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 연휴를 즐기는 인파를 헤치고 '손님'이 되어버린 남편을 '접대'하자니 뾰쪽한 수가 나질 않아 여행사 패키지를 이용하기로 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3년 전 혼자 한국에 다니러 왔을 때 친구랑 보성차밭-선암사-낙안읍성 무박2일 패키지를 이용해본 경험이 괜찮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정동진-대관령 양떼목장-허브나라-펜션숙박-남이섬 코스.
실버상품 냄새가 물씬 풍기긴 해도 오랜만에 가족끼리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다녀온 뒤에 계산기를 두들겨보니, 두 사람 정도까지는 합리적이지만 세 사람 이상이면 직접 다니는 게 더 싸게 먹혔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차량이 없으니 그렇게 여러군데 돌지는 못했겠지. 한번에 여러 군데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간만에 '관광객'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중국에서 경험한 패키지와 비교해보는 기회도 되었고...
밤새 퍼붓던 비가 아침에도 그치지 않았지만 오전중에 개겠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길을 나선 시각은 새벽 여섯 시 반. 간밤에 새벽 두 시도 넘어서 술에 절어 들어온 남편은 투어버스에 앉자마자 코를 곤다. 완전히 '끌려가는' 형국이다.
버스에 탑승한 인원은 기사와 가이드 포함 35명. 버스투어는 일단 좌석이 편해야 하는데 보통 45인승으로 뽑는 대형버스에 37석을 앉혔으니, 등받이 제끼는 공간도 충분하고 발디딤대도 어느정도 높이까지 올릴 수 있어 장롱다리들에게 더없이 쾌적한 환경이다. ^^
예상했던 것만큼 길이 막히지 않아 강릉까지 세 시간에 주파.... 곧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웬만하면 한번씩들 다녀간다는 정동진이지만 우리 가족은 초행길.
바닷가를 끼고 있는 역이라니!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그러나 솔직이 좀 실망했다. '모래시계' 로 유명세를 탄 덕분에 분위기 있는 시골역이 장터로 변한 것이 여엉~.... 하지만 관광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칭찬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중국사람 다 됐구나...ㅎㅎ)
비오는 바닷가의 느낌은 좋았는데....
헉, 배가 산으로 올라가다니....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얕은 언덕에 우뚝 선 선크루즈 호텔이다.
'고현정 소나무'보다 더 확실하게 정동진의 기억으로 남을 만한 기상천외의 건물...ㅋㅋㅋ
다음 행선지인 양떼목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황태국 백반을 먹었다. 황태국이라기보다는 황태두부국... 아니 부스러기 황태로 맛을 낸 두부국이라고 해야 맞을 듯.... 그래도 풍성한 산나물 서비스로 손님들을 만족시킨 밥상.
버스는 대관령 자락에 있는 양떼목장으로 가기 위해 구불구불한 산길을 기어올라간다.
이 동네 산들은 이미 단풍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여전하여 목장길은 흙탕이다. 시야도 흐리고...
그러나 청신한 공기로 온몸을 씻으며 목장 정상을 향해 한발한발 걸어올라가는 이 상쾌함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정상 바로 아래 초원을 지키고 있는 멋진 소나무.
양떼목장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푸른 초원 위에 뭉게뭉게 구름처럼 피어난 하얀 양떼들을 연상할지 모르겠지만 천만의 말씀... 멀리서 보면 초원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은 웬 검은 돌덩이들이다. ^^
이 목장 양떼들의 용도가 털깎이용이 아니라 그런가보다. 가까이서 보면 양들이 꼭 대걸레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양들아,.미안!!)
이 목장의 수입은 축사에 있는 양에게 건초 먹이기 체험을 제공하고 받는 건초값 2500원과, 가끔 단체손님의 주문에 의한 양 바베큐 요리....(즉 이 농장 양 사육의 용도는 관상용과 식용이다)
축사에 있는 양들은 관광객들이 쉬지 않고 주는 건초를 끝도 없이 먹어대고 초원에 흩어진 양들은 모두 머리를 풀속에 쳐박고 있다. 먹고 먹고 또 먹고....
그런데 이 양 한 마리는 무슨 연고로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혼자 우울한 얼굴로 서 있다.
목장에서 비에 홈빡 젖어 내려오니 날이 거짓말처럼 개었다. (얄미워라!)
버스는 '메밀꽃 필 무렵'이면 엄청난 관광객을 모으는 봉평으로 접어들어 봉이가 김선달을 업고 건너던 강물을 건넌다. 길 옆에 너무나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연일 내린 비로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흰 파도가 부서지고 골짜기에서는 안개가 피어나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이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있는 허브농원.... 이름하여 '허브나라'. 우리는 여행사에서 나눠준 '테마여행' 목걸이 비자를 제시하고 당당하게 입경한다.
