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오사카 견문록 6 - 바다로 산으로 온천으로 도시로 마구 헤매기

張萬玉 2005. 11. 28. 17:40
오늘은 잘 만큼 자고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야속하게도 여섯시 반이다.  

팔다리는 따로 놀지만 그래도 주섬주섬 챙겨 집을 나선다. 오늘은 오사카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고베시 하고도 서쪽 끝에 있는 히메지성에 갔다가 아리마온천 갔다가 로쿠산으로 넘어가 산노미야로 내려갈 생각...  오늘 역시 만만한 여정은 아니니 서둘러야 한다. 

 

숙소 근처 까페(Kohee cafe--커피 카페... 이름 한번 참 쉽게 지었다.ㅋㅋ)에 들려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커피맛도 좋고 버터를 고르게 발라 따끈하게 구은 빵맛도 예술이다.

 

 

이렇게 샐러드와 스크램블드 에그, 햄을 올린 것은 500엔, 토스트 한쪽에 삶은달걀을 올린 것은 350엔인데, 보통 아침에 까페에서 '모닝구!' 하고 외치면 350엔짜리 기본 메뉴가 나온다.  

 

오늘의 주요 교통수단은 한큐고베本線 철도. 사카이스지선을 타고 天神橋筋 六丁目(텐진바시스지 로꾸초메) 역에서 내려 한큐 千里(센리)선으로 한 정거장, 淡路(아와지)역에서 갈아타면 된다. 한 시간쯤 달리니 고베 관광의 중심지인 三宮(산노미야) 역을 지난다. 그러나 나는 히메지성 관광을 위해 두 정거장 더 지나 종점이 姬路(히메지) 역인 고베고속전철로 갈아탄다. 

 

바다를 끼고 달리는 이 열차에는 손님도 별로 없이 한가한 데다 투명하고 따뜻한 아침햇발이 들어 '행복한 기차여행'이라는 드라마를 찍기에 딱 알맞은 풍경을 연출한다.  

 

 

멋쟁이 할아버지... 내가 10년만 늙었어도, 내가 말만 됐어도 작업 들어갔을지 모른다. ^^

유리창 밖으로 지나치는 집들은 마치 리조트 안의 빌라들 같다. 그 뒤로 논이 펼쳐져 있으니 농촌 집들이 맞는데....  반대쪽 창밖 풍경은 바다.

 

산노미야부터 히메지까지는 또다시 한 시간. 이 짧지 않은 여정을 수다쟁이 장여사가 맹숭맹숭하게 보낼 리 없지.... 옆에 앉은 모녀를 한번 슬쩍 찔러본다. 

일단 "아리마 온센와...." 해놓고는 부스럭부스럭 펜을 꺼내어 '전통 일본방식?' 이라고 한자로 쓴다. 여행에서 사람이 빠지면 싱겁고 쓸쓸하기 때문에 쓰잘데기 없는 짓도 가끔은 필요하다.

 

그런데 새댁처럼 보이는 딸네미가 영어를 한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그 엄마는 신이 나서 10년 전에 한국에 놀러왔다 간 얘기를 늘어놓고 딸네미는 내게 통역해주기 바쁘다. 지난 이틀간의 내 무용담도 엄마에게 통역을 해주고.... 사람 좋게 생긴 엄마는 연신 '스바라시이!!'를 외치며 신이 났다. 자기 집 뒷산에서 딴 거라며 다래 같이 생긴 과일도 하나 주고.... (나중에 한입 맛보니 무지하게 떫더라만 그 마음이 고마워 하루 종일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녔다)

 

히메지 역에서 내리니 역사 안에서 모모 초등학교 꼬마들이 오카리나 연주회를 하고 있다(아, 오늘이 일요일이군). 솜씨가 제법이다. 귀여워서 한장 찰칵...

     

 

역에서 나와 히메지성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의 느낌은 한마디로 '넓.직.하.다.'

