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의 니노이2 공항*1)에 내린 건 거의 자정 무렵.
한국에서 400달러와 500페소짜리 네 장을 준비했지만*2) 마닐라의 택시운전사들은 대개 잔돈을 거슬러주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기에 100페소짜리를 좀더 마련하려고 공항 환전소로 가 지갑을 열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지갑이 텅 비었다.
여행다닐 때만 쓰는 지갑에 분명히 바꿔둔 외화를 넣은 것 같은데 지갑 안에는 오로지 한국돈 몇 만원과 필리핀에서 쓸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안 하고 우연히 끼워둔 신용카드뿐이다. 한국돈은 당연히 쓸모가 없을 테고 이 신용카드로 현금인출이 가능한지 어떤지도 모르는데.... 이 야밤에 난 어쩌란 말이냐. 당장 오늘 잘 곳으로 갈 택시비조차 없다니!
다행히 예전에 쓰다 남은 1달러짜리 45장을 고무줄로 꽁꽁 동여 비상시에 대비한다고 배낭 속주머니에 짱박아둔 생각이 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단 30달러만 환전했다. 약 1500페소... 이걸로 일단 오늘밤을 지내고 하루 정도 마닐라를 정찰하려던 계획을 바꿔 최대한 빨리 바기오로 가야한다.
낯선 도시에 남겨진 빈털털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사람을 쫄아들게 만드는지.... 졸지에 머리속이 뒤죽박죽이 되고 공항택시 쿠폰*3)을 사기 위해 지갑을 뒤적거리는(방금 환전한 페소인데 그걸 못찾아) 손마저 후들후들 떨린다. 어쨌든 빨리 공항을 벗어나 안전한 숙소로 가서 가방을 몽땅 뒤집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바기오의 가을바람 언니는 위험한 마닐라 밤거리에서 숙소 찾느라고 공연히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그냥 한국사람 많이 사는 환한 동네의 유명한 찜질방으로 가라고 하셨다. 필리핀에 와서까지 찜질방? 싶었지만 지금처럼 정신없는 상황에선 절대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 공항택시에 올라타고 "마카티 골프클럽 스파!" 하고 외치니 Javiere라고 자기 이름을 수놓은 유니폼을 입은 기사가 "OK!"하고 시원스레 화답한다.
'휴, 이제 됐다....!' (됐나?)
되긴 뭐가 돼....이 녀석이 데려다준 곳은 마카티 폴로클럽 앞이다. 인적이 거의 없고 숲이 우거지고 경비들이 곳곳을 지키는 그런 별장동네...
"아, 이녀석아.. 여긴 폴로클럽이잖아. 골프클럽 가자구."
"네가 폴로클럽 가자고 했잖아."
"난 폴로가 뭔지도 모르는데 내가 폴로클럽으로 가자고 했다고? 거짓말 말고 얼른 골프클럽으로 가."
"나 마카티 골프클럽 모르는데? 주소가 어디야?"
에구구 이 아줌마, 주소 적은 쪽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못찾겠다. 손을 덜덜 떨며 헛동작만 계속하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이녀석, 차에서 내려 폴로클럽 경비에게 묻더니 다시 시원스레 '오케이! 노 프러블럼!' 외치며 시동을 건다.
그런데.... 다시 차를 세운 곳은 마카티 골프클럽이 아니고 마닐라 골프클럽이다. 클럽하우스 부근에 눈을 씻고 봐도 싸우나 간판은 없다.
걱정이 돼서 따라 내리는데 서두르느라고 주머니에 구겨넣었던 500페소가 흘러나온다. 얼른 주워 지갑에 넣는데 이녀석 하는 말이 그거 자기 돈이란다. 점입가경이다. 이렇게 허둥대다간 마닐라에서 뼈도 못추리겠구나 싶어 정신이 번쩍 난다.
"네 이름 자비에르지? *****(차번호) 운전사 자비에르, 잘 들어둬. 내가 공항에서 환전한 돈이 1500페소고 여기 영수증도 있어. 경찰서로 가서 내가 가진 돈 전부가 얼마인지 뒤져보면 이게 누구 돈인지 확실해질꺼야. 어때, 그렇게 할까?"
정색을 하고 따지니 이녀석 싱그레 웃으며 "농담이야, 농담. 화내지 마라" 한다.
암만해도 이녀석하고 같이 그놈의 골프클럽인지 찜질방인지 찾기는 틀린 것 같고 어서 빨리 이넘에게서 벗어나야겠다 싶어 "됐다. 그럼 골프클럽 말고 파사이 빅토리 라이너(바기오 가는 버스) 터미널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싼 숙소로 데려다다오."
헌데 그넘이 내려준 곳은 큰길에서 좀 들어간 좁은 골목의 웬 홍등가 같은 모텔이다.
