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고시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고....
확실히 '운'이라는 게 있긴 한가 보다. 확률로 따지면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 쪽이 분명히 높겠지만, 간혹 손 안 대고 코를 풀어도 구석에 박혀 있던 코딱지까지 쏙 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거나, 담당자가 '식사중' 팻말 걸고 사라지는 줄에만 골라 서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혹시 내 인생을 따라다니는 '운'이 있었다면 그것은 대체로 나쁜 쪽보다는 좋은 쪽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해보는데, 현장활동에 있어서만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H양행은 워밍업이었다 치고, 제대로 해보려고 마음먹었던 첫 현장부터 '*물 튀는 바람에' 석 달도 못 채우고 쫓겨난 이래....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재삼 재사 시도했던 현장에서도 계속 예상치 못했던 불운에 쫓겨 활동다운 활동 한번 제대로 못했으니....
--------------------------------------------------------------------------
남영동에서 나올 때 분명히 '신원보증'을 해 줄만한 이에게 내 신병을 인도했을 텐데, 전혀 기억이 없다. 어딘지도 몰랐던 곳에서 내 발로 걸어나오진 않았을 텐데(거기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는 건, 조사받던 중 몰래 커튼을 들추고 훔쳐봐둔 검은 벽돌건물과 철길 풍경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다)..... 차에 태워서 어디까지 데려다줬던가?
어쨌든 그곳에서 풀려난 뒤에 누가 따라붙었다거나 가족들에게 붙잡혀 집에 연금됐다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고, 내 기억의 필름은 (내 신변에 '뼁끼칠'을 하기 위해 잠시 취직했던) J출판사 시절로 이어진다. 시국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느라 졸업도 못했지만 그래도 재주좋게 모출판사에 취직해 있던 친구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사장님도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고 편집장 역시 시국사범 출신이라, 졸업도 못하고 경험도 없는 나를 오로지 '운동권'이라는 이유로 구제해준 거겠지만(아마도 내 친구가 워낙 미모였기 때문에 노총각이었던 편집장이 거절을 못했을 수도.... ^^), 정작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도 모자라는 터에 내 마음은 저멀리 두고온 콩밭으로만 줄달음쳤으니....
편집부라고는 해도 작은 출판사라 제작부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이 신참내기는 원고 상태에서 초교를 보기도 했지만 주로 고참이 봐놓은 교정지를 인쇄소에 갖다주고 찾아오는 잔심부름을 도맡았는데, 한번 나갔다 하면 업무에 필요한 시간보다 꼭 두세시간은 더 쓰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당시만 해도 '植字' 인쇄를 했기 때문에 틀린 글자에 해당하는 활자들을 뽑아내고 맞는 글자를 골라 넣은 뒤 샘플을 찍어내는 동안 잠깐 기다리게 되는데 그 틈에 구로공단 가는 버스에 올라타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편집장이 나를 잠시 데리고 있는 군식구 대접을 했던 것도 당연하지..
당초 마음 먹었던 대로 딱 석 달 다니고 사표를 냈다. 그리고 얹혀살던 친구 집에서 나와 가리봉동에 다시 방을 얻었는데, '오십가구집'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 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한 가구당 두 평이 채 안 되는 소위 '닭장집' 출입문이 뺑 돌아가며 삼층까지 줄지어 있는.... 정말 아파트 한 동 만한 규모의 대저택(!)이었다.
그러나 정작 각 가구에는 수도도 들어와 있지 않아 마당에 설치된 딱 하나의 수도꼭지에 50가구가 매달려야 했는데.... 머리 잘 돌아가는 집주인, 그 수도꼭지 아래 큰 저수통을 묻어놓아 거기 받아놓은 물을 두레박으로 퍼서 쓰게 하였다. 그 집에 입주하고 두어 달 지나니 물이 꽁꽁 어는 계절이 되었는데, 저수통 주변에 흘린 물이 얼어붙어 높은 얼음비탈이.... 잘못하면 물 긷다 물통에 빠져버릴 지경이라 벌벌 떨던 생각이 난다.
한번 찍힌 몸이라 다시 취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어깨넘어 배워둔 미싱일이 가능한지도 시험해볼 겸 일단 집에서 가깝고 규모가 작은 봉제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에고고....미싱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손이 느리니 뒷공정에서 나오는 옷을 제때 처리 못해 늘 옷더미에 파묻혀 체면이 말씀이 아닌 데다.... 더 난감한 건, 심심하면 바늘을 분질러먹거나 미싱사라면 기본적으로 손 볼 줄 아는 조시(바늘땀이 뜨거나 당기는 것)도 못 맞춰, 짜증이 난 미싱기사는 내가 부르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ㅜ.ㅜ
한번은 보다못한 반장이 일어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내 옆에서 실밥 따는 미싱보조에게 네가 박아보라고 한다. 드르륵 드르륵 신나게 밟아대는 내 시다.... 세상에 이런 모욕이!!
