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기오로 가는 첫차를 타기 위해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났다.
세면도구를 챙겨들고 공동욕실로 가려고 방문을 나서는 순간
옴마야! 방문 앞 복도에 웬 소림사에서 방금 튀어나온 스님 같은 이가 칫솔을 물고 서 있다.
손가락으로 찔러도 안 들어갈 것 같은 구릿빛 탄탄한 근육에 요란한 문신도 있고 머리마저 빡빡이다.
잠도 덜 깬 마당에 혼비백산하여 내 방으로 숨었다가 발자국소리 물소리가 그친 뒤에 나와 세면을 마쳤다.
나중에 버스를 탔는데 그 청년이 애인이랑 내 앞자리에 앉았더라. 다정히 머리를 맞댄 채 색색 자더군.
도대체 뭐가 무서웠던 거야? 실소가 나온다.
나름대로 품위도 있고 손님도 꽉 차 있는 그 호텔, 더군다나 복도에서 무슨 무서울 일이 있다고...
모르면 무섬을 타게 되어 있다. 실체를 정확히 알게 된다면 공연한 무섬증의 상당부분은 사라질 것이다.
욕실 얘기가 나왔으니 엊저녁에 겪었던 난감상황 하나 더.
필리핀 화장실에 설치된 변기 중 상당 부분은 물 내리는 스위치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 어떻게 내용물을 쓸어내리느냐.... 내려갈 때까지 바가지로 하염없이 퍼부어야 한다.
어제 요거트 하우스에서 저녁 대신 먹은 초농축 요거트 덕분에 오랜만에 숙원을 푼 것까진 좋았는데....
뒷처리를 하려니 화장실 수도꼭지라고 쬐끄만 세면대에 붙었고 반면 물받을 그릇은 제법 큼직한 양동이.
그 좁은 공간에 그 큰 양동이를 옆으로 뉘어 밀어넣고 최대한 물을 많이 받아낸다는 거...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을 요한다. 아무리 많이 받아도 세면대에서 꺼낼 때 다 엎질러지는 걸.
표주박 하나 정도의 물을 겨우 얻어내 부어봤자 변기 안의 내용물은 요지부동..(상상하게 해드려 죄송. ^^)
진땀을 흘리며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밖에선 연신 문을 두드린다.
그냥 나갈 수도 없고... 다급한 김에 튀어나온다는 소리가... "Wait! I have to wash up my stuff!"
stuff? ㅎㅎㅎ
shit 라고 할 수도 없고 thing이라고 할 수도 없고... 저녁 내내 이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아 낄낄낄...
암튼 각고의 노력 끝에 높은 곳에서 구멍을 정조준, 단호하게 내리붓는 기술을 개발한 결과
stuff 쓸어내리기 성공!
체크아웃하고 나간 것은 새벽 다섯시 약간 넘은 시간. 아직도 어둠에 잠겨 있는데 터미널에는 100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나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여행중엔 다들 제정신이 아닌개벼.
한 청년이 "한국분이시죠?" 하고 말을 걸어온다. 군 제대 후 복학 전까지 어학연수를 하려고 마닐라에 와 있다는 Collin이란 학생... 우리 아들보다 앳되 보이는 해맑은 얼굴이다. 그리고 그의 일행들이 인사를 청한다. 마닐라 국제공항 면세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Sam과 그의 동료 둘, 그리고 호주아저씨 Victor....
바나우에에서 만나 바타드 트래킹을 같이 하고 사가다로 함께 이동하여 동굴탐험도 같이 했단다. 고생길을 같이해서 그런지 팀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하다.
버스가 와서 자리를 잡다 보니 맨 뒷좌석이 모두 우리 차지가 됐다.
내 옆자리에 앉은 Victor는 중국 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상하이-충칭-장강삼협-판지화를 거쳐 운남성 일대까지, 또 어디라더라? 아무튼 내가 즐거워하며 다녔던 길을 모조리 섭렵한 중국여행 매니아일 뿐만 아니라 동남아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닌 지 십 여 년이 넘었다는 진짜배기 배낭여행족이다.
서양사람 중 (소박해서) 가장 사귀기 편한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인 데다가 문화적 편견도 없고 여행에 대한 취향도 비슷하여 나와는 죽이 척척 맞았다. 얼핏 보면 오십 대 중반의 진지한 인상인데 신나게 얘기할 때 보면 영락없는 이십대의 얼굴이 된다. 짬짬이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기에 내가 장난삼아 몇 자 테스트를 했더니 "Hold on, Hold on...." 하며 끝까지 포기않고 머리를 쥐어짜내는 모습이 귀엽기조차 하다.