내려서 물어보니 2500페소나 달란다. 여긴 너무 비싼데? 하니까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겠단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거리에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렵긴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이녀석과는 빨리 헤어지는 게 좋겠다 싶어... 추가로 발생했을 운임을 생각해서 피같은 돈에서 100페소를 주어 보내고는 혼자 밤길을 걷는데.... 비록 큰길이지만 얼굴도 잘 안 보이는 어두운 거리에 웃통 벗은 사내들이 술을 마시는지 노름을 하는지 아무튼 웅성웅성 모여 있다. 새벽 한 시도 넘었는데....
이놈의 트렁크만 없어도 겁이 덜 나련만....가랑이에서 휘파람소리 나게 걸음을 재촉한다.
상대적으로 밝아보이는 건너편으로 가려니 그노무 육교 계단은 왜그리도 높은지... 평소에 신경쓰이던 무릎의 엄살은 어디로 갔는지 비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육교를 넘는다.
사진에선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 계단이 꽤 높다. 무릎을 90도로 들어올려야 한다.
아, 저기 밝은 불빛.... 허름해보이지만 꽤 규모가 있어 보이는 모텔이다. 다행히 마스터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곳이라 두번도 생각 안 하고 Check In.(750페소)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니 천국에 온 것 같다. 트럭 시동 거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가는 에어컨, 유성페인트로 떡칠한 초라한 실내, 녹슨 수도꼭지... 아무래도 좋다. 일단 가방부터 털어봐야지. 도대체 나의 여행자금은 어디로 간 걸까.(결국 나오지 않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확인한 사항이니 남의 손 탔을 리는 없고 분명히 지갑을 바꾸면서 빼놓고 온 게 틀림없다)
두어시간 기를 쓰고 난 뒤라 땀과 먼지로 뒤범벅된 몸을 씻고 나니 완전 탈진상태다. 이제 어쩌면 좋지?
모처럼 맘먹고 나선 길인데 마닐라에 틀어박혀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돌아갈 날만 기다릴 수도 없고....
바기오에 가서 언니에게 돈을 꿔? 언니도 형편이 그리 좋지는 않을 텐데 그것도 못할 짓이고...
에라, 모르겠다. 일단 쉬고 내일 아침에 생각하지.
침대에 몸을 던지니 벽 한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럽다.
피곤하긴 한데 잠은 멀리멀리 달아나 하릴없이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이건 또 웬일인가.
마지막 채널에서 포르노가 나온다. 야한 영화 정도가 아니라 1:4 진짜배기 포르노다.
깜딱 놀라 넋을 잃고 잠시 야동만옥이 되어 있는데 그러고 보니 천장조차 거울일쎄 그려...
참 살다 살다 이런 곳에서 다 자보는군. 허허허...
무심히 찍어둔 사진이라 천장에 붙은 거울의 적나라한 풍경을 보여줄 수 없어 안타깝다.
밤은 깊어가는데 밖에서는 오토바이 날아가는 소리, 가라오케 소리, 호객꾼 소리, 거기에 웬 닭우는 소리까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에휴, 내일이 오기는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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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노이2 공항 : 마닐라에는 세 개의 국제공항이 있는데 니노이3은 아직 개장을 안했고 니노이2는 필
리핀항공만을 위한 공항이다. 필리핀항공 외의 다른 항공편들은 니노이1에서 타고내린다. 물론 국내
선 공항은 또 따로 있다. 모두 거리들이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출발 전에 정확히 확인해두어야 한다.
*2) 페소로 직접 환전하지 않고 달러로 준비한 이유는 모두 페소로 바꾸면 부피도 크고, 사용할 금액이
얼마가 될지 모를 경우 쓰고 남은 페소를 다시 환전할 경우 손해가 나기 때문이다.
필리핀 교민들에 따르면 달러를 페소로 바꾸는 환율은 한국보다 필리핀 환전소 쪽이 더 좋다고 한다.
달러로 바꾸고 다시 페소로 바꾸는 데 드는 수수료와 직접 페소로 단번에 바꿔오는 데 드는 수수료
어느쪽이 더 많이 들지는 따져보지 않았다.
참고로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최소 화폐단위는 500페소이고 공항 환전소는 자정 넘으면 문 닫는다.
*3) 공항택시 쿠폰 : 낮에 도착하면 여러가지 교통편을 이용하여 시내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자정 무렵이
되면 택시를 탈 수밖에 없는데, 공항 밖으로 나가 일반택시를 이용해도 되지만 마닐라가 아직 낯선
분들은 안전한 공항택시를 이용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마카티 기준 쿠폰택시 440페소, 일반택시 약
200페소 미만). 마닐라 택시 운전사들.... 돌아가기, 요금 속이기, 잔돈 안 주기 등 악명이 높은데 심
지어 외국 관광객에게 은근히 겁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안전을 보장하는 공항택시의 운전사 자비
에르조차 나 놀려먹는 것좀 봐라. ㅡ.ㅡ
* 참고사항 : 페소가 얼마만큼의 돈이냐 하면... *20하면 한국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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