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민 VS 유목민 시리즈를 쓰다 보니 예전에 끄적거려둔 글이 생각났다.
(자나깨나 이렇게 파파걸 컴플렉스에 시달린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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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20/30대 여성들에게는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독립선언' 어쩌구 하는 얘기가 그저 식상한 화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였던 50/60대도 아니고, '직업은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고 믿고 있는 20/30대 사이에 끼인 어정쩡한 40대의 뒤늦은 자각과 회한이라면.... 자못 절실한 측면이 있다.
얼마전에 한국영화 '싱글즈'를 보았다. 어느 잡지 영화평에서 '동침의 올바른 전제'라는 거창한 제목이 달린 것을 흘낏 봤길래 성윤리에 관한 새로운 주장을 다룬 영화인가 했는데 이미 매스컴이 앞장서서 너무 많은 것을 떠들어댄 지금 그 대목은 그다지 새삼스러울 게 없었고.... 다만 정진영이 직장을 놓지 않 으려고 결혼을 미루던 공항의 이별장면이 자꾸 생각난다.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고, 이것이 내 일인지도 모르겠고, 잘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다지 근사하게 보이지도 않는 '나의 일'을 위해 결혼을 미루는 싱글즈... (미혼모 얘기는 극적효과를 위해 좀 어거지로 삽입된 에피소드이지만 역시 주제는 마찬가지라 치고..) 자기 볼일을 남에게 시키는 기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한때의 실수와 자기 미래를 거래할 수 없다고 한다. 대단한 아가씨들이다. 영화속 이름이 잘 생각 안 나니 그저 엄정화와 장진영이라고 해두자...
그들이 말하는 자신의 볼일, 자신의 미래라는 것이 실상은 별볼일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모르는 치기라 할지라도.... 40대 중반에 서 있는 내 눈에는 그 야무진 마음가짐들이 너무나 값지게 보인다.
나는 뭐가 되고 싶었을까.. 꿈이라는 게 과연 있기나 했던가? 그리고 그 꿈의 길을 침로해 들어가기 위해 고민하던 과정이 성장기에 있기나 했던가.. 억지로 기억을 더듬어보면....어렸을 때 선명회 같은 어린이합창단 지휘자가 되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고 싶었고....중학교 시절에는 음악다방 디제이를 해보고 싶었다. 그 외에는 무엇이 되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아왔던 것 같다. 아무리 한국땅에서 여자아이로 키워졌다지만 이 여자아이는 자기 인생에 대해 어쩌면 그렇게 책임감이 없었을까..
그나마 나를 자주성 있는 여자라고 오해하고 있는 남편 덕에 독립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내팽겨쳐버리지 않을 수 있었고, 주어진 기회를 외면하지 않고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독립의 전제조건인 배짱과 근성의 부족은 늘 나를 따라다니는 열등감이다. 파파걸 콤플렉스라고나 할까...
싱글즈의 마지막 대사는 이것이다. 아직 이룬 것은 하나 없다. 그러나 문제도 아직 없다.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 대해 때이른 걱정은 안 하겠다. 문제는 해결방법과 함께 다가오는 법이니까...
웬일로 상하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다. 달리는 창가에 내리는 눈꽃처럼 허무한 꿈일지라도(하하.. 내가 좋아하는 이치현의 노래가사다) 오늘은 꿈꾸고 싶다. 정말 별볼일 없을지 모르지만 내 힘으로 꾸려나가는 나만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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