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공항 도착시간이 밤 9시 20분이라 숙소 도착이 어느 정도 늦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공항 지하철이 30분에 한 대일 줄은, 그리고 그 열차가 딱 1분전에 떠나버렸을 줄은 예상 못했다. 플랫폼에서 11시 넘어 출발하여 신타그마역에서 한 차례 환승, 오모니아 역에 도착하니 시계는 어느덧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숙소 찾기 퍼즐을 풀 차례인데....
앞서도 말했듯 가이드북에서 소개하는 숙소는 맵북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찾기 쉽지만 우리는 웹사이트에서 프로모션을 하는 숙소를 골랐기 때문에 주소를 가지고 알아서 찾아가야 한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게 방향 잡는 일인데 이게 한번 헷갈리기 시작하면 미로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자정이 넘으니 광장엔 사람도 드물고 그 광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숙소가 있는 거리를 모르고 (불과 200미터도 안 되는 곳인데)....
진땀 바가지로 흘리며 쓸모없는 다리품 1킬로 이상 판 끝에 도착한 호텔에선... 물 안 나오는 화장실이 기다리고 있었다.(이하 생략)
천장에 걸린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불면의 밤을 보낸 다음날, 개운찮은 몸을 이끌고 아크로폴리스에 가기 위해 신타그마 광장으로 나왔다.
지하철역 입구에 송아지 만한 개 세 마리가 목줄도 없이 늘어지게 자고 있길래 오뉴월 개팔자로구나, 하면서 휴대폰을 겨누었는데....
순간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 짖기 시작하니까 세 마리가 다 일어나 일제히 짖으며 덤벼든다.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기에 계단 위로 일단 피신하긴 했지만 종아리 뒤쪽을 살짝 물렸다. 콱!은 아니었지만 워낙 큰 녀석이라 이빨자국과 멍을 남겼고 바지도 두 군데나 찢어졌다.
나도 놀랐지만 개를 무서워하는 후배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병원부터 가야 한다고 성화였지만 내가 보니 이빨이 스친 정도라 소독만 잘 하면 될 것 같았다.
그 이른 시간에 문 연 병원도 없을 것이고 외국인이라고 과잉진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너무 짧은 아테네에서의 시간을 잘라먹는 것도 아깝고 해서 약국에 가 소독약과 피부재생연고를 사서 응급처치를 했다. 혹시 내가 게거품을 물거나 눈빛이 이상해지면 얼른 병원으로 후송하라는 농담으로 놀란 후배를 진정시킬 만큼,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천연덕스러웠던 순간. 평소에 쌓아온 개와의 우정 때문인가? ㅋㅋ
길거리 경찰에게 상처를 보여주며 저 개들좀 치우라고 항의하니 자기는 그럴 권한이 없다면서 경찰서에 가서 정식으로 신고하란다. 보아하니 지하철 입구에서 노숙하며 구걸하는 할아버지의 개들 같은데, 한 이틀 두고 보니 광장 이곳저곳을 떼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하고 다닌다. 그 상황을 당국도 모르는 바 아닐 텐데....개를 사랑하는 나로서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아테네에서 나쁜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섬과는 달리) 사무적인 사람들, 엄청난 쓰레기더미, 슬럼화된 뒷골목, 교통체증 등등 실망스러운 도시의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를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로 기록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아크로폴리스!(그리고 아크로폴리스에서 출토된 무수한 유물들로 꾸며져 있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땡볕이라도 좋았다. 사람이 들끓어도 상관없었다.
6000년 전의 그들이 바라보았을 하늘과 땅과 벌판에서 그들이 만졌을 대리석 건축물들을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자고 이 멋진 집들을 이렇게 많이 지어놓고 어쩌자고 그 멋진 이야기들을 그리도 많이 남겨서 나를 이토록 탈진하게 만드느냐고...ㅋㅋㅋ(아크로폴리스 사진은 다음 포스팅으로...)
아크로폴리스에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국립정원에 갔더니 구척장신 아름드리 나무들이 만든 시원한 숲이 반겨주었다.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은 뜻밖의 '숲속 음악회'. 무려 아테네 시립 오케스트라가 출동하셔서 1시간 동안 무도회의 권유 등 대중적인 오페라들의 서곡을 메들리로 들려주었다. 이어 트럼펫과 섹스폰이 중심이 된 재즈 합주단이 등장 분위기를 돋구었고, 냉정하게만 느껴졌던 아테네 시민들이 리듬에 몸을 맡기며 흥겨워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섬에서 맛보았던 그리스 사람들의 인간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저녁 숲의 싱그러움, 그 향기처럼 얼굴에서 얼굴로 번지는 행복한 미소.
수니온 버스 정류장을 찾으러가는 길에 대규모 시위대를 만났다. 청소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시위였다. 전국에서 모인 대표들과 아테네 시청 소속 노동자들로 조직된 만여 명 정도의 시위라고 했다. 글씨도 모두 수학공식이고 시위대에 영어 하는 사람도 없어서 겨우 그 정도 알아내는 데만도 몇십 분이 걸렸으니 연대와 지지를 표시하고 싶어도 언감생심.. ㅋㅋ
파란만장 1박2일의 마지막은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번에 회복시켜준 고국의 음식.
신타그마 광장에서 국회의사당 바라보고 뒷쪽 오른편 골목동네, 아시아식당들이 모여있는 지역에 있는 한국식당 '도시락'. 14년째 영업중이라고 한다. 외국이라고 얼치기로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한국음식이다. 오징어볶음 강추!
새벽 기차 타고 칼람바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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