금융컨설턴트라는 그는 새로 근무처를 옮긴 지 3주 만에 이번 여행을 감행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놀라니 자기는 원래 한 달에 8일씩 쉬게 되어 있는 법정휴일들을 모아 일 년에 한두 달 여행을 하는데 지난번에 있던 회사에서는 너무 바빠 휴가를 챙기지 못했단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 둔 뒤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중 새로운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는데 거절하긴 아깝고 항공편 부킹은 해놓았고.... 그래서 인터뷰를 할 때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단다. (우리 나라 같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주로 아시아를 다니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아시아를 좋아하느냐 물으니 간단하다. "싸잖아!"
왜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내게 되묻는다. 너는 왜 여행을 다니니?
셋째,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그 과정이 좋다. 내 속의 모험심과 함께 자신감을 일깨워준다.
둘째, 다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생생하게 배우는 게 좋다. 이렇게 배운 지식은 뼈속에 새겨진다.
첫째,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다. 넓어지는 나를 느낀다.(오홋! 갑자기 이렇게 정리가 잘 되다니.... )
내 제법 명쾌한 대답에 Victor도 '100% 동의!'라고 외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서양 남자 혼자 아시아를 즐겨 찾는다는 얘길 들으면 일말의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나... 속물인 거지?)
어쨌거나 이 사람은 그저 허투루 돌아다니는 족속 같진 않다. 아시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도 해박하고 안이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맛갈진 경험담도 꽤 많이 갖고 있고...
"Look, Don't judge" 이것이 무질서와 속임수가 상식처럼 되어 있는 후진적인 나라를 여행하면서 불쾌함을 느끼게 될 때 늘 자신을 타이르는 말이란다. (흠~ 마음에 들어..)
처음에 함께 얘기를 하던 멤버들이 하나둘씩 곯아떨어졌지만 우리는 버스가 바기오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장장 여섯 시간을 떠들었다. 조상이 스코틀랜드인이라는 그의 낯선 억양에 적응을 못하여 처음엔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게다가 입도 작게 벌리고 소곤소곤 얘기한다) 못 듣고 지나간 말들도 많았지만 오래 얘길 하다 보니 꽤 적응이 되었다 (못알아 듣는 건 자꾸 되묻기 미안하니 애매한 미소로....^^ )
휴가 기간이 앞으로 엿새 정도 더 남았다길래 앞으로의 예정을 물어보니까, 자기는 특별한 예정이 없으니 괜찮다면 내가 계획하고 있는 비간과 라오왁, 빠꿋풋 코스에 동행하고 싶다고 한다. 언니와 동행하게 되어 있는 길이니 언니만 동의하면 상관없지 뭐. 언니에게 전화해 물어보니 언니도 동의하신다.
그렇다면 잘됐네, 언니네 민박집으로 유치하여 영업실적 한껀 올려보세!
도미토리로만 돌아다녔기땜에 하루쯤 빨래도 하고 가방도 뒤집었으면 했는데 잘됐다고 Victor도 좋아한다. 한술 더 떠서.... 오늘 오후에 언니랑 바기오 근교의 Hot Spring 가기로 했다니까 크게 기뻐하며 지금 자기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런 거였다며 따라가야겠단다. Sam과 그 친구들까지도 자기네는 밤차로 돌아가면 되니까 자기네도 붙여달란다.
아웅! 졸지에 일이 커졌다.주소를 알려주고 알아서 가라고 해도 되지만, 같은 곳에 가는데 지금까지 같이 움직이였던 멤버들을 떼내는 게 어디 쉬운가. 마음놓고 퍼져야 하는데 외국남자 네 명을 거느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살짝 짜증이 난다.
"너희 Hot Spring 가봤어? 한국사람은 습관이 돼서 괜찮지만 처음 가보는 사람은 발도 못 담그는데?"
"아냐 아냐... 그런 데 한번도 못가봤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가보겠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택시 대절해서 가야 하는데 두 사람 자리가 모자란다. 두 대 빌리면 돈 많이 들 텐데?"
"아냐 아냐... 밴 부르면 돼. 요금도 똑같고... 요금협상은 내가 할 테니 걱정 마(Sam)"
으휴, 찐드기들... 언니에게 전화하니 부담스러워 하는 건 언니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발생한 사태를 수습 못한 채로 버스는 이미 바기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똑같이 내일부터 학업과 업무로 복귀해야 하는 처지인데 Collin은 한국학생답게 마닐라로 돌아갈 티케팅을 서두르고 Sam과 그 친구들은 어차피 고속도로가 밀릴 테니 Hot Spring 갔다가 밤차 타고 내일 새벽 마닐라에 떨어지겠단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버스터미널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재주 좋은 Sam이 Van을 잡아 언니가 얘기하던 것보다 싼 가격에(800페소) 협상을 마쳤다. 두 명은 아예 좌석 뒷자리 짐 싣는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네 그려.
