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서 룸메이트였던 두 자매팀과 새벽 두 시 가까이 무용담과 정보를 나누었건만, 오늘은 먼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알람 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다. 무거운 눈꺼풀과 종아리를 10분 정도 달랜 뒤 벌떡 일어나 찬물 뒤집어쓰고... 행군이다. 언제 이 동네에 다시 와보겠나.
어제 귀가길에 사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서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직 한밤중이다.
도시 자체가 문화재라는 일본역사 천년의 古都 교토.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에 비길 만한 도시다. 서기 794년부터 1868년까지 10세기에 걸쳐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아 수도를 도쿄로 옮길 때까지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2000여 개에 달하는 절과 신사, 옛궁성과 정원을 남겼다. 교토를 제대로 보려면 2박 3일 정도 잡아야 한다고도 하지만 어차피 주마간산 이름난 곳만 휙 둘러볼 수밖에....
암만해도 금각사는 생략해야 할 것 같다. 근사하다고는 하지만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고 길도 먼 데다 그쪽 지역에는 금각사 딱 하나밖에 볼 게 없다고 하니... 다녀와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구해 읽고(절판되어 서점에 없더군) 사진으로 감상하기로 한다. 오늘 예정하고 있는 코스는 二條城(니조조) - 淸水寺(키요미즈데라) - 銀閣寺(긴가쿠지) - 祈院(기온).
사카이스지 北兵(기타하마.. 병짜 옆에 물수변) 역에서 케이한 전철을 바꿔탄다. 오사카시를 벗어나니 예상과는 달리 창밖은 농촌이 아니라 단정한 소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빌라형 단독주택과 왕복 이차선 도로, 조금 더 가니 강태공들이 한가롭게 낚시를 하는 아름다운 강변도 나오고 동네 야구대회가 열리는 듯한 아담한 경기장도 나온다. 티없이 파란 하늘에 한가로이 떠가는 흰구름.... 평화로운 작은 마을들의 토요일 아침 풍경이다.
갑자기 전철안이 병아리떼 짹짹거리는 소리로 가득찼다. 유치원 소풍을 가는 모양이다.
요 새콤한 눈매의 아가씨... 자꾸 내게 말을 걸길래 '와다시와 니홍고오 데끼마셍' 했더니 짓궂게도 손수건으로 뭔가를 자꾸 만들어 내밀며 '난데스까?'를 되풀이한다.
'와까리마셍!' 하면서 자못 처량한 표정을 지으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던 다른 꼬마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면 이 아가씨는 득의양양하게 '이건 바나나, 이건, 전화, 이건 초콜릿......'(휴, 참 많이도 배웠다. 이 꼬마는 자라서 분명히 선생님이 될 것 같다)
창밖 풍경이나 꼬마들과의 장난질이 시들해진 후 교토 지도를 꺼내놓고 연구를 한다. 관광지가 순환 루트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교토 역을 중심으로 오락가락해야 한다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어떻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 없을까?
일단 三條(산조)에 내려서 東西(도자이)선으로 갈아타고 二條城(니조조)에 간 다음 교토 역으로 가서 버스 상황을 보면 어떨까... 그러다 갑자기 太秦(우즈마사)라는 동네에 필이 꽂혔다. 영화 세트장이라면 옛집들도 있겠지만 근현대 세트들도 있지 않을까... 혹시 오늘 유명 배우가 영화를 찍는 현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즈마사는 니조조와 그다지 멀지 않아 보였다. 그래, 잠깐 들렀다 이조성으로 가는거야. 그럼 산조가 아니라 시조 오미야 역에서 내려 한큐교토 본선을 갈아타야 한다. 앗, 다왔네.
서둘러 내린 것까진 좋았는데 올라탄 것이 글쎄 특급이었나보다. 아라시야마(風山) 행 전차를 바꿔타야 하는 西院(사이인)역을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린다. 할 수 없이 桂(가츠라) 역에서 내려 사이인 역까지 보통열차로 돌아와, 전차로 바꿔타기 위해 역 밖으로 나온다. 30분 손해봤다.
'덴샤 에키와 도꼬니 아리마스까?'를 연발하며 친절한 손가락 대답에 의지하여 10분간 더듬더듬... 드디어 전차에 올라탔는데....
뜬금없이 입에서 '아, 너무 좋아!!' 소리가 터져나온다.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행복하다는 느낌의 공습을 받았다. (요즘말로 '꽂혔다') 시골마을에서 전차타는 게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데... 무엇에 홀린다든지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우즈마사역 삼거리... 여기가 왜 그렇게 좋았는지 지금 생각하니 좀 알쏭달쏭하다.
내 마음 속에 있던 어떤 거리와 좀 닮아서 그랬나?
쌩뚱맞게 웬지 방콕시 외곽 주택가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차 다니는 방향도 낯설고 도로도 대략 왕복2차선이고...
하늘도 눈부시고 집들도 반듯납작한 거라든지... 집 주변에 작은 화분들이 있는 것도 그렇고....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행운인가.
물론 하늘도 파아랗고 좁은 골목길과 소박하고 단정한 집들도 좋았지만 뭔가 이 도시에는 나와 코드가 맞는 어떤 氣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홀린 듯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우즈마사 영화마을이 나온다.
입구
입구의 포스터들.. 주로 시대극을 찍는 세트장인 듯했다.