현장활동이 다 뭔가... 앞에 쌓인 일거리와 씨름하느라고 남들 점심시간에 모여서 수다 떨 때도, 남들 모터 끄고 희희낙락 퇴근할 때도 혼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밟아대느라 혼이 나갈 지경.
허나 압박과 설움을 꾹꾹 씹어삼키며 내일을 기약하던 만옥이... 뜻밖의 사건으로 한 달만에 그 현장을 떠나야 했다. 어느날 퇴근길에, 거래처에 납품하러 왔던 막내오빠와 딱 부딪혔는데, 오빠도 나도 얼마나 놀랐던지.... 다짜고짜 손목을 틀어쥐고 '너 사는 데 어디냐, 가자!' 며 길거리에서 호통을 치는데 혼이 나가 그만 오빠를 자취집으로 데려가고 말았다.
내가 집을 나와 있는 동안 야학 쪽에 문제가 생겨서 그랬는지, 복학했을 때 학내에 조직했던 학습소모임 후배들 쪽에 문제가 생겨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남영동에 갔다온 일은 집에서 모르는 듯).... 아무튼 한동안 나를 찾아내라고 형사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그것도 모자라 오빠들 회사까지 찾아가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 얘길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났다. 클났다!! 오빠가 집도 알고 걸어놓은 작업복 봤으니 회사도 알았을 텐데.... 내 소신껏 갈길을 가는데 말리지 말라는 얘기가 집안 식구들에겐 어쩌면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형사들이 찾아와 추궁한다면.... 모르면 모를까 알면 거짓말 절대 못하는 순진한 우리 오빠들.... 분명히 형사 앞세워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당장 짐 싸라고 야단법석 하는 것을, 방 보증금도 돌려받아야 하고 어쩌고... 하면서 겨우 진정시키고 이번주 안으로는 꼭 집에 들어가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여 오빠를 돌려보내긴 했는데...
이제 '윗선' 언니가 구속되었으니 내가 현장일로 의논을 하고 도움을 청할 사람은 유일하게 71학번 선배밖에 없었다. 선배는 결혼한 자기 동생 집이 가깝고 방이 비어 있으니 일단 짐을 그리로 옮겨놓고 직장을 찾아보자고 했다. 본의는 아니었다 해도 어쨌든 같은 현장에서 진행시키기로 한 약속을 어그러뜨린 어설픈 후배가 미덥진 않았을 텐데.... 선배는 그런 내색 일체 없이 야밤에 와서 이삿짐도 싸주고 '이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론 잘 할꺼라'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암만해도 구로공단은 자신이 없어 인근 안양 지역으로 옮기기로 했다.
노동조건이 열악한 사업장은 그만큼 들락날락이 많아 취업도 쉽기 마련이다. 붕괴된 백화점으로 유명해진 S그룹 산하의 S산업.... 서울이 아니라 그런지 철야를 밥먹듯 하는데도 손에 쥐는 임금은 구로공단보다 나을 게 없었다. 관리자들의 욕설은 기본, 툭하면 따귀가 날아다니고 동료들 사이에서도 머리채 잡고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만큼 일이 거칠고 고되다는 얘기겠지.
게다가 식사는 '여물' 수준이고 기숙사는 '우리' 같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이 회사 노무관리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회사의 식당이었다. 의자가 없다. 멀건 김치국에 한숟갈 말아서 선 채로 후루룩 들이키고 얼른 가서 미싱이나 밟으란 얘기지. 이것이 이 회사 입구에 무수히 걸린 수출의 날 기념 무슨무슨탑 상패 뒤에 숨어 있는 '산업역군'들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다시 미싱에 앉게 된 나는 '이제 퇴로는 없다'는 심정으로 드르륵 드르륵 죽어라고 밟아댔다. 여전히 뒤통수에 꽂히는 구박을 견뎌가며....
'그 시절에(~2011) > 花樣年華' 카테고리의 다른 글
7080-17 : 청혼 (0) | 2006.04.25 |
---|---|
7080-16 : 슬픔이 슬픔을 만날 때 (0) | 2006.04.24 |
7080-14 : 눈 가리고 끌려간 곳에서의 일주일 (0) | 2006.04.20 |
7080-13 : '線'을 그러쥐다 (0) | 2006.04.19 |
7080-12 : 공순이라 불러다오 (0) | 2006.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