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Mabuhay! 7 : 올롱가포, 올롱 가고 시포!

張萬玉 2007. 4. 24. 14:29

온천욕이 정말 효과가 있나보다. 장닭이 홰 치는 줄도 모르고 아침 일곱시가 되도록 푹 잤다.

언니는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신 걸까. 어젯밤에 욕실로 모신 그 많은 빨래들이 벌써 햇빛 쬐러 베란다로 나갔고 아래층에서는 향긋한 커피냄새가 올라온다. 

 

서양사람은 토스트와 커피로, 한국사람은 구수한 된장국과 흰쌀밥으로 아침을 끝내고

이제 오늘의 여정을 연구할 시간. 

제1차 후보지는 언니가 얼마 전 성당 어르신들과 다녀왔다는 파라다이스 리조트.

보라카이처럼 아름다운 해변인 건 틀림없겠는데 가는 방법을 알아보니 대중교통편이 없는 데다가 택시로 가기에는 너무 멀다. 바기오 남서쪽에 있으니 일단 버스를 타고 마닐라 방향으로 웬만큼 이동하여 택시를 타면 어떨지 물어보니 그렇게 가도 여섯시간, 바기오에서 지름길을 택해 가도 여섯시간이란다.

그렇다면 갈 때 뿐 아니라 하루 묵고 돌아올 때까지(게다가 올 때 방향조차 두 개로 갈린다) 택시를 대절하는 방법 밖에 없는데...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더한 데라도 그건 좀 아니다 싶다. 

 

아쉽지만 두 번째 후보지 물색. 

론리 플래닛이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우리의 합리적인 선택은 올롱가포 밖에 없는 것 같다. 인근의 수빅만이 오염되었다는 썰이 있어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필리핀의 해변인데 기본은 하겠지. 이왕이면 북적이는 해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발로이 롱 비치 쪽으로 가보기로 결정하고 빨래가 다 마르는 정오쯤에 떠나기로 한다.

 

오전 9시 반. CD를 구워줄 SM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그 앞에 있는 스타벅스는 문을 열었다.

마닐라 파사이 터미널에서 만났던 성희엄마가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보자고 연락을 해왔기에(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약속은 흐지부지 되기 마련인데 고맙기도 하지) 바기오 사람들끼리 얼굴이나 익히라고 언니랑 함께 나가 오붓한 애프터....

 

바기오 사람들끼리 수인사를 하는 동안 나는 3층의 CD점으로 1층의 사진관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이 동네는 CD를 구으려면 공CD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관에서 공CD까지 제공해주면 좋겠지만 아마 공CD값이 CD굽는 비용에 육박하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CD 굽는 비용이 이미지 100개당 75페소, 추가되는 이미지 1개당 1페소씩 더 붙는데 공CD값은 75페소)

어설픈 샷이나마 욕심스럽게 꽉 채운 메모리 카드 두 개와 함께 방금 3층 CD점에서 에서 사온 공CD를 맡겼는데.... 이게 웬일인가. CD에 문제가 있어 이미지를 옮기지 못하겠다네.

'미안하지만 너희 가게에서 쓰던 거라도 좋으니 공CD 하나 팔아라. 내가 새 걸 다시 사와도 되지만 또 안 될까봐 겁나서 그래. 도와주라, 응?'

 

친절한 사진관 아가씨 덕분에 300여 개 이미지를 무사히 이사시키고

스타벅스에 돌아와 성희엄마에게 환불이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아마 어려울껄요? 한다.

우쒸~ 그런 게 어딨어. 바기오 떠나기 전에 내 필리핀 상인들에게 확실한 商道를 가르쳐주고 말리라.

3층으로 올라가 영수증 내보이며 환불해달라고 하니 성희엄마 예상대로 어린 두 점원, '환불이 어느나라 말?'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한다. '내가 사간 거 맞고 CD가 불량인 것도 인정한다면서 왜 환불을 못해주니? 너희는 CD공급자하고 계산하면 되잖아....' 하니까, 지금까지 환불해줘본 전례가 없어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아이고 頭야! 그걸 말이라고 하니? 