고층빌딩도 없지 않지만 외곽도시다운 한가로움과 여유는 히메지 성이라도 좋고 아니라도 좋고... 그저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계속 걷고 싶게 만든다.    

 

 

일본을 평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가 건설하였다는 히메지성은 일본 성곽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메이지 시대에 파괴되지 않았던 극소수 성곽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천수각 가는 길

 

 

웅장한 성곽의 몸채나 독특한 지붕도 눈길을 끌지만 내 눈에 가장 신기했던 것은 저 눈부신 회칠이다. 원래 색깔이 저랬으니 보수공사를 해도 늘 저 색깔로 덧칠을 하겠지? 옛날 색깔감각 치고 너무나 '쎄련' 아닌가.

어차피 히메지성에 시간을 많이 낼 수 없기에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원경만 즐겼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히메지라는 도시의 느낌을 포함하여) 올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히메지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일요 벼룩시장.

 

 

 

기념으로 200엔 주고 모자를 하나 샀다.  역 근처 식당에서 1000엔짜리 정식 점심식사. 

 

다음 예정지는 아리마 온센. 新開地(역 이름이 맘에 든다)에서 아리마온천 행 전철로 환승.

전철 코스가 또 예술이다. 단풍이 가득한 산으로 산으로 올라간다.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떠올리게 하는 산속 전철길.

 

 

온천은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욱 늘어서 있다. 이 지역의 온천은 황토가 섞인 붉은 온천수로 건강에 좋다고 하여 그 옛날 도쿠가와 히데요시도 와서 즐겼다고 한다. 

온천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온천개울(!)

 

 

그런데 대중탕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 호텔에서 숙박객들에게 제공하는 온천들인 것 같고 금탕은 650엔, 은탕은 550엔이라고 써붙인 대중탕 간판을 얼핏 봤는데 오르락내리락 암만 찾아봐도 없다. 게다가 내가 그렸던 일본전통식 욕탕은 아마 이 동네에서 거의 사라진 게 확실하다.

 

사흘간의 피로를 잠시나마 온천에서 풀어볼까 했던 생각은 접기로 했다. 무엇보다 곧 해가 질 것 같은데 한국목욕탕이나 다름없는 데서 어리버리 시간 보내다간 로쿠산으로 넘어가는 아름다운 산길을 놓칠 것 같아서.... 다음에 오사카에 올 일 있으면 아예 1박2일을 잡아 온천에서 하루 쉬고 다음날 로쿠산으로 넘어가 놀면 딱 좋을 듯했다.(1박 8000엔~2만엔)

 

 

온천에 안 들어간 사람들은 여기서 간이 족욕... 저 얕은 물이 그래뵈도 온천수다.

 

 

시골동네 분위기에 또 빠졌다. ㅋㅋ

 

전철역 뒤쪽에서 로쿠산으로 넘어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온 산이 불타고 있다. 설악산인지 로쿠산인지.... 헷갈린다. 허나 케이블카 창이 더러워 제대로 된 사진 한장 찍지 못했다. 아까비~

 

 

로쿠산 정상에서 케이블카를 내리니 로쿠산 순환버스가 기다린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

로쿠산 일대에는 목장, 허브농장, 식물원, 미술관 등 유원지가 많이 개발되어 있다.

저 사진이 어디였더라? 적어놓지 않아 잊어버렸다.

밝은 날 왔으면 이 동네도 감탄을 연발하며 하루를 보냈을 만한데 갈길이 먼 길손에겐 안타까움으로 남을 뿐... 산 정상에서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고베항을 잠시 바라본 후 순환버스에 올라타고 바로 하산길에 오른다.

 

버스 종점에 도착하니 다시 로쿠산 아래까지 내려가는 전차가 기다리는데...

