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회개의 추억--한나라당 광고방송을 보면서

張萬玉 2004. 4. 11. 21:03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는 모정당의 선거방송을 보면서 떠오른 옛날 생각 하나...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둘째오빠가 반 아이들 여섯 명을 모아 수학과외를 했다.

6개월 정도 하다가 반이 바뀌면서 팀이 해체되었을 때 한 아이가 과외비를 안 냈는데, 반이 바뀌면서 꿩 구워먹은 소식이 되자 나를 통해 몇번 재촉하던 오빠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 과외비가 들어온 건 하필 학생회 간부수련회를 며칠 앞둔 때였다. 당시 나는 수영복 문제로 목하 고민중이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고 교복조차 제대로 맞춰본 적이 없는 어려운 살림에서 수영복 걱정이라니. 남들 보기엔 철없는 고민이었겠지만 꽤 사는 집 아이들로 구성된 학생회 간부들과 어울리려니 이것이 어린 나에게는 큰 걱정꺼리였다. 길거리 다니면서 꽃무늬 예쁘게 프린트 된 비키니 수영복만 눈에 들어오던 차에 갑자기 수중에 생각도 안 했던 거금이 들어온 것이다.

 

하교 후 발걸음은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고, 오빠의 피 같은 돈 2000원 중 800원이 튤립수영복값으로 치러졌다. 아이고, 이젠 어쩐다! 돈 귀퉁이가 날아가버렸으니 나머지를 돌려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수련회에 다녀온 뒤에도 고민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이 돈을 돌려주나.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고민의 강도는 약해졌고, 그러다가 하교길 삼립빵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10원, 늘 얻어만 먹던 친구들에게 떡볶이 쏜다고 20원 하면서 돈이 조금씩 줄어들어 돈을 돌려주기란 이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용돈이라고는 차비 외에 받아보지 못한 나에게 1000원이 넘는 돈은 너무나 컸다. 사고 싶던 물건은 증거가 남기 때문에 먹어 없애는 전략을 채택했지만 먹어도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그놈의 돈…. 그 돈의 무게에 양심이 짓눌리며 거의 한 학기를 보냈던 것 같다.

 

2년 후.

여의도에서 열린 세계적인 부흥강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친구집 드나들 듯 하던 나에게 이 집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집단최면에 걸린 듯한 당시의 황홀과 도취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도 四靈理 의한 구원을 받기 위해 그 첫단계인 회개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나는 대로 종이에 적으라고 한다. 소소한 것도 많이 있지만 내가 17년 동안 지은 가장 큰 죄라면 당연히 오빠의 돈을 꿀꺽 해버린 죄

 

그 죄를 사해달라고 진정을 다하여 회개의 기도를 한 후 그 종이를 태워버리라고 한다. 그것도 정성을 다해 해내고...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단계 죄를 지었던 사람에게 그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막히고 말았다. 오빠가 무섭기도 했지만 착하고 총명하기로 소문난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절대 안 된다!

밤새 울면서 기도했지만 결론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양심과 자존심의 대결에서 결국 양심이 무릎을 꿇었다. 구원을 받고 방언 선물까지 받은 옆자리의 친구들이 랄랄랄랄라 소리높여 기도하는 것을 나는 비참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아이를 낳고 늦둥이를 본 둘째오빠의 아이도 돌을 맞아 축하하기 위해 온 식구가 모인 날 밥을 먹던 중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일이 생각이 났다.

오빠에게 이자까지 쳐서 20만원 정도 갚으면 되겠느냐고 농담삼아 물으니 오빠도 일단 갚아라. 내가 그거 과외 소개한 코미션으로 너 줄게 하고 농담으로 받는다. 눈물쟁이 엄마는 눈시울을 붉히고 다른 형제들은 박장대소 20년 만에 회개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대가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요즘 선거철을 맞아 과오를 반성한다는 정당들과 정치인들을 보면 그들의 반성이라는 게 과연 내가 당시 겪었던 마음고생만큼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국민이 때리면 그렇게 다소곳하게 맞을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반성은 너무나 간단하고 경쾌해보이기까지 한다. 악어의 눈물 같다. 왜 내게 그들의 매맞는 종아리는 불쌍하기는커녕 징그럽기만 한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