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산업에 낸 이력서에는 '검사'직을 염두에 두고 학력을 고졸로 썼다.
검사는 불량난 제품을 다시 고쳐달라고 요구하기 위해 라인 곳곳을 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공정보다 여유가 있어 손이 빌 때는 맨 앞자리 비어있는 미싱에서 정교한 기술이 필요없는 창구멍(팔 안감에 나 있는, 완성된 파카를 뒤집는 구멍) 막기를 하며 미싱연습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리봉동에는 '윗선' 언니와 N 외에도 알고 지내던 언니가 하나 더 있었다. H양행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근처 가리봉시장에서 우연히 '신등교회' 시절 안면이 있던 언니를 만났는데,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현장에 와서 맨 먼저 부딪힌 '학출' 노동자였고 집도 멀지 않아 가끔 한번씩 들러 안부를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W산업에 입사하고 난 뒤 오래 못봤다 싶어 그 언니 집에 들렀더니 마침 연락을 할 일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며 내게 꼭 소개시켜줄 선배가 있다고 한다.
원래 현장에 갈 때는 기존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관계를 기본적으로 단절하기 마련이다. 고달픈 현장생활의 도피처가 될까 하여 현장 바깥 사람들은 물론, 현장에 들어온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자기 사업장 동료들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그리고 보안상의 문제, 노선상의 문제 등등을 야기할 수 있기에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망설이는 내게 언니는 경험이 풍부한 선배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니 앞으로 활동을 같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만나보면 자기에게 분명히 고마워할 일이 있을 테니 꼭 만나보라고 강권한다(언니는 내가 다른 지도선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글쎄... 하는 심정으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장소에 나온 사람은 세상에나.... 71학번이었다(그렇게 높은 학번 중에도 현장활동을 하는 선배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길에서 부딪혔더라면 아마 철물가게 아저씨나 포장마차 하는 아저씨로 보았을 것이다. 키도 작고 말씨까지 어눌하여 전혀 인텔리 출신으로 보이지 않는 이 선배.... 이야기를 시작하니 말수는 적지만 꼭 필요한 질문을 탁탁 던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솜씨에 말려서 조금씩 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게 웬일!!
이 선배와 나는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다니는 공장이 2공장, 이 선배가 다니고 있는 공장이 3공장..... 그리고 1공장에 장래 노조위원장깜 한 명이 입사할 예정이란다. 이 선배가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지도해왔던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소모임 멤버 중 한 명이 몇 달 후면 군복무를 마친다나.
불투명했던 앞길에 한줄기 빛이 보이는 듯했다. 이후 이 선배와는 두 주일에 한 번씩 만나 각자 공장에서 진행하는 활동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고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이야기는 다시 W산업 생산현장으로 돌아와서....
어느날 오후... 열나게 창구멍을 막고 있는데 생산주임이 불렀다. "손님이 오셨는데?"
사무실로 들어가보니 웬 덩치 큰 남자 둘이 날 기다리고 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뭔가 엮인 모양이구나..... '
"N모.... 알지? 우리랑 좀 같이 가야겠어."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피하는 제스처 한번 못 써보고 양팔을 잡혀 검은 승용차에 올라탔다.
승용차가 공단을 빠져나오자 "고개 숙여!" 하더니 손수건으로 눈을 묶고, 몸을 이리저리 더듬어 주머니에 있는 쪽가위며 작업복 칼라에 꽂혀 있는 불량교정용 바늘을 압수하는 아저씨들....
"이거 뭐야... 여차하면 자해하려고 갖고다니는 거 아냐, 아무튼 무서운 *들이라니까!"
뻔히 작업용 도구인 줄 알면서도 겁을 주려고 그러는지 공연히 내뱉는 막말.... 입소문으로만 전해듣던 상황이 이렇게 난데없이 이렇게 빨리 내게 닥칠 줄은 몰랐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아마 위치를 속이기 위해 뺑뺑 돌았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는 3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인데....)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떤 방으로 들어가서야 겨우 눈을 가린 손수건이 풀렸다. 욕조와 간이침대 두 개, 수사용 책상만 덩그러니 놓인 두어평 남짓한 공간.... 그곳은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물론 당시는 거기가 어딘지 몰랐고, 어딘지 모른다는 사실은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너 하나 여기서 죽어나가도 아무도 모른다'는 상투적인 협박을 진짜처럼 믿게 만드는 고립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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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괴롭고 무서웠던 건 딱 이틀뿐이었다.
