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트는 기미에 눈을 떠보니 여섯 시가 채 안 된 시각.
아직 자는 것 같은 블뤼 깨울까봐 혼자 살짝 빠져나와 어젯밤 그냥 지나친 해수탕 맛을 보러갔다.
해수욕장에서는 바닷물을 씻어내기 위해 필수적으로 민물샤워를 해야 하지만 해수 사우나에서는 비누도 쓰지 말고 때도 밀지 말고 해수탕의 해수도 민물로 씻지 말라는 얘길 들은 것 같다. 자신의 체지방이 피부를 윤기있게 해준다나?
으~ 웬지 찝찝한 기분이지만 암튼 샤워는 어제 했으니 그렇게 한번 해보기로 한다.
해수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한쪽 벽면 통유리를 통해 해뜨는 바다가 훤히 보인다. (이건 오사카에서 배타고 건너갈 때랑 똑같은 상황이잖아? 역시 탕 안에는 할머니 서너분밖에 없고..ㅎㅎ )
해수목욕이 체온을 약간 낮춰준대서 그런지 탕에서 나오니 날아갈 것 같다. 이 상쾌한 기분을 살려서 이번에는 7층에 있는 스카이라운지로...
문은 열려 있지만 예상대로 까페에는 아무도 없다.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은빛비늘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옥외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고 밖으로 나가본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어젯밤의 난장판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어촌은 정갈하고 부지런하게 새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개들이 짖어대고 '새마을 지도자들은 어디어디로 모여달라'는 동네방송이 울려퍼진다.
이제쯤 블뤼가 일어났을까 싶어 내려가보니 블뤼가 나를 찾아 얼마나 돌아다녔던지 발바닥이 부르틀 지경이란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안 자고 있었나벼.
원래는 영화 '축제'를 찍었던 해변에서 일출을 보기로 했었는데 이미 늦었으니... 근처 보성차밭에나 한번 들렀다가 강진으로 가기로 한다. 보성차밭은 나도 블뤼도 와본 곳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이른 시간에 가면 안개에 휩싸인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고들 하기에....
두번째로 와서 그런가 2004년 처음 왔을 때보다는 감흥이 덜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차밭... 중국 항주 서호변에 있는 용정차밭과는 또다른 아기자기하고 정갈한 분위기다. 듣기로, 이 무렵이 다향축제 기간이라던데 시간이 일러선지 그 악명높은 교통체증의 기미는커녕 카메라장비 메고 다니는 사람들 몇몇만 눈에 띌 뿐이다.
원래는 이곳에서 '茶'字가 들어간 스낵으로 간단히 아침요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식당들이 문을 열려면 아직도 먼 것 같다. 배고픔에 못견딘 우리는 차밭 한 바퀴 휙 돌기 무섭게 아침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아 율포해변 쪽으로 차머리를 돌린다. 블뤼가 시킨 그 녹차수제비... 진짜 맛있데? (같이 먹자고 나눠주는 걸로 성이 안 차서 다 뺏어먹고 싶었음. ㅎㅎ)
이제 강진으로 가야 하지만 이대로 떠나기는 좀 섭하니 아침에 가려다 못갔던 영화 '축제'의 촬영지에 잠깐 들르기로 했는데..... 요기서 발이(아니, 차바퀴가) 살짝 꼬였다.
블뤼 말에 따르면 '남포'라고 했는데 여기 사람들이 얘기하는 건 '회진'이다. 우리는 남포나 회진이나 거기가 거긴 줄 알고 아무튼 줄기차게 '이 근처에 영화 촬영한 데가 어디에요?'를 연발하며 국도와 지방도를 넘나들며 찾아갔는데.... 도착한 곳은 영화인지 연속극인지 암튼 '천년학'의 촬영지 부근. ㅡ.,ㅡ 다행히도 '이청준 생가'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어 우리의 실망을 달래주었다.
1970년대에 출판된 (지금은 모두 표지갈이 했음직한) '눈에 익은' 책들이 반가워 찍었는데....
메모리 공간 확보하느라 허접한 사진들 지우면서 아마 실수로 지운 모양이다. ㅜ.ㅜ
그럼 이제 해안을 낀 23번 국도를 따라 강진으로 가세.... 했는데..
블뤼가 조는 틈을 타서 2번 국도에 들어서버린 만옥이..... 네비게이션이란 놈 덕분이었다.
목적지를 '강진읍'이라고 세팅해놓았으니 이녀석은 빨리 가는 길을 찾아준 것이지. 한참 우회하는 해안도로를 선택하려면 '고려청자 도요지'나 '마량'으로 맞춰놓아야 했던 건데....
아무튼 왕복 사차선에 갓길까지 넉넉한 확 뚫린 도로를 달리면서도 왼쪽에 바다가 아니라 논밭이 계속되어 '이 길이 아닌개벼~'를 연발하고 있는데 블뤼가 깨어났다. "언니, 해안도로로 가자니까요... 그 길 땜에 장흥에서 시작한 거 아니었어요?"