언니네 들러 Victor와 내 짐을 부려놓고 언니를 태운 뒤에 Van은 Camp1을 향해 달려간다. 주로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돌아다니던 지금까지의 산길과는 달리 깊고 축축한 골짜기를 돌고 일본군이 곳곳에 뚫어놓았다는 금광과 거기서 흘러내리는 누런 계곡의 물길을 지나 한 시간쯤 달리자 멀리 계곡 사이에 걸린 흔들다리가 보인다.
노천온천이라고는 딱 한번, 백두산 갔을 때 대우호텔에 딸린 온천에 가봤는데.... 그땐 남탕 여탕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여기도 그럴 꺼라고 생각했는데 오머머~ 여기는 수영복을 입는 대신 남녀가 같이 스파에 들어가게 되어 있네그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면 수영장에 온 셈 치고 내외할 필요가 없겠지만 여태껏 친한 척 떠들던 사람, 그것도 서양남자 앞에서 잘빠진(!) 몸매를 드러내자니 왜 그리 쑥스러운지.
언니가 가져온 얇은 천을 온 몸에 둘러 최대한 노출을 막고 (역시 매몰차게 떼어냈어야 했어!! 궁시렁거리며) 탕에 들어가니.... 아이고, 민망한 게 어딨고 후회가 어딨어! 이렇게 좋은걸!!
계란 노른자 냄새 나는 뜨끈한 유황온천수에 뼈가 다 녹을 지경.
잠깐 앉아 있었는데도 그간의 여독이 한꺼번에 풀리는지 땀이 비오듯하고 어찌나 잠이 쏟아지는지....
버티다 지치면 찬물 뒤집어쓰고 조금 쉬었다 다시 들어가기를 몇차례....Victor와 Sam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연신 two thumbs up! 온천욕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나는 내내 비몽사몽....몸도 못가누겠다. 한국의 찜질방처럼 어디 한구석이라도 등 붙일 데가 있었으면 아마 그대로 뻗어버렸을 거다.
헌데 온천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신기하게도 온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당장 먼길을 떠나라고 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원기가 살아난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온천을 찾는 모양이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머리칼을 헝클어놓았어도 온천욕을 한 뒤라 모두들 뽀샤시하다. ^^
돌아오는 길에 바기오시 입구에 세워진 대형 사자머리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 찍고
(키다리 Victor... 193cm란다)
Sam과 친구들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밤이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으면 편했을 텐데 택시가 바로 집앞에 내려주는 바람에 얼떨결에 파란눈의 외국인에게 한국식 밥상을 차리게 된 가을바람 언니.... 호주 있을 때 한국음식 많이 먹어봤다고 호언장담도 하겠다, 에라, 이럴 때 아니면 네가 언제 한국식 밥상 받아보겠니 하고 평소 먹던 짭짤한 밑반찬에 매콤한 닭도리탕, 그리고 구수한(!) 된장국이 올라오니 된장국만 'No thank you' 하고는 정말 다른 반찬들모두 잘 먹는다. 조금씩 집어먹어야 마땅한 밑반찬들도 main dish인 줄 아는지 놓은 대로 싹싹...
(속으론 그랬겠지. 한국사람들 진짜 짜게 먹는군.. ^^ )
참, 그런데 여행 스케줄에 문제가 생겼다.
낮에 바기오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해보니 부탁해둔 라오왁-마닐라행 비행기표가 안 구해진 거다.
아이고, 그럼 빠꿋풋에서 마닐라까지 열 세 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 한다는 얘긴데... 장거리 버스가 이젠 지겹기도 하고... 그보다도 귀중한 하루가 맥없이 날아간다. 이를 어쩔꼬.
언니가 그렇게 가고싶어하던 비간, 내가 그렇게 가고싶어했던 빠꿋풋이었건만... 도무지 방법이 없다.
고심 끝에 북쪽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포기하고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마닐라 가는 길목에서 어느 좋은 해변을 찾아 놀고 가는 게 순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Victor에게는 코스가 바뀌었으니 이제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했더니 글쎄 이 친구....자긴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 그냥 인연을 따르겠단다. 엑.... 인연?!
뭔가가 꼬여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오늘 하루 해는 다 갔다.
떠나더라도 오늘밤에 빨아널은 빨래가 다 마른 내일 오후에나 길을 떠날 예정이니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한다. 자, 빨래 시~작!
'여행일기 > 아시아(중국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Mabuhay! 8 : 냉정과 열정 사이 1 (0) | 2007.04.26 |
---|---|
Mabuhay! 7 : 올롱가포, 올롱 가고 시포! (0) | 2007.04.24 |
Mabuhay! 5-1 : 영혼이 깃든 마을, 사가다 (0) | 2007.04.20 |
Mabuhay! 5 : 본톡 찍고 사가다로 (0) | 2007.04.19 |
Mabuhay! 4-1 : 본톡행 공포특급 (0) | 2007.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