데려오자마자 숨돌릴 틈도 없이 협박과 폭언으로 겁을 주며 시작한 조사는 수사관을 바꿔가며 그날밤과 이튿날 종일, 그리고 그 이튿날밤의 철야조사로 2박3일간 이어졌지만 뭐 조사할 건덕지가 있어야 말이지.... 현장에 온 지 6개월 남짓한 피래미, 털어봤자 뭐가 나오겠나.
'사건과 관련된 사실관계'가 없으니 조사는 주로 나의 사상검토와 일상적인 관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엔 '어떤 말을 하더라도 결국 자승자박으로 돌아오게 될 뿐이니 조사를 받게 되면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게 좋다'는 얘기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고 버텼지만 하룻밤 지나고 조사분위기의 감을 잡은 다음에는 좀 여유가 생겨(너무너무 졸립기도 했고) 자발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조국의 민주화를 향한 나의 충정에 대해... 여공들의 고통받는 현실을 몸소 느끼고자 했던 이 시대 지식인의 휴머니즘(!)에 대해....'
때리거나 물을 먹이는 고문은 없었다. 가혹행위를 예감하게 만드는 폭언과 욕설, 제스처, 이틀밤을 꼬박 새우게 만든 '잠 안재우기'는 있었지만.... 사실 그때 제일 무서웠던 건 밤샘조사를 하면서 깊은 밤에 조사관과 나 단둘이 남겨져 있는 상황이었다. 비밀경찰이지만 그래도 공직자인데 함부로 처신을 할 리 없지만(하긴 문귀동이란 자는 그 직위를 오히려 '사용'하기도 했지) 그 터무니없는 두려움은 아마 처녀들이 갖는 본능적인 경계심이었을 것이다.
일단 조서를 작성하고 나니 나를 담당했던 아저씨들 태도도 부드러워지고 조사과정에서 우쨌든 친해졌는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편해졌다. 조사가 끝나갈 무렵에서야 관련사건조사가 이미 끝났다는 감을 잡았는데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정말 그랬다. (아마 사건 수사 초기에 잡혔거나, 정권유지의 필요에 의해 실체도 없는 사건을 만들려는 케이스였다면 나같은 피래미가 별 건덕지 없이 걸렸어도 아마 무지한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내가 잡혀오게 된 것은, 사건 관련자들이 거의 검거되고 막판에 '윗선'과의 관계가 드러나 추가로 연행된 N의 집을 수색하던 과정에서 쓸데없는 쪽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확인 차원에서 데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에 대한 조사도 설렁설렁 넘어갔던 것이고.....
사흘만에 조사가 끝났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바로 내보내주진 않았다. 아마 일주일 정도 그곳에서 더 빈둥거린 것 같다. 내가 심심해서 도지개를 트니 구내도서관(그런 곳에 그런 것도 있다니!)에서 소설책을 빌려다주길래 하루에 두세권씩 읽어치웠더니 수사관들이 다 놀라더군.
거기서 초등학교 동창도 만났다. 내 조서를 들여다보던 수사관이, "어, 너 **초등학교 나왔냐? 옆방에 네 동창 있다" 하더니 풀려나기 전날 옆방으로 데리고 가 동창을 만나게 해주었다. 웅변을 잘 해서 유명했던 그애 역시 이 조직사건과 관련된 말단 피래미였다. ^^
나오기 전에 각서를 쓰란다. 그 자리에는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고위급으로 보이는 자가 입회했는데, 이후에 보니 경기도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던(의원을 지냈던가?) 이*구 라는 양반이다.
각서의 내용은 '다시는 공장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밖에 나가서 이곳에서 조사받은 사실뿐 아니라 아예 이곳의 존재 자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뭐 법적 효력도 없는 각서 쓴다고 뭐 대수인가? 구속영장도 없는 이 마구잡이 연행 자체가 불법인데....
공포의 대공분실에서 무사히 풀려나긴 했지만 원대한 포부를 안고 들어간 W산업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게다가 이 일로 공단입주 업체에 돌아다니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정말 사소한 부주의가 불러온 댓가는 너무나 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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