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上海通信(舊)

내 아들넘의 중국인 친구 1

張萬玉 2004. 6. 25. 13:15
 

이 친구와 우리 아들넘(아니, 어쩌면 우리 가족)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 여름이다.

 

당시 고2이던 아들넘이 한국에서 놀러온 형들에게 상해 구경을 시켜준다고 와이탄에 나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하남성 깡촌의 고등학생 ... 이 친구도 방학을 맞아 처음으로 상해구경을 왔고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이 신기했던지 계속 따라다니는 통에 이런저런 얘기를 섞게 되었다고 한다. 헤어질 때 펜팔하자는 청을 얼떨결에 받아들여 우리 주소를 건네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한 달 뒤에 로부터 세 장 빼곡한 왕희지체(?)의 명문 서한이 도착했고 받았느냐는 확인전화가 왔다. 이어 한두 달에 한 차례 가량 비슷한 분량의 편지가 속속 도착했고 한번은 직접 그린 채색수묵화도 동봉되어 왔다. 주로 앞날에 대한 꿈, 그러나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농촌 고등학생의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중간중간 서투른 영어문장을 섞어 쓰기도 했다.

 

3년 반 중국에서 학교를 다녔다지만 영어로 수업을 하는 국제부 출신인 데다 수평고시는 어찌어찌해서 9급을 따기는 했지만 그래도 글 쓰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부담이 되는 한국학생으로서는 에게 답장을 하는 것이 학교숙제에 이어 또하나의 숙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딱 한번 답장을 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전화가 걸려오면 "답장 못 해서 미안하다"는 말로 때우고, 편지 왔다 소리 들으면 자못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들넘...

 

그렇게 다섯 번쯤 편지를 받고 아들놈은 대학진학을 위해 한국으로 들어갔고, 그로써 와의 인연은 일단락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아들넘 수험생활 뒷바라지를 한다고 상해를 비운 사이에 濤가 상해에 왔었다고 한다. 여름방학에 남편 회사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왔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동안 함께 읽어본 그의 편지내용에 근거해서, "네가 그런 희망을 갖고 있다면 일단 대학진학을 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당장 몇 푼 벌거나 경험을 쌓는 것보다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득하여 직원숙소에서 하루 재우고 기차표를 끊어주어 돌려보냈다고 한다.

남편에게 어떤 아이더나고 물어보니 심성이 착한 아이 같기는 한데 총명한 쪽은 아니고 주관적인 경향이 강하고 고집이 센 것 같더라고 한다(세상 물정 너무 모르고 눈치가 없다는 얘기겠지).

같은 중국인으로 어떻게 보았는지 알고 싶어서 를 본 회사직원에게 물어보니 별 말 안 하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든다. 상해 사람들이 외지 사람들을 깔보는 것은 기본이라고 쳐도... 막말로 하자면 별로 매력이 없는 친구인 게 분명했다.

 

한국에서 1년 있다가 상해로 돌아온 뒤 얼마 안 되어 나는 다시 의 전화를 받았다. 이 전화는 아들과 濤와의 관계를 나와 濤와의 관계로 전환시켜놓았다(정말 질기다).)

일단 아들놈 안부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진로상담으로 화제를 끌고갔고... 사실 좀 끌려다니는 기분을 배제할 수 없어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들놈이 끊어내지 않는 관계를 내가 야멸차게 끊어버릴 수도 없어서 어영부영....

 

그렇게 또 잊을 만하면 한번씩 전화가 오고.. 그러면서 호칭도 아줌마에서 숙모로 바뀌고... 어느덧 여름방학이 되자 대학생이 된 아들녀석이 상해로 들어와 의 전화는 아들녀석에게로 넘어갔다. 일방적인 관계에 회의를 느끼던 나는 이제 어른스러워진 아들놈이 적당히 이 선에서 관계를 끊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쌓이는 시간이 정이련가.... 별 공통화제나 특별히 끌리는 구석도 없으면서도 밋밋하게 끌어오던 그와의 인연이 반가웠던지 아들놈은 오랜만에 그의 전화를 받고 뜻밖에 매우 즐거워하였다. 한술 더 떠 정주시에서도 300킬로나 떨어진 농촌의 자기 집에 놀러오라는 濤의 제의를 덥썩 받는 것이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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