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포장이사를 하면 짐을 다 풀어주고 난 뒤 포장재를 싹 걷어가더만
중국에서 온 짐은 왜 그렇게 안 해주는 거냐.
포장재 처리로 2박 3일 보낸 이야기...
이사화물을 받으려면 화주가 직접 와야 한다고 하여 아침 9시까지 서둘러 인천항 본부세관으로 갔다. 통관하려면 샘플검사를 하기 때문에 세 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하더니 옷가지와 책밖에 없는 우리 짐은 검사도 없이 통과... 접수하느라고 기다린 시간 30분 포함해서 한 시간 밖에 안 걸렸다. 대개 해외에서 오는 짐(특히 중국에서 오는 짐)에는 새 가구가 많은데 왜 우리는 빈손으로 왔느냐고 운송회사 직원들이 의아해한다. 요즘 유행인 앤틱가구 사와서 팔면 짭짤할 텐데요 하면서...(아자씨, 그거 밀수거든요? 가 아니고... 사실은 제가 좀 게으르거든요?)
고가사다리차 세 번 딱 오르내리고 나니 끝이다. 큰 것만 자리잡아주고 자잘한 건 정리 안 해준단다. 사실 자질구레한 내용물이 남의 손 거치는 것도 번거롭고 해서 그럼 안녕히 가시라고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에궁, 하나씩 박스를 뜯다 보니 포장재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쓰레기를 함부로 내놓지 못하는 한국에서 어떻게 최대한 적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이 포장재들을 처리해야 하나 궁리를 해보지만 암만해도 뾰족한 수가 나질 않는다. 일단 오후 4시에 작업 개시.
1) 종이박스
박스 52개를 위 아래 칼로 죽죽 그어가며 접어서 현관에 쌓는다. 1500입방미터짜리 적지 않은 박스라 이 작업도 씨름동작이 나와야 가능한 중노동이다.
2) 올록볼록한 비닐충진재
재활용이 안 되니 쓰레기 봉투에 넣으려면 최대한 부피를 줄여야 하므로 꼭꼭 눌러가며 돌돌 말아 박스에서 떼어낸 테이프로 마감.(20L짜리 쓰레기 봉투로 8개 나오고 서너 시간 걸렸다. 부피를 줄이려고 용을 썼더니 손목도 무지 아픔)
3) 종이 충진재
우리나라에선 거의 안 쓰는 것 같은데.... 암튼 연 이틀간 날 쓰레기더미와 씨름하게 만든 주범은 바로 이 종이 충진재였다. 한지처럼 얇고 흰 종이를 얼마나 틀어박았는지... 좀 오버하자면 박스 안에 든 내용물 절반은 짐, 절반은 종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물 건너가는 짐이라지만 이건 좀 지나쳤다. (**화물 총경리님, 작업 표준화 좀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태울 수 있는 쓰레기는 대강 정리해 내놓으면 되겠지만 그것도 양이 어느 정도 돼야 말이지...짐을 다 풀어놓으니 구름같은 흰 종이가 현관에서 들어오는 입구부터 주방, 안방 가는 길을 모두 막아버릴 뿐만 아니라 거짓말 약간 보태서 천장이 닿을 정도로 쌓였다. 허! 허! 허!
저걸 정리하자면 수세미처럼 구겨진 종이를 일일이 펴서 묶어야 하는데... 그러다 날 새지...
에라 돈으로 때우자 하고는 쓰레기봉투 속에 꼭꼭 눌러넣다 보니... 에휴, 비닐 충진재 눌러가며 마느라고 무리한 손목이 본격적으로 시큰거린다. 게다가 한 봉투 넣어봐야 코끼리 눈꼽만큼도 표가 안 나고 그렇다고 시간이 더 적게 걸리는 것 같지도 않다. 다시 좌절!!
설상가상 남편으로부터 오늘 직원들과 회식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고 나니 도무지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지 눈앞이 아득할 따름이다. 일단 종이산을 헤치고 주방으로 가서 부글부글 끓는 급한 마음 커피 한잔으로 지긋 누르며 노선을 결정... 그래, 가는 거야. 왕도가 따로 있겠니!!
그리하야 시작된 재단사 흉내..
일단 구겨진 종이의 양쪽 끝을 잡고 탁탁 털어낸 뒤 바닥에 놓고 양손으로 좍좍 훑어내리고 가로 세로 가로로 세번 접어 깔고앉는다. 이렇게 되풀이하다 보면 언젠가는 끝나겠지, 언젠가는.... 획기적인 다른 길을 찾기 전엔 공장에 취직한 셈 치고 아무 생각 말아라. 무조건 가는 거야!!
무아지경으로 손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열두시... 저녁이나 먹었던가?
종이산은 절반으로 줄어 있지만 아직도 갈길은 멀다. 이제 멀미가 다 나려고 한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이런날 늦어지는 괘씸한 남편에게 청승이라도 떨려면 그냥 종이더미 속에 쓰러져 잘까? 카메라로 이 장면을 찍어둘까? 하는데 벨이 울린다.
술이 떡이 된 남편에게 "내일 놀토니까 같이 바짝 해서 내일 중으로 끝내버리자. 집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쓰레기 처리는 당신이 책임져?" 하니 판단력이 흐려진 남편, 기분좋게 큰소리다. "까짓거 오전중에 끝내주지...염려마, 아, 염려 말라구. 까짓 거!!"
까짓 거? ㅎㅎㅎ
에구, 오랜만에 블러그 들어오니 별것도 아닌 얘기, 수다가 늘어지는군요.
다음글에서 잇겠습니다. 이제 좀 짧게짧게 가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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