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가난은 아이를 조숙하게 만든다

張萬玉 2004. 10. 29. 14:25

1963년(6살)

그리고 서대문구 옥천동으로 이사갔다고 한다.

여기부턴 기억이 어느정도 명료하다. 천연동에서 영천시장 가는 길목...

지금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 재개발되어 옛모습은 흔적도 없을 것 같다.


가파른 산턱에 층층이 축대를 쌓아 집을 지었기 때문에 좁은 집앞 마당에서 놀다가 아랫집으로 떨어져 팔이 부러졌던 기억이 난다.

 

옆집에는 늘 밥그릇을 들고 나와 대문간에 앉아서 밥을 먹던 아기(어린 내 눈에도 아기로 보였으니 나보다 더 어린 아이였던 듯)가 살았고,  늘 큰 밥숟가락 가득 밥을 떠서 왕소금 한 알씩 얹어 아기에게 밥을 먹이던 윗집 아주머니 생각도 난다.

 

동네 공동수도 옆에 공동수도를 관리하는 토담집이 하나 있었다.

부엌도 변변히 없는 집이라 화덕을 밖에 내놓고 밥을 짓는데, 어느날 보니 밥 뜸을 들일 때 밥솥 뚜껑을 열고 "당원"(이거 아시는 분? 일명 뉴슈가라고...)을 훌훌 뿌려넣길래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 보았을까? 분명히 빨간색 상표를 붙인 당원이 맞는데... 그게 소금이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ㅎㅎ

(그런데 왜 모든 기억이 밥과 연결되어 있을까?)


한번은 엄마 친구가 나와 동갑인 딸네미랑 똑같은 원피스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입혔는데 내 기억으로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걸쳐본 새옷인 듯.... 연분홍 바탕에 빨강파랑 작은 풍선무늬가 있는 원피스... 둘이 똑같이 입고 나가니 쌍둥이냐고 사람들이 물어 기분이 좋았던 생각이 난다. 옥천동에서는 그리 오래 살았던 것 같지 않다.


안산 시대(7살?)

기억에는 거의 없는데 홍제동 안산 중턱에서도 한 일년 정도 살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의 기억도 단편적으로 좀 남아 있다.

그때 엄마가 뒷집에 사는 같은 교회 다니는 *집사님네 집에 들락거리며 가사를 거들었는데, 그 집도 무늬만 부자라 월급은 따로 없고 찬밥이나 헌옷가지를 얻어다 입었던 것 같다.(어떤 연유인지 그 시절의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없다. 이 사정도 이번에 한국 가면 한번 오빠들에게 물어봐야겠다)


양갓집 규수로 자라 고생이라고는 모르던 양반이 고등학교 교사였던 남편이 납북당한 뒤 혼자 자식을 키우면서 나름대로는 고생했겠지만, 어쨌든 옛날 호강을 못 버려서 일하는 사람 없이는 살림 못하는 귀한 몸이었던 그 할머니가 나는 왠지 미웠다.

엄마에게 가끔 시장 심부름을 시키면 어린 나는 엄마 치맛자락을 몰래 잡아당기며 가지 말라고 찡찡거리기는 했지만 조르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속이 많이 상했었다. 여섯 살박이치곤 꽤나 조숙하지 않았나..

 

뒷집에는 부처상 깎는 집이 있었고 옆길로 난 야산으로 올라가면 맨 꼭대기에 뺑코아줌마네 집이 있다. 그 아줌마와 홍제동 큰길 넘어 똥굴(!) 혹은 아까시굴(아카시아가 많이 피어서)에 사는 두 아줌마들도 *집사님댁에 거들 일 없나 살피러 자주 드나들었는데, 영리한 이 할머니는 그 아줌마들에게는 김장, 빨래 등 힘을 쓰는 허드렛일을, 엄마에게는 바느질이나 반찬 만들기 등 좀더 세련된 감각이 필요한 일을 골라 시켰다.


모두들 같은 교회 같은 구역 식구들이었고 그중 *집사님이 짱(구역장)인 신앙공동체여서 그랬는지? 아무도 *집사님을 내놓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린 내 눈에도 아주머니들이 *집사님을 인간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비쳤다. 누룽지 한 조각 주고 무슨 권리라도 있는 양 온갖 잡일을 시키는 것이 어린 내 눈에도 부당하게 보였던가 보다.


물은 산모퉁이를 하나 돌아가는 곳에서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오빠들이 물지게로 져다 먹었고 교회에서 주는 구제품 옷과 강냉이가루로 죽을 쑤어먹거나 빵을 쪄먹으며 엄동설한 한 철을 견딘 뒤 우리는 내 유년시대 대부분을 보낸 천연동 산4번지로 이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