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上海通信(舊)

중국에서 추석 쇠기

張萬玉 2005. 9. 14. 08:04

중국에서도 추석은 전통명절이긴 하지만 5월 1일 노동절이나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일에 비해 크게 쇠지 않는다. 마치 '청년절', '부녀절', '아동절', '소비자 권익보호의 날'처럼 '농업사회의 전통명절이었던 농민절' 정도의 의미로 지나기 때문에 학교도 일터도 쉬지 않으니 정신없이 바쁜 날은 그날이 추석이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기 십상이다.

 

추석특집 제2탄... ^^  (역시 2003년에 써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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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 저녁인데 여느때처럼 퇴근하고 보니 뭐 이벤트 벌일 엄두도 안 나고 그냥 맹숭맹숭 지나기도 좀 섭섭하다.

그저 산책이나 할까 싶어 집을 나섰다가 계림공원에서 추석맞이 시낭송회가 열린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침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갑작스런 태풍예보에 쓸려가고 가을바람이 살랑거리는 쾌적한 밤이다.

 

계림공원에 도착하니 담장에는 화려한 색등이 주렁주렁 걸리고 길가에는 차들이 지나갈 틈 없이 주차되어 있어 '뭔가'가 있음을 예고한다. 공원 입구는 唐裝(당나라 때 복장-비단에 수놓은 차이나칼라의 윗도리)을 차려입고 희희낙락 공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자그마치 100원이나 되는 입장료 때문에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입장료가 생각보다 비싸 나도 잠깐 망설였지만 추석이니 뭔가 색다른 것이 있겠지 싶어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는 깜빡깜빡 요란한 색등과 당장을 차려입은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춤추며 손님들을 맞는다. 과장된 화장에 눈을 치뜨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작이 오늘같은 날은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이날 행사의 이름은 唐韻中秋


입구에서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손님들에게 선물바구니를 나누어준다.
전지를 넣고 켜게 되어 있는 전통 홍등과 노란 비단으로 싼 계화주 한 병, 당나라 때 쓰던 엽전 네 냥, 당시가 적힌 손바닥 반 만한 시집이 들어 있다.

엽전의 용도는 놀이에 참가할 때 쓰는 것인데 나는 영문도 모르고 노란공 뽑기 게임에서 네 개를 모두 써버렸다(확률이 1/4이므로 한 개가 당첨되어 계화주 한 병 더 받았음). 그 외에도 북을 울려 그 소리가 몇 분간 지속되면 상을 받는 게임(현종 때 하던 게임이라고 함)과 수수께끼 맞추기 게임도 있다.
수수께끼 맞추기 게임은 수수께끼를 적은 조그만 비단부채를 줄에 매달아놓고 뒷면에 쓰인 수수께끼를 맞추면 그 부채를 갖는 것인데 전통방식이라고 한다.


 

이 행사의 주요 이벤트인 공연이 두 군데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당시 낭송회.
이 모임의 참가자는 주로 학식 있어 보이는 노인들이다. 100여명 가량 되어 보인다.
잔디밭에 흰 플라스틱 의자와 탁자를 놓아 차를 마시며 감상하도록 준비된 이 낭송회는 시작 전 30분 정도 중국 고전악기 삼중주 연주회로 먼저 분위기를 돋군다. 연주자들도 모두 60대로 보이는데 솜씨가 수준급이다. 이어서 고령의 노인들이 떨리는 음성으로 당시를 읊기 시작한다.

 



중국어라서 시 읊는 소리가 더 예술인 것 같다. 과장된 성조에 운율이 저절로 실린다.
한쪽에서는 즉석에서 붓글씨로 시를 써서 전문가들에게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시가 너무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녹차를 마시며 앉아 있으니 덩달아 문향에 젖는 기분이다. 성인이 된 후로 시낭송회 같은 데 가본 적이 없으니 한국의 시낭송회에 가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진다. 특히 가야금 울리고 시조를 읊는 시조낭송회라면?

또하나의 공연은 대중적인 종합무대다.

내가 시낭송회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갔더니 이미 프로그램이 절반은 지나 있었다. 중국에 살면 지겹도록 보는 미녀들의 춤과 전통의상 패션쇼, 가수들의 노래... 靑春舞跳(!) 힙합과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흔들며 미친듯이 활을 그어대는 전자바이올린 연주까지 끼어들었다. 추석상에는 좀 안 어울리는 음식이지만 관중석의 환호는 대단했다.




공원 곳곳에는 월병과 강정류, 각종 차와 술이 준비된 야외다방이 차려져 있고 훈뚠과 군만두, 꼬치 등등 각종 간식거리를 파는 곳도 손님들을 부른다. 어두운 숲속에서 뽀뽀하는 커플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날이 흐려 달은 볼 수 없었지만 모두들 추석날 저녁을 즐기고 있다.

 

원래 이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당장을 입어야 하고 없는 사람은 대여하는 곳에서 빌려라도 입어야 입장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절반 이상이 편한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나온 사람들이다. 가끔 당장을 차려입은 서양인들도 눈에 띄고 어느 방송국에선가 취재나온 기자들도 카메라 메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두 시간쯤 있다 먼저 공원을 빠져나오는데 굉음과 함께 불꽃이 올라간다. 그럼 그렇지, 명절에 폭죽이 빠지면 중국이 아니다.
풍성하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나도 중국식 중추절을 즐기고 있다.

 

20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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