'오홋! 오늘의 adventure가 시작되는 건가?' 은근히 신이 나는 만옥이... 장기전에 대비하여 구석에 있는 의자를 들어다 카운터 앞에 놓고 주저앉는다. '매니저 좀 불러줄래?'    

허나 10분도 안 되서 턱수염 기른 아저씨가 나타나더니 두말 않고 환불해준다. 너무 싱겁게 끝났다. ^^  

 

환전하고 쇼핑하며 혼자 놀던 Victor를 만나 짐을 꾸려가지고 빅토리 라이너 터미널로 갔더니....거기는 올롱가포 가는 버스는 없다. 구 터미널에 있단다. 오잉? 빅토리아 라이너 터미널이 두 개였어? 마닐라에서 돌아왔을 때 내린 터미널은 신 터미널이었군. 택시로 서둘러 구터미널로 가니 마침 올롱가포 행 버스가 막 떠나려고 한다. 표도 안 사고 일단 승차!

Victor는 언니랑 같이 앉으라고, 언니는 Victor랑 같이 앉으라고 모두 내 옆자리를 사양(요건 내 생각이고 사실은 이 수다쟁이를 피해서였을 듯. ^^ ).... 결국 모두 따로 자리를 잡고 각자 새로운 필리핀 파트너를 기다린다.  

 

출발시간은 2시... 6시간 걸린다고 하니 여덟시쯤이나 되어야 올롱가포에 떨어지겠군.

낯선 곳에 밤에 도착하는 스케줄은 가능한 피해야 한다. 교통편이나 숙박지 고를 때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바가지 쓰기 십상... 그로 인해 그곳 자체가 싫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하이웨이를 달려가는 버스. 정신없는 성룡영화 대신 촌스럽고 애수어린 old pop을 틀어준다. 미국 통치의 영향을 아직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필리핀, 그래서 그런지 거리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음악 역시 그시절의 팝송이다. 내가 자라던 시절의 우리나라 청년문화도 그랬고 그로 인해 나의 감수성 깊은 곳에도 그노무 양키 음악에 대한 기호가 또아리 틀고 있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가장 감수성이 풍부한 시절에 즐겨듣던 음악이 결국 평생을 간다던가. 오랜만에 듣는 그 시절의 음악은 지평선 저 멀리에서 피어오르는, 범선의 돛 같기도 하고 고풍한 성 같기도 하고 초원의 양떼무리 같기도 한 구름에 내 마음을 실어 추억의 바다로 두둥실 띄워준다. 이 기분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일행이 있으면 있는 대로 즐겁고 혼자면 혼자인 대로 행복하고.... 그래서 난 버스여행에 빠지는 거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은 사진이라 시원찮지만 이날 찍은 사진이 워낙 없어서.....

 

마닐라 방향을 버리고 로사리오로 접어들어 한 시간 정도 달리니 다구판이다. 

어느새 마을버스로 변신한 우리의 빅토리 라이너는 곳곳에서 사람들을 내려주고 태워준다. 그 틈에 메추리알, 사탕, 소시지 등 군것질꺼리를 파는 상인들이 잽싸게 올라와 한바퀴씩 돌아주시고.... 

아직 갈길은 먼데 날은 벌써 저물고... 이렇게 느긋하게 가다간 어느 세월에 도착할까. 사방이 캄캄하니 마음에 드는 해변을 찾아서 숙박지 정하기는 어렵겠구나. 예상보다 먼 길에 슬슬 초조해지면서 아침에 서둘러 떠나지 않은 일이 후회되기 시작한다.

나혼자 몸이면 자정에 도착한들 무슨 상관이랴. 허나 언니는 컨디션도 안 좋으시다. 아마도 내려서 우리는 해변으로 또 이동을 해야 할 텐데.... 어쩌면 좋을꼬. 

 

 

 딸락을 지나 밤반에서 잠시 휴게소 정차. 이 칼라풀한 간식들의 정체는.... 떡이다.

