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눈을 뜨니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이 시간에 리아스식 해안이 아름답다는 세토나이카이를 꼭 보라고 했지.... 서둘러서 완전무장을 하고 갑판 위에 올라가니 아직도 깜깜한 한밤중인데 수평선을 타고 점점이 불빛들만 아련히 흘러가고 있다. 방송에서 여러번 알려줬지만 갑판에는 아무도 없고 심란한 바람만 거세게 불어댄다. 에휴~ 이렇게 일찍 일어났는데 뭘 하나....
세수도 할 겸 다시 사우나에 내려간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새벽잠 없는 할머니(?)들 네 분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얘기꽃을 피우고 계신다. 로비에서 TV를 보느니 욕조에서 일몰을 보는 편이 더 낫겠다 싶어 나도 욕조로 들어간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신욕 역시 걷기처럼 사람을 무아지경에 빠뜨리는가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욕조 옆에 난 창으로 해가 떠오르긴 한 모양이나 구름이 끼어 그저 불그레할 뿐이다.
곧 해가 떴다.
하선하기 1시간 전쯤 통과하는 明石(아카시) 대교
아침 9시가 넘어서야 일어난 방식구들과 이런저런 간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하선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하선 시간이 1시간 늦어지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암만해도 오늘 나라행은 틀린 것 같다. 짐을 가볍게 싼다고 쌌는데 막상 짊어져 보니 십리길을 걷기는 쉽지 않을 듯... 암만해도 숙소에 짐을 부리고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그러다 보면 하루의 반이 훌쩍 가버린다. 그렇다면 그냥 오늘은 오사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현지적응 훈련을 해야겠다고 맘을 먹는다.
하선하여 가장 가까운 코스모스퀘어 역으로 걸어간다. 좌우에 WTO 건물 등 새로 지은 고층빌딩이 몇 개 서 있으나 그 외에는 황량한 느낌이다.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中央(주오)선의 종점인 코스모스퀘어에서 지하철(여기부터 오사카항 역까지는 지상철이다)에 오른다. 전혀 외국에 온 것 같지 않고... 계속 부산에 있는 느낌이다.
지하철로 本町(혼마치) 역에서 내리니 바로 미도스 선 환승표지가 보인다. 일본 지하철... 정말 잘 되어 있다. 3일 동안 버스나 지하철, 근교 전철을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간사이 스롯또 패스... 이거 끊길 정말 잘 했다. 혹시 방향을 잘못 알았거나 틀린 노선을 탔을 때도 부담없이 얼마든지 고쳐탈 수 있으니 우리 같은 오사카 초짜들에겐 제격이다. 개찰구를 나오지 않고 바로 환승할 수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단 나왔다가 다시 표를 끊고 들어가야 하는 일본에서, 부담없이 넣고 빼고 다시 넣고 할 수 있는 스롯또 패스는 환승이 잦고 일일이 표를 끊어야 하는 환승역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전쳘역 표지판도 영문과 한자가 섞여 있으니 크게 어려울 것 없고, 다만 같은 難波(난바)역이라도 近鐵(킨테츠)난바 역인지 界筋(사카이스지)난바 역인지... 가려고 하는 역의 이름을 정확히 확인하고 전철의 진행방향만 제대로 확인하면--한마디로 정신만 바짝 차리면-- 아주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환승할 때 승차권을 내고 나가서 처음엔 좀 어리버리했지만 환승역이 많은 서울지하철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적응을 하고 나니 이 전철 타는 맛에 푹 빠져버렸다. ㅎㅎ 무엇보다도 자주 등장하는 지명 때문에 저절로 일본어공부가 되니 그 즐거움이란...(橋 : 바시 / 町 : 마치 / 通 : 도리 등등...)
역사가 오랜 일본 지하철은 낡았지만 고쳐쓰는 '名家의 품위'를 엿볼 수 있었다.
각설하고... 미도스선 난바 역에서 千日前(센니치마에) 선으로 갈아타고 한 정거장 더 가 日本橋(니뽄바시)에서 내린다(사실은 오늘 내렸던 주오선 혼마치 역에서 한 정거장 더 가 사카이스지 혼마치 역에서 내리면 니뽄바시까지 가는 사카이스지 선으로 한 번만 갈아타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 발생! 개찰구를 나오려는데 스롯또 패스가 안 보이는 것이다. 거금 5000엔을 주고 산 건데 딱 한번 개찰하고 잃어버리다니! 한국돈으로 5만원 정도지만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돈'이 아니라 마치 '길잡이'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역무원에게 손짓발짓 하여 사정을 설명하니 일단 정산소에 가서 정산을 하라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역구내를 헤매도 정산소는 보이지 않고 내가 나가야 하는 10번 출구만 보인다. 갈 길은 바쁘고.... 에라, 모르겠다. 잡히면 '봐주는 줄 알았다'고 변명해야지.... 간뎅이도 크지, 걍 후다닥 출구를 향해 텨텨텨!!(바른생활 아줌마가 남의 나라에 와서 뭔 행각?)
