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군식구 3 - 노할머니 VS 해고노동자들

張萬玉 2007. 2. 13. 16:59

노할머니가 최초로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게 된 건 손자가 장기간 집을 비운 사이에 낯선 식객들이 대거 우리집으로 밀려들어왔을 때였을 것이다. 구로동맹파업 이후 해고와 공장폐업 등으로 1000여 명의 해고자가 거리로 밀려났다. 그들 중 재취업이나 귀향을 하지 않고 구로동맹파업의 정당성을 알리는 시위와 유인물 배포에 참여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허나 일정 기간이나마 활동을 지속하려면 어디 비빌 데가 있어야 하는데, 직장에서 쫓겨나고 주머니에 토큰 몇닢밖에 없는 처지였으니 예의고 체면이고 가릴 계재가 아니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맞이하는 사람도..... 그 동네에선 그게 너무나 당연했다.           

 

처음엔 여성 동지 두어 명이 나와 아들네미 쓰는 방에서 서너밤 자고 가는 정도였는데 점점 숫자가 늘어나 결국은 할머니 계시는 방까지 쳐들어가야 할 지경이 되었다. 할머니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다 정환이 아범 감옥에서 빼내줄 사람들이에요" 하는 수긍하기 어려운 압박으로 틀어막으니 할머니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 허나 사실 할머니는 일찌감치 남편의 '수상한' 행동에 대해 딸네 집에 계실 때부터 익히 알고 계신 터였다. 

 

명문대학 나와서 대기업에 입사했으니 이제 성공의 탄탄대로를 달려갈 일만 남았다고 믿었던 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공장 노동자가 된 충격으로 딸네미가 몸져눕는 것도 보셨으려니와... 손자녀석이 대기업에 다닐 때부터도 공장 다니는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밥도 먹이고 방문 닫아건 채 수상한 글을 가르치는 것도 자주 봐오셨다. 

이념전쟁으로 얼룩진 한국 근대사를 살아오신 할머니는, 집주인도 없는데 무례하게 할머니 방에까지 침범한 녀석들과 10여년 전 딸네 집에서 소근소근 역적모의를 하던 녀석들이 한패거리나 다름없다는 걸 대번에 알아채셨다. 그때 여러 사람 먹이려고 큰솥에 김치찌개를 끓인 것이 딸이었다면 지금은 외손주며느리라는 점만 달라진 것이지.             

 

공장 노동자 월급이라지만 그래도 남편이 꼬박꼬박 생활비를 갖다주었기에 근근하기는 해도 배를 주릴 지경은 아니었는데 식구는 늘어나고 돈 나오는 데는 없고....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다. 가끔 영치금에 보태라고 여기저기서 주는 돈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던가? 아마 김치나 담아 겨우 연명했겠지. 지금도 생각난다. 두돌이 안 된 아이에게 딴엔 영양식이라고 계란이라도 한 알 부쳐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고민이었던.... 어쩌다 사정이 되어 모두들 먹자고 계란 한 판을 사다놓으면 할머니는 "쟈는 멫알 먹고 쟈는 멫알 먹고...." 내게 이르기 바빴지.

 

그렇게 몇달 지내던 중 남자해고자들이 살던 방에서 쫓겨나 이젠 아예 우리집으로 쳐들어왔다.

그 방도 남편 퇴직금을 쪼개 얻어준 보증금 20만원에 월세5만원짜리 방이었는데 월세를 밀리다 밀리다 보증금까지 다 까먹게 된 거다. 허나 우리에겐 함께 할 중차대한 사명이 있었으므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함께 버텨야 했다. 결국 우리집은 남자들 차지가 됐고 나와 아들네미는 근처에 여자 해고자들이 모여 사는 집으로 옮겼다. 할머니 역시 가까이 살던 시누이 집으로....

 

이 년 전에도 그집에 잠깐 가계시긴 했다. 내가 아이를 낳을 때.... 

몸도 약하고 아이 둘에 직장 다니느라 힘들다고 만류했지만 "아들 둘 딸하나 다 앞세운 재수없는 늙은이가 같이 있으면 태어나는 애기에게 해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그러나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야 한다"며 보름도 못채우고 돌아오셨지. 시누이도 할머니께 잘했지만 그래도 아들, 혹은 손자만 자식으로 아시는 옛날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손주도 없이 콩가루가 되어가는 듯 보이는 집에다 대고 어찌 감히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겠는가.

 

그렇게 6개월쯤 살았나보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그집으로 복귀했는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 돌아와보니 집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열 명도 넘는 장정들이 11평짜리 집에 함께 살았으니 손바닥만한 부엌에서 물을 뒤집어썼는지 아궁이에는 물이 가득 차고 타일도 다 떨어지고.... 덥다고 현관문을 노상 열어놓고 살았는지 "웃통벗은 총각들만 우글우글한 수상한 집"으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여전히 가장의 자리는 비어 있지만 우쨌든 다시 모인 가족들 곁에서... 군식구들의 습격으로 인해 불안과 불만에 시달리던 할머니는 다시 안정된 나날을 되찾게 되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시절 사람들을 만나면 시위현장의 마스코트였던 우리 아들넘과 허리가 기역자로 꼬부라지고 잔소리가 많으셨던 노할머니 얘길 꺼내곤 한다. 할머니는 다행히 외손주가 세 번의 징역살이를 끝으로 그렇게도 당신이 소원하시던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버는' 것을 보고 돌아가셨다.

 

떡을 드시고 체해서 돌아가셨으니 그 험하게 지내온 세월에 비해 그래도 순조로운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외손주며느리 고생시킬까봐 곡기를 끊고 자리에 누우신 지 2주만에 고생과 한으로 얼룩진 99년의 생을 마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