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군식구 1 - 노할머니

張萬玉 2007. 2. 2. 15:09

집으로 놀러온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데 노할머니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신다.

"할머니, 혼자 어딜 가려고 그러세요?"

"어드메 가든지 상관 마. 안즉은 다리 성하니까 내 맘먹은 대로 내가 가는게지 뭐.."

--아유, 또 시작이시네.... 아니, 근데 할머니가 우리 집에 계셨단 말야? 그동안 밥상 한번 차려드린 적이 없는데, 그럼 그동안 그럼 내내 굶고 계셨던 건가?--  

이그 저 고집불통... 하던 짜증은 어디가고 이걸 어째... 하는 죄책감에 휘말리는 순간 잠을 깼다.

새벽녘에 꾼 꿈은 늘 생생하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다시 한번 필름을 돌려보게 된다.

혹시 노할머니의 혼이 그동안 계속 우리 식구들과 함께 계셨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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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할머니'(정확히 말해 남편의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신 건 1982년 추석 무렵, 당시 연세가 89세였다.

저녁을 먹다가 급한 전화를 받고 뛰어나간 남편 등에 업혀오신 할머니는 충격으로 빈사상태였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둘째아들 내외가 부부싸움 끝에 失火를 하여 아들내외는 사망하고 젖먹이 아이와 할머니는 구조되었단다. 지난 글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남편이나 나나 노동운동 한다고 가족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였고 결혼식 마저도 일가친척 불러 제대로 치르지 못해 양가의 세세한 내력은 거의 백지였던 탓에 솔직이 나는 남편의 외할머니가 살아 계신지, 어디 살고 계신지도 몰랐다.

신혼 단칸방인데다가 http://blog.daum.net/corrymagic/3810973 우리 둘 밥 끓여먹는 일조차도 뒷전이었던 경황없는 생활인데 어떻게 할머니를 모시고 사나?

 

그러나 사연을 들어보면 또 어디로 모셔가라기도 힘든 상황...

일찌감치 큰아들 내외를 콜레라로 잃고 둘째아들네와 함께 살던 노할머니, 그러나 며느리의 구박이 어찌나 심한지 견디지 못하고 딸네집에서 거의 살다시피했단다. 그러나 딸마저 비명횡사를 한 뒤 다시 둘째아들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이에 며느리가 바뀌었고 바뀐 며느리 역시 드세기가 첫번째 며느리 못지 않아 모진 구박을 피하느라고 구석방에서 숨소리조차 죽여가면서 살았댔는데.... 결국 이런 악연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양로원으로 모실 것도 생각해봤지만 호적상으로는 엄연히 장성한 손자가 있기 때문에(첫번째 며느리가 데려간) 그것도 여의치 않고... ' 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남편을 보니, 외할머니를 거둠으로써 어머니에게 못다한 한을 풀고 싶어하는 그 마음 어찌 내 모르겠나. 인척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생각해봐도, 몇 번이나 버림을 받은 끝에 어찌어찌해서 나의 단칸방까지 떠밀려온 이 가여운 양반을 나까지 내친다면..... (당시 나는 의협심이 넘치는 20대였다.)

할머니도 우리 사는 꼴 보면 아시겠지, 여기가 잘먹고 잘입고 대접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쯤은....'모실' 것까지도 없어, 그냥 함께 사는 거야.... 

 

그렇게 시작된 노할머니와의 동거가 10년이나 갈 줄은 몰랐다.

심심한 낮에 실컷 주무시고 나면 잠 안오는 밤엔 오두마니 신혼부부의 밤을 지키고 앉아계시니 땡빚을 내서라도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남편 팔베게 만큼이나 더 신경 쓰이는 건 잠귀 밝은 내 청각을 자극하는 그놈의 뽀시락 소리... 아마 귀가 어두워 못듣는 탓인지 늘 비닐봉지나 종잇장 같은 것을 손에서 녾지 않고 쥐었다 폈다 그치질 않는다. 그것 좀 내려놓으시라고 암만 얘기해도 못알아들으신 건지 잊어버리신 건지 또 뽀시락 뽀시락.... 견디다 못해 빼앗아놔도 어느새 뽀시락 뽀시락...

 

처음엔 거슬리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처음 며칠 누워계시던 이 양반, 일단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다음에는 부지런하기가 콩쥐 저리가라다. 나 퇴근 전에 밥을 해놓겠다고 달달달 떨리는 손으로 곤로에 불을 지피는 것을 옆방 아주머니가 위험하다고 말렸더니 깍두기 담으려고 사다놓은 무를 콩알만하게 썰어 간장에 담가놓으셨다. 불 다루는 일은 곧 포기하셨지만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라 빤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홑이불을 뜯어놓기도 하고 옷서랍을 홀랑 뒤집어 당신 생각대로 재편성을 하기도 하고 .... 급기야는 내가 옷을 꺼내려고 서랍을 열면 "어멈, 뭐찾어?" 하고 나서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무리 살림 내몰라라 해도 명색이 새댁인 나로서 마음이 편할 리 있겠는가. 

 

속을 끓이며 두어달 부대끼던 끝에 이 약삭빠른 외손주며느리 꾀를 내었다. 내가 저 양반이랑 오래 살려면 암만해도 할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신경을 끄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이었다. 즉 중요하지 않은 것은 '허용을 가장한 무시'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실력행사로 완전봉쇄'로 대응하는 거다. 

약오르면, 맘에 안 들면 어쩌실 껀데?

상대가 '어려운 시어머니'가 아니라 '갈 데 없는 시외할머니'이고 90이 넘은 극노인이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효심'과는 거리가 먼 못된 마음이지만 그래도 그런 꼼수가 우리의 동거를 큰 무리 없이 10년간이나 지속시켜주지 않았나 싶다.

 

할머니로서도 참 답답했을 것이다. 종일 가도 사람 구경 하나 못하고 밤이 되어서야 손주메누리라고 들어와서 두어마디 말대접 하면 그걸로 끝이니.... 허나 어쩌겠나, 나도 내 한몸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에 절어 사는데... 아니, 그렇게 고달프지 않았다 해도 귀 어두운 할머니의 얘기상대가 되어줄 만큼 인내심이 강한 것도 아니니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할머니에게 풀지 않도록 조심하는 걸로 며느리의 도리를 지켰다고 자위하는 수밖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