허브나라에 들어서니 은은한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정신마저 일순 맑아지는 기분이다.
허브는 5월부터 9월까지 꽃을 피운단다. 우리를 위해 아직 지지 않고 기다려준 꽃들에게 감사하며 한컷 한컷 카메라에 담아본다.
한련화라고 했지? 연꽃보다 연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연꽃의 일종인 것 같은데 허브 축에 끼어 있군.
허브농장 주인집 따님이 마침 미술대학 출신이라 허브농장 안에 있는 팻말들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아기자기한 허브정원만큼이나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팻말들도 허브나라의 큰 볼거리.
'허브'라는 단어도 모르고 살던 중국촌뜨기 남편은 감탄 연발.... 요즘 '블루오션 전략'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더니 바로 적용을 한다. "바로 이런 게 블루오션 전략이야!" ...
정말 그런지는 중국촌년인 나도 모르겠다. 듣기로 허브농장이 꽤 많다던데.... 이미 이 업종이 레드오션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여기서 잠깐! '중국촌년'이 아니라 '중국'촌년이라는 점에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특정지역을 비하하는 단어가 아니라 현지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는 얘깁니다. 제 블러그에는 중국분들이 가끔 오시니 혹시 오해하실까 해서 다급히 사족 한마디...^^)
구름을 피워올리는 깊은 산들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흥정계곡을 옆에 끼고... 게다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에는 문학의 향기를 사모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정말 최고의 입지조건이 아닐 수 없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니 숙소로 향하는 걸음이 바쁘다.
우리가 묵을 곳은 허브나라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깊은 숲속의 'May Fair'. 유럽풍 멋진 외관을 자랑하는 10평 정도의 원룸이다.
여행사에서 첫날 저녁식사와 둘째날 점심식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현지에서 대충 사먹을 요량이었는데 누군가가 펜션 안에 있는 레스토랑 음식이 시원치 않다는 '썰'을 퍼뜨리는 바람에 우리처럼 음식 준비를 안 해온 사람들이 잠시 차를 세우고 삼겹살과 상추를 사겠다고 한다. 얼떨결에 따라 내렸다가 그만 햇반과 삼겹살과 김치와 맥주와 과일을 사고 말았다. 뜰앞에서 구워먹을 수 있다길래 아직 초저녁이니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보니 바비큐 시설 이용하는 비용이 만 원이나 하는 데다가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단다. 에궁, 앓느니 죽지...
그래서 펜션에 구비된 프라이팬을 가지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는데.... 바비큐용 고기라고 엄청나게 두껍게 썰어준 덕분에 익히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겉이 탈까봐 불까지 약하게 해놓으니 몇점 놓고 제사 지내는 그 심정!
굽다가 굽다가 결국 남은 절반은 삶아가지고 김치에 말아 다시 살짝 구워먹었다. 양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아무튼 코에서 노린내가 날 때까지 먹었으니 2005년 가을밤의 징그러운 돼지고기 페스티벌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ㅎㅎ
펜션 옆 계곡 물소리에 눈을 뜨니 아침 여섯시 반.
산책을 나가니 우리팀 시니어 세 커플뿐이다. 역시 노인네들이야말로 진정한 아침형 인간! ㅋㅋ
자, 마지막 코스 남이섬이다. '겨울연가'를 느껴보려는 일본관광객이 줄을 잇는다고 들었는데 연휴 이틀째인 오늘은 한국관광객이 인산인해다. 남이섬으로 가는 유람선 선착장에 늘어선 줄이 장가계에서 케이블카 타려고 기다리던 줄보다 결코 짧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기다리는 시간은 30분도 채 안 걸렸으니 관리의 효율성 면에서 확실히 우리나라가 한수 위....
배용준과 최지우가 걸었던 메타세콰이어길의 옆모습.
메타세콰이어는 침엽수 모양을 하고 있지만 활엽수이기 때문에 가을이 깊어지면 은행잎처럼 노랗게 물들어 엄청 포토제닉한 풍경을 연출한단다. 이 길이 남이섬의 하이라이트인 모양인데, 단풍도 들지 않은 데다가 솜씨없는 아마추어가 찍다 보니 그닥 특징없는 전나무길이 나와버렸다.
삼각김밥만 있는 건 아니다. 삼각찻집도 있다.
목하 열애중...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런데 방해를 하고 있군!
서울로 돌아오니 청계천 물맞이 행사가 한창이다. 기념으로 한장 찍어두었다.
여행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잘 만든 로드무비 한편을 보고 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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