 

 

이 칼라풀한 액체들의 정체는? (너무 쉬운가요? ^^)

 

저 멀리 높은 곳에서 빨간 등이 깜빡거린다. 아마도 클락 공항? 바기오에서 세 시간 거리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멀군. 이 일대는 어둠에 묻혀 허허벌판으로 보이지만 간간이 나타나는 호화리조트의 불빛으로 미루어 수빅 경제특구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어 앙헬레스 쪽 이정표가 나오고 야단스러운 술집이 즐비한 동네가 나타난다. 이 일대를 답사하다 보면 수빅 미해군기지가 있었던 흔적들을 볼 수 있겠군.

 

수난절 십자가 행사로 유명한 팜팡가를 지나니 아마도 해변도로? 다시 그 지겨운 S라인 시작이다. 시간은 이미 도착해야 하는 시각 8시를 넘겼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지? 초조한 마음에 이사람 저사람 붙들고 계속 같은 질문을 해본다.   

 

'올롱가포 멀었어요?'

'올롱가포 사세요? 거기서 발로이 비치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저 올롱가포 가는데.... 너무 머네요. 올롱가포, 올롱 가고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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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드디어 올롱가포 도착! 언니는 거의 초죽음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해변으로 가는 지프니들이 줄을 서 있고 호텔 삐끼를 겸하는 지프니 운전사들이 몰려드는데 도무지 뭐라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일단 조용히 시키고 줄을 세운 뒤에 들어보니... 오메, 무슨놈의 시골 호텔들이 그렇게 비싸다냐.  

베테랑인 Victor가 나선다. '그럼 일단 해변으로 가자. 우리에게 그 호텔들을 모두 보여다오. 마음에 드는 곳을 정할 때까지 네 지프니를 쓰기로 하고 가격은....'

 

가격을 가지고 또 잠시 옥신각신.... 갈길이 멀고 고단하여 웬만하면 오케이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에게 이녀석, 맘먹고 바가지를 씌우려고 한다. 멀리 가봐야 30분 이내 거리인데 간도 크지, 500페소를 부른다. 헌데 눈치를 보니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마을 사람들끼리라 그런지 맨 앞에 세워놓은 지프니 운전사가 찜한 고객에 대해서는 아무도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구만.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애써서 300페소까지 내려놓고 Victor가 내 눈치를 살핀다. 발생하는 모든 비용에 대해 똑같이 분담하는 한 팀이기에 협상을 책임진 사람은 팀원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고 팀원들은 최선이 아닌 차선이라 하더라도 일단 결정이 난 이상 기꺼이 따라주는 것이 예의.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지프니에 올라 처음 도착한 리조트 By the Sea... 욕실이 딸린 standard room이 1200페소다. 이 동네 물가를 전혀 몰랐던 우리는 시설 대비 가격이 비싸다고 다른 곳을 보자고 했지만 줄줄이 나오는 다른 리조트들의 방값은 3000페소, 5000페소.... 점입가경이다. 어차피 내일 하루 이 동네에서 더 묵을 테니 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고 밝은날 더 좋은 곳이 있으면 그리로 옮기기로 한다. 

지프니 기사 녀석, 끝까지 밉상이네.... 팁으로 100페소 더 달란다. 필리핀에서 택시기사에게 팁 주는 게 기본 예의에 속하긴 하지만 겨우 20분 달려놓고 마닐라 공항택시만큼이나 비싸게 받으면서 팁까지 요구하다니.... 피로와 짜증이 한꺼번에 확 올라온다.

 

징글징글한 지프니 운전사 보내놓고 체크인을 한 뒤 밥을 먹으러 갔더니 식당이 문 닫기 직전이다.

11시가 되도록 밥도 못 먹었지만 지친 데다 기분까지 잡쳐 어디 밥이 들어가겠나. 빈 속에 맥주만 사정없이 들이부었다. 

아직도 사흘이나 더 남았는데 벌써 김새는 기분이라니...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