그렇지, 사실 그 길 땜에 장흥으로 온 거 맞다. ㅡ.ㅡ
시간도 넉넉하겠다, 강진을 코앞에 둔 삼신리에서 18번 국도로 나오니 이게 바로 '삼천포로 빠지는' 거이지...ㅎㅎ
과연 마량 쪽으로 빠진 보람이 있었다. 푸른 바다와 붉은 산 사이에 펼쳐진 파란 하늘 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빠져드는 그 기분... 아스팔트면에 착 붙어 달리는 그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그러다가 신록이 정말 '야단법석'인 작은 산도 하나 넘고.... 결국 어디까지 갔다가 반환했더라? 계속 그 길을 따라가면 장흥이 나오니 어쨌든 어디선가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되밟는 수치를 감수.
장흥부터 강진까지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한 시간 정도 달릴 수 있다.
마량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전망대에서 본 바다.
강진읍에 들어선 것이 두 시가 좀 넘은 시각. 여행의 네번째 목적인 맛기행을 위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유명해진 '해태식당'을 찾아갔는데(강진군청 부근 버스터미널 뒤쪽 골목)..... 휴, 소문 듣던 대로 비.싸.군.
비싼 것도 비싼 거지만 이집 계산법이 좀 이상하다. 1인상은 2만5천 원이요 2인상은 6만원이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당연히 2인상은 5만원이어야 하지 않는가? 서빙하는 언니에게 물어도 웃기만 한다. 차라리 블뤼와 내가 따로 온 사람인 양 하고 각자 방 하나씩 차지하고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등등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국 같은 상에서 먹되 만 원은 슬쩍 빼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소문 내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처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주지 않을까 싶은데?
사진이 어째 푸르딩딩... 불타는 젓갈의 선명한 색상을 나타내주지 못해 입맛 도는 밥상을 보여주는 데 실패한 듯. ㅜ.ㅜ
허나 고급 한정식 상처럼 모양을 내진 않았어도 손맛이 입에 짝짝 붙는 맛난 밥상임은 확실...
<사진상으로는 확인이 잘 안 될 것 같아 메뉴를 일일히 열거해주는 센스>
고사리나물/취나물/두릅/죽순볶음/돌미나리무침/더덕무침
전어속젓/전어젓/토하젓
겉절이/묵은김치/열무물김치/파김치
광어회/문어데침/꼬막찜/새우찜/대합찜/해삼회/패주숙회/산낙지
야채전/생선전/장어구이/조기/삼합/육회/돼지갈비/불고기
된장찌게(총 30종)
도보로 10분 거리에 영랑생가가 있다 해서 잠깐 들렀다. 그 뒤에는 영랑이 어릴 때 한학을 배웠다는 琴書堂이 있는데 어느 그림 그리시는 분이 인수하여 잘 가꾸고 있는 이 서당의 아름다운 뜰에 서보니 강진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영랑 생가 내부. 외관은 잘 관리된 초가집이다.
마당에 깔린 너른 잔디가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잔디밭을 넓게 안 찍었군그래... ^^ )
작품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 금서당 내부
다음 행선지는 남녘교회. 블뤼가 어디선가 소문을 들었는지 꼭 한번 들러야겠다고 벼른 곳이다.
영랑생가에서 내려와 18번 국도를 따라 20여 분쯤 달리니 다산초당을 알려주는 팻말이 세 번쯤 나오는데, 아마 두 번째 팻말에서 좌회전했지 싶다. 교회로 들어가는 길목에 걸린 '아기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니 범상한 교회는 아니겠구나... 싶었다.
저 종탑은 땅끝 미황사에 범종이 없다 하여 남녘교회가 헌금의 일부를 보내주었더니 미황사에서 보답으로 세워준 것이라 한다. 교회 현판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다가 통혁당 사건으로 장기간 옥고를 치른 바 있는 신영복 선생님이 써주셨단다.
교회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곳..... 뭐하는 곳일까~요? (댓글 달아주세요)
남녘교회가 속해 있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고 최태용 목사가 1935년에 서양 선교사 중심의 기성 교단 체계를 비판하며 '복음적이고 생명적인 신앙, 학문적인 신학, 한국인 자신에 의한 교회'를 표방하고 창립한 교단이라고 한다. 교단의 이념에 맞게 교회당 안은 정말 한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교회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비싼 돈을 들여 치장을 한 그 어느 교회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노란 옥양목으로 지은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온 오후의 은은한 석양빛이 한국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강대상과 꽹과리를 비추고, 바닥에 깔린 소박한 깔개는 바닥생활에 익숙한 우리네 예배장면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정면에 걸린 그림은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그린 조르주 루오의 그림이다(원화는 아니겠지?) 시인이자 화가이자 가수이자 기인으로 알려진 전임(임의진) 목사님이 계실 때는 뒤틀린 십자가(소외된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의)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본당 뒤쪽으로 돌아가니 목사님 사택이다.
바쁘신 중에도 우리를 툇마루에 앉으라고 하시더니 손수 쑥차를 끓여 내오신다. 막걸리도 있는데 한잔 하겠냐고 하시는데 '운전 때문에....' 하고 손을 내저었지만 내심 아쉬웠다. ^^
왼쪽 : 목사님 사택 처마에 걸린 범상치 않은 등(클릭하면 등에 쓰인 메시지를 볼 수 있음).
오른쪽 : 지리산 실상사의 도법스님과 함께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의 일원으로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해 8000리길을 걸었던 이 교회 담임 김민해 목사님(7월 29일 중앙일보 기사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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