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친구와 우리 아들넘(아니, 어쩌면 우리 가족)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 여름이다.
당시 고2이던 아들넘이 한국에서 놀러온 형들에게 상해 구경을 시켜준다고 와이탄에 나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하남성 깡촌의 고등학생 濤... 이 친구도 방학을 맞아 처음으로 상해구경을 왔고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이 신기했던지 계속 따라다니는 통에 이런저런 얘기를 섞게 되었다고 한다. 헤어질 때 펜팔하자는 청을 얼떨결에 받아들여 우리 주소를 건네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한 달 뒤에 濤로부터 세 장 빼곡한 왕희지체(?)의 명문 서한이 도착했고 받았느냐는 확인전화가 왔다. 이어 한두 달에 한 차례 가량 비슷한 분량의 편지가 속속 도착했고 한번은 직접 그린 채색수묵화도 동봉되어 왔다. 주로 앞날에 대한 꿈, 그러나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농촌 고등학생의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중간중간 서투른 영어문장을 섞어 쓰기도 했다.
3년 반 중국에서 학교를 다녔다지만 영어로 수업을 하는 국제부 출신인 데다 수평고시는 어찌어찌해서 9급을 따기는 했지만 그래도 글 쓰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부담이 되는 한국학생으로서는 濤에게 답장을 하는 것이 학교숙제에 이어 또하나의 숙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딱 한번 답장을 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전화가 걸려오면 "답장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로 때우고, 편지 왔다 소리 들으면 자못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들넘...
그렇게 다섯 번쯤 편지를 받고 아들놈은 대학진학을 위해 한국으로 들어갔고, 그로써 濤와의 인연은 일단락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아들넘 수험생활 뒷바라지를 한다고 상해를 비운 사이에 濤가 상해에 왔었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남편 회사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왔다는 것이다
.
남편은 그동안 함께 읽어본 그의 편지내용에 근거해서, "네가 그런 희망을 갖고 있다면 일단 대학진학을 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당장 몇 푼 벌거나 경험을 쌓는 것보다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득하여 직원숙소에서 하루 재우고 기차표를 끊어주어 돌려보냈다고 한다.
남편에게 어떤 아이더나고 물어보니 심성이 착한 아이 같기는 한데 총명한 쪽은 아니고 주관적인 경향이 강하고 고집이 센 것 같더라고 한다(세상 물정 너무 모르고 눈치가 없다는 얘기겠지).
같은 중국인으로 어떻게 보았는지 알고 싶어서 濤를 본 회사직원에게 물어보니 별 말 안 하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든다. 상해 사람들이 외지 사람들을 깔보는 것은 기본이라고 쳐도... 막말로 하자면 별로 매력이 없는 친구인 게 분명했다.
한국에서
1년 있다가 상해로 돌아온 뒤 얼마 안 되어 나는 다시 濤의 전화를 받았다. 이 전화는 아들과 濤와의 관계를 나와 濤와의 관계로 전환시켜놓았다(정말 질기다).)일단 아들놈 안부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진로상담으로 화제를 끌고갔고
... 사실 좀 끌려다니는 기분을 배제할 수 없어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들놈이 끊어내지 않는 관계를 내가 야멸차게 끊어버릴 수도 없어서 어영부영....
그렇게 또 잊을 만하면 한번씩 전화가 오고.. 그러면서 호칭도 아줌마에서 숙모로 바뀌고... 어느덧 여름방학이 되자 대학생이 된 아들녀석이 상해로 들어와 濤의 전화는 아들녀석에게로 넘어갔다. 일방적인 관계에 회의를 느끼던 나는 이제 어른스러워진 아들놈이 적당히 이 선에서 관계를 끊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쌓이는 시간이 정이련가
.... 별 공통화제나 특별히 끌리는 구석도 없으면서도 밋밋하게 끌어오던 그와의 인연이 반가웠던지 아들놈은 오랜만에 그의 전화를 받고 뜻밖에 매우 즐거워하였다. 한술 더 떠 정주시에서도 300킬로나 떨어진 농촌의 자기 집에 놀러오라는 濤의 제의를 덥썩 받는 것이었다.<계속됩니다>.
'그 시절에(~2011) > 上海通信(舊)'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해부인 바람났네 (0) | 2004.07.14 |
---|---|
내 아들넘의 중국인 친구 2 (0) | 2004.06.25 |
오늘은 모기 타령 (0) | 2004.06.22 |
노래로 불러보는 해뜰날 (0) | 2004.06.19 |
중국에 사는 나에게 돌을 던져라 (0) | 2004.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