이 전차 또 희한하네 그려. 꽁무니를 번쩍 치켜든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앞쪽 자리로 앉고 싶은 손님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경사 40도 정도로 놓인 철길을 따라 전차는 좁고 무성한 숲길을 헤치며 내려온다. 꽁무니를 치켜든 그 모양 그대로... 올라갈 때 역시 그 모양 그대로 올라가겠지... ㅎㅎ 너무 재밌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포트타워로 가야 하는데.... 전차 종점에 분명히 산노미야를 일주하는 시티루프 버스가 있다고 했는데 시내버스 딱 하나뿐이다. 그것도 산노미야까지 가는 게 아니고 로쿠산 역까지 가는 거란다. 에구... 다리는 이미 천근만근인데....

 

고등학생들로 가득찬 버스에 몸을 싣고 선 채로 20분 정도 가니 로쿠산역이 나온다. 필사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전철로 갈아타고 산노미야 역으로.... 이제 거기 가면 시티루프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포트타워까지 가리라. 돌아다니기는 이제 그만하고 맥주나 한잔 하면서 푹 쉬었다가 오사카행 마지막 전철을 타리라.

 

윽!!!

산노미야 역에서 내렸는데 시티루프 버스가 없다. 그제서야 시티버스의 마지막 출발 시간이 4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제 우짜믄 좋노.... 여기까지 와서 발길을 돌릴 수는 없고... 다리는 천근만근이고...퇴근시간이라 그런지 택시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에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길에서 쓰러지면 쌕 안에 여권 있으니 친절한 일본경찰이 알아서 집에 보내주겠지... 흑흑흑... 

 

기를 쓰고 산노미야 역으로 돌아간다. 포트타워가 가장 가까운 모토마치 역으로.... 지하철로 겨우 두 정거장인데 내겐 그 길이 어쩌면 그리도 먼지...   

 

 

드뎌 지하철 역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포트타워 바로 아래까지 접근.

여기도 혹시 마감시간이 있나 싶어 서둘러 전망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보니 역시...

내 계획에 있던 회전전망대 bar에서의 맥주 한잔은 이미 막을 내렸다. 허나 끌려나갈 수는 있어도 이대로 나갈 순 없다. 발바닥이 바닥에 붙은 듯 도무지 떨어지질 않는걸.

영업시간 끝났다고 테이블 닦는 아가씨에게 사정하여(물론 신체언어로) 물 한잔 얻어마시며 10분 가량 다리쉼... 나의 고단함과는 상관없이 고베항의 야경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고.     

 

 

포트 타워 건너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의 거리 모자이크. 눈앞에 보이기는 하지만 갈 수가 없다.

 

오늘의 스토리는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포트타워에서 잠시나마 쉬었다고 기운을 조금 차린 수다쟁이 장여사... 곱게 전철역으로 갈 것이지 약간 방향이 헷갈리는 것을 빌미 삼아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아가씨에게 길을 물었더니 '오사카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나도 그쪽으로 가는데 나랑 같이 가면 된다'고 영어로 대답을 해준다.

좋다구나 따라가는데 그 아가씨... 자기 약속시간이 좀 빠듯한데 조금 빨리 걸어도 되겠냐고 한다. 무릎은 거의 기절 직전이지만 어쩌겠나... 'No problem!' 해놓고는 죽어라고 따라간다.

 

그. 런. 데....

암만해도 이상하다. 올 때 분명히 10분 거리였는데 20분이 다 되어가도록 전철역은 나오지 않는다. 이제 그 아가씨는 거의 뛰다시피하는 걸음이다. 기운도 좋지... 게다가 영어 하는 게 좋아서 그러는지 걷기도 힘든 내게 끊임없이 말을 시킨다. 헉! 헉!! 헉!!! 헉!!!!

 

어쩐지 눈에 익은 거리가 나오더니... 윽~ 이럴수가...산노미야 역이다.

전철 두 정거장을 뛰어온 것이다. 나는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패스가 있으니 전철을 타고 갈아타도 되는데 이 아가씬 200엔 아끼려고 그랬나 나까지 이끌고 무지막지하게 뛰어온 것이다. 고마운 일은 고마운 일이지만... 너무 가혹한 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