숙소를 찾는데 여행사에서 알려준 정보에 의지하다간 헤매기 십상이다. 10번출구에서 나와 우체국이 보일 때까지 무조건 쭉 걷는게 최고다(옆에 구로몬 시장을 끼고 쭈욱 가다가 덴덴타운이 시작되는 사거리에 '요시노야'라는 주황색 도시락집 간판이 보이면 그때부터 주의집중..) 우체국에서 좌회전해서 200미터 정도 가면 바로 보인다. '오사카 하우스'!
체크인은 세 시나 되어야 할 수 있다지만 프런트에 배낭을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내 집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이런 게 나그네의 심정이다. ^^ 다시 발길을 시내로 돌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스롯또 패스를 사용하는 게 최선인 듯 싶다. 억울하지만 역에서 다시 스롯또 패스를 구입하고 쓰린 가슴을 달래며 일단 난바 역으로 간다. 한 정거장 차이인 데도 숙소쪽과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른 시끌벅적 다운타운... 눈앞에 볼거리가 버라이어티하게 펼쳐지는데도 웬지 집중이 잘 안 되는 건 암만해도 스롯또 패스가 안겨준 충격이리라. 여행지 첫 정거장에서 버스를 잘못 탄 기분..
그래도 굳세게 노력해본다. 배가 느무느무 고프니 일단 '밥먹기'에 도전....
여기서 먹을까?
돌아다니면서 저거(타코야키)나 먹을까?
이건 예쁘지만 너무 비싸고...
그래, 결정했어!(식권 자판기에서 튀김우동 티켓을 뽑아든다)
수학여행을 온 타지 여고생들... 니네들도 신나니?
빠찡꼬도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웬지 망설여졌다.
관광가이드북에 단골로 등장하는 도톤보리 주변의 대게집(이 동네 별명이 '먹다 죽는 거리'다)
곳곳에 할인점. 여기서 친구들에게 돌릴 마스크팩을 한보따리 샀다. 일본은 화장품이 싼 편이다.
法慈寺(호젠지) 뒷골목
호젠지 뒷골목엔 작고 예쁜 바가 줄지어 있다.
저런 집에 살면 저절로 문인이 되지 않을까?
가부키 극장 앞 쇼윈도우
오사카의 청계천 도톤보리.... 낮에는 그저그렇지만 밤에는 야경으로 화려한 화장을 한다고 한다.
오사카 홈팀 한신 타이거즈가 이기면 열혈청년들이 저 물 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고..
그런데.. 화장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랫배가 팽창 파열하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거리화장실을 찾다가 결국 케잌집에 들어가서 급선무를 해결하고 치즈케익을 시켜 먹다가 갑자기 짚이는 데가 있어 뒤져보니....(오, 불쌍한 할망구 건망증이여!)... 고쟁이 속에 간직해둔(ㅋㅋ) 스롯또 패스가 나오는 것이다. 이 기쁘고도 처량한 기분이라니!
갑자기 기운이 팍 솟으며 의욕이 오버한다.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 이걸 한번 팔아보자꾸나!!
(허나 말도 못하면서 무슨 재주로 누구에게 그걸 파나... 결국 한국 여행객에게 2일권 가격으로 넘기긴 했다. 우찌됐든 줄줄 흘리고 다닌 게 아니라 '찾았다'는 사실이 힘을 불끈 솟게 했음. ^^)
스롯또 패스를 넘기려고 우찌우찌 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니뽄바시 다음 역 쯔루하시 거리에 서 있다. 어두워진 JR쯔루하시역 다리 아래 오사카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한국말이 서툰 한국 국적의 청년... 2세대? 3세대?
이제 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난바와 더불어 오사카 2대번화가인 우메다로 한번 가보세.
육교 위 거리공연.. 이 육교 위에선 세 팀이나 공연을 하고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
털실을 뭉쳐 만든 손가락만한 인형 휴대폰줄을 팔고 있는 것은 앳된 꽃미남. 직접 만들었단다.
HEP(Hanshin Entertainment Park) 6층 꼭대기에 매달린 대형 고래 모녀.
고래가 오사카의 상징인가?
HEP 안 식당가. 미니스커트나 반바지에 부츠, 목도리를 두르지 않으면 오사카 여성이 아닌 듯...
화려한 야경은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HEP 원형관람차 위에서 찍은 야경.
오늘 오사카에서 받은 인상은 (일본 전체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소박하고 검소하고 일견 시골스럽기도 하고.... 얼핏 보면 우리보다 더 빡빡하게 산다는 느낌이다. 허나 이것은 잠깐 다녀가는 사람의 느낌일 뿐이고... 이런 느낌을 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좀더 분석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하나.... 거리를 걷다보면 한 중 일 삼국이 서로 주고받는 영향이 정말 크단 걸 실감하게 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오사카나 상하이에 비해면 상대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대해 배타적인 편인 것 같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지대한 일본의 영향을 느꼈듯이, 오사카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지대한 영향력이 쉽게 느껴진다. 중국음식점과 중국식 점포도 눈에 많이 띄고 중국사람도 많고, 한국인들 역시 한인사회를 형성하여 오사카 사회 속에 눈에 띄는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는 듯... 삼국을 오가며 한중일 서민들이 함께 살아가며 주고받는 영향이라든지 생활이나 관습적인 측면의 특성비교 같은 걸 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연구가 하나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
신천지는 상하이가 자랑하는 서양식 까페거리인데... 오사카에 와 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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