1920년대의 가게 세트
조연배우들과 기념촬영중.
괴물을 물리치는 어린이극을 찍을 때 사용하는 세트? 5분에 한번씩 김을 뿜으며 나타난다. ^^
잠깐 다리를 쉬며 간식을 했다.
사실 별것 아니다. 흰 찰떡을 구워 조청을 바른 것인데 떡살이 어찌나 말랑말랑한지.. 진짜 꿀맛.
어린 관람객들을 위한 오락시설.
명중을 하면 저 기모노 입은 아가씨가 북을 한번 크게 울리며 뭐라고 외친다.
사실 비싼 입장료에 비해 영화마을 자체는 그저그랬다. 그러나 이 영화마을에 오려다가 발견해낸 아라시야마 인근 마을의 매력은 그냥 전차를 계속 타고 아라시야마로 내뺐다가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교토를 둘러볼까 하는 매우 심각한 궁리를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일은 항구도시 고베가, 오늘 오후에는 교토에서 안 보고 갈 수 없다는 淸水寺(키즈요미데라)가 기다리고 있으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버스를 타고 교토 역으로...
교토의 상징인 교토 타워. 교토역 청사 바로 옆이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교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시간관계상 생략.
고풍한 도시와 어울리지 않게 요란한 교토역. 거대한 유리벽이 3층높이 천장까지 이어지고 단번에 3층으로 올라가는 171단 에스컬레이터와 좌우 건물을 잇는 공중도로가 압권이란다.
허나 역시 시간관계상 생략.
역 앞 광장에는 교토 각지의 관광명소로 떠나는 버스들이 줄지어 있는데, 100번 버스를 타면 청수사-기원-은각사-남선사-평안신궁을 돌고, 101번 버스를 타면 니조성-금각사 쪽으로 갈 수 있다. 아침에 안되는 일본어로 생쑈를 하며 찾아갔던 우즈마사 영화촌 가는 버스도 여기 있었다. ^^
100번 버스를 타고 청수사로 간다. 가는 길목 곳곳에 멋진 절과 신사, 미술관, 박물관 등 관광명소가 즐비한 것이 우리나라 경주에 비길 만한 古都임을 실감케 한다. 그런데.... 길이 몹시 막힌다. 가는 데 50분 걸렸는데 막히지 않았던 돌아오는 길은 15분 걸렸다. (그래도 그땐 짐작도 못했다. 그 다음 경험할 교통지옥에 비하면 이건 약과였음을....)
청수사 정거장에 내려 길을 건너는데 가슴이 턱 막힌다. 꼭 국경절에 중국 관광지에 온 것 같다. 딱 발길을 돌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 인파에 휩쓸려 반보씩 반보씩 청수사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오른다.
맨 먼저 기상천외하게 붉은.... 새로 칠한 에나멜이 반질반질 빛나는 탑이 나타난다. 괜히 왔다는 후회가 치미는 순간...
그 다음에 나타나는 좀 덜 붉은 탑... 이것도 修建된 것인데 좀 낫군.
웅.... 훨씬 낫군. 멋지다. 이것이 못을 하나도 안 쓰고 나무를 끼워맞춰서만 지었다는 천수각.
생나무의 느낌이 살아 고찰다운 기품을 물씬 풍긴다.
근데... 사람이 너무 많아 떠밀려 다니느라 여유있게 감상하기 힘들다.. ㅜ.ㅜ
감동적일 정도로 훌륭한 立地. 벼랑 위에 높직이 세워져 교토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마침 단풍철을 맞아 발아래는 가을꽃밭이 한창이었다.
조상신을 모시는 神社는 어디에나 있다. 신사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
청수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천수각 옆으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줄기는 특이한 음수대로 연결된다.
이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여 한모금씩 맛보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섰다.
다 좋은데 물바가지 손잡이가 너무 주체하기 힘들더군.
아름다운 하산길... 눈으로 만끽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사진이 나와 아쉬울 뿐이다. ㅜ.ㅜ
거의 다 내려온 지점에 샛길이 있길래 빼꼼 들여다보니....
헉! 아마도 공동묘지인 듯...
청수사에서 내려오는 길은 두 갈래인데, 아래쪽을 바라보고 오른쪽길에 있는 공예점이 구색이나 가격에서 훨씬 낫다. 인형, 접시, 과자, 수예품 등등.... 앙증맞고 정교한 예쁜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기 정신 팔다간 날이 다 저물 지경.
으흐흐.... 스파이더맨이다!
깔끔하면서도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도기인형.
이쁘긴 한데 좀 비싸서 망설이다가 세일중인 평범한 헝겊인형을 샀다.
아까워서 저걸 어떻게 먹나... 한 상자에 1050엔.
기생분장을 하고 사진을 찍어주는 가게. 기생(게이샤)가 되어보고 싶은 여성들이 줄을 서 있다.
교토 역으로 돌아오니 오후 세 시... 시간이 어중간하지만 그래도 은각사 한 군데 더 들르려고 버스에 올랐는데.... 아니, 이 버스는 아까 청수사에 가기 위해 탔던 버스 아닌가. 그런 줄 알았으면 청수사에서 나와 내렸던 반대 방향에서 타면 되었을 것을....
암튼 이걸 타면 청수사를 다시 지나서 곧 은각사에 도착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날 오후 나는 진짜 지옥을 경험했다. 교통지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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