개발한 몇백 미터 정도의 해변 외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 아래 바다인데 입장료 15리라  내고 절벽에 걸린 다리를 걸어내려가 입장하는 순간부터 인근 공원과 방파제에서 노는 사람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게 될 것 같아서... ㅎㅎ


해변에서 시내쪽으로 가는 골목에는 으리번쩍한 호텔과 Bar가 즐비하다.

고성 같은 곳에 차려진 럭셔리 바. 밤에 다시 와서 와인 한 잔 했는데 좀 마이 비쌌다.




숙소 아랫동네 쪽으로는 동네 사람들이 와서 노는 해변공원이 있고 가는 길에는 로컬 마켓들이 즐비하다.














잃어버린 모자를 대신할 모자를 하나 샀는데 왠지 바가지 쓴 기분이다. 자갈바닥인 바다에서 놀겠다고 싸구려 (밖에 없어서) 아쿠아슈즈도 한 켤레 샀는데 한 번이나 쓰려나 모르겠다. 지나는 길목마다 니 하오 불러대고 앉아있기만 하면 다가와 친한 척 하는 게 좀 성가시다. 다른 도시들에 비해 정말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 좀 유감이다. 지갑이 눈에 띄게 얇아지는데 암만 돌이켜봐도 뭘 했는지 모르겠는 것도 기분 나쁘다.

그래도 이 도시에서는내 마음을 움직이는 풍성한 부겐베리야와 아이비로 덮인 멋진 골목길이 있다.



저녁은 주로 옆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숙소 앞 골목 바에서 만나 친구가 된 동갑내기 메리가 묵고 있는 호텔이다.

음식도 잘 하지만 매년 여름을 이곳에서 난다는 재미있는 유럽 노인들이 만드는 흥겨운 분위기가 매일 저녁 나를 불러내었다.

메리와 지나간 남자들 얘기를 안주삼아 에페스 맥주 한 병 비우는 재미도 쏠쏠하고.








소설 한 편 써볼까.


당시 여행중이었던 그녀는 태국 어느 해변에서 미소가 고운 청년을 만났다. 두 사람 다 장기배낭여행자였기에 맥주 한 잔 앞에 놓고 서로의 여행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기약없이 헤어졌단다. 그러나 이틀 뒤 어느 식당에서 다시 마주친 그들 사이에선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북서쪽으로 또 한사람은 남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26세, 그는 23세....약속할 만한 것이 별로 없던 그들은 아쉬운 작별과 함께 한동안 바다를 건너다니는 편지로 연락을 이어갔다. 그녀가 보여주는 명함판 흑백사진 속의 그는 정말 미소가 안개꽃처럼 고운 여린 청년이었다.


어느새 8년이 흘렀고 그 사이 세월을 못 이긴 연락은 끊겼고 그녀는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되었다. 어느날 그의 나라에서 온 담당자들을 집으로 불러 간단한 파티를 열어주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여행 사진들로 꾸며져 있는 그녀의 벽에 붙은 그의 사진을 발견하고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했다.

연락처를 받아놓긴 했지만 그녀에겐 당시 애인이 있었고 임신 3개월째...그 역시 가정을 꾸렸다고 했다. 그리고 2년 뒤.
출장으로 그의 나라,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 가게 된 그녀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출장 일정도 그렇고 서로 가정이 있는 처지이니 목소리나 들으려고. 그러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억 저편에 숨어 있었던 옛 감정이 되살아났고 그들은 두 시간 넘도록 전화통을 놓지 못했다.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다시 오랜 이별.


30년이 흐른 뒤 그가 그녀를 페이스북에서 찾아냈다. 퇴직하고 직업에서 자유로워진 그녀가 그를 만나러 천릿길을 날아갔다. 그녀는 오래 전 애인과 헤어지고 이십 년 가까이 싱글맘으로 살았고 그도 이혼한 상태..... 비로소 그들은 둘만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게 되었다. 1년의 반은 그의 나라에서, 나머지 반은 그녀의 나라에서 함께 지내며, 여행 스타일이 달라 가끔은 따로 여행을 즐기기도 하는 그들. 예전의 불꽃 튀던 시절 같지는 않아도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소울메이트임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최근 사진 속의 그는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깊지만 40여년 전 흑백사진 속의 그 미소를 고스란히 간직한 23세 청년의 얼굴 그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