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아시아(중국 외)

Mabuhay! 8 : 냉정과 열정 사이 1

張萬玉 2007. 4. 26. 09:34

어제 저녁에 버스 안에서 보았던 대단한 석양으로 미루어 이 해변의 일출 역시 장관이리라 기대하며 동 트기 전에 일어날 마음을 먹고 잤더니 새벽 다섯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직 해뜨기 전이라 손전등을 들고 해변으로 나가본다. 찰싹거리는 잔물결 소리만이 해변의 정적을 희롱할 뿐 바다는 어둠에 싸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검은 하늘에선 샛별이 반짝반짝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인적없는 바닷가가 위험하진 않을까, 좀 있다가 올까... 하고 돌아서려다 보니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 옆에 경비 한 사람이 이쪽을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고마운 경비 덕분에 마음놓고 해변을 이리저리 걸어본다.

해변은 생각보다 짧다. 아니 해변이 짧은 게 아니라 PET병들을 엮어 표시해놓은 이 리조트의 영역이 작은 거지. 무슨 상관이랴, 해변이 짧은 게 불만이라면 헤엄쳐서 옆집 해변으로 가 놀면 된다. ^^

근데 좀 수상하네? 수평선을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해가 나왔는지 흔적도 없이 사방이 밝아졌다. 해변의 왼쪽 하늘이 발그레 상기된 척 하더니 그게 전부였다. 일출 보려고 설잠 잤는디...여기는 해뜨는 해변이 아닌개벼.

 

그래도 바다가 고운 옥색이라 다행이다. 눈부신 흰모래에 화려한 물빛은 아니지만 만족한다. 

이제 겨우 아침 6시. 아직도 일행이 일어나려면 멀었겠다 싶어 동네 한바퀴에 나선다.

더 좋은 숙소가 있나 물색도 할 겸.....

 

 

우리가 가려던 발로이 비치는 건너편 산모퉁이를 돌아 좀 더 가야 한다는데 거기서 거기겠다 싶었고...

저 건너 근사해보이는 리조트는 비싸기도 비싸지만 퍼블릭 비치라 몹시 번잡할 것 같아서 탈락.

그 리조트부터 우리 숙소까지 늘어서 있는 숙박시설들을 대강 뒤져봤지만 하나같이 우리 숙소보다 지저분한데 비싸기는 더 비싸고, 가라오케 기계가 여기저기 놓인 걸 보면 번잡할 게 뻔하다. 다른 데 보지도 않고 얼떨결에 결정한 숙소인데 결과적으로 이 동네에선 가장 바람직한 숙소를 고른 거다. 운도 좋지...

이로써 간밤의 개운찮던 기분이 말끔해졌다. 오늘 하루 원없이 놀다 가야지.

 

숙소로 돌아오니 언니가 레스토랑에 나와 계신다. 벌써 해변 한바퀴 도셨단다.

그런데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서울에서 계속 전화가 오고 있는데 밧데리가 다 돼서 받을 수가 없단다. 콘센트 구멍이 달라 충전도 할 수 없고....웬지 긴급한 전화 같은 예감에 불안해서 도저히 오늘 하루 여기서 맘 편하게 놀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미안하지만 나 먼저 돌아가면 안되겠냐고....

아니, 어제 그렇게 힘든 길을 왔는데 잠깐 눈붙이고 그 먼길을 되짚어가신다니....

그것도 그렇지만 Victor랑 나랑 달랑 둘이 해변에 남겨놓고.... 저더러 어쩌란 거예요. 얄궂어라..

 

허나 언니는 아침 먹고 바로 가겠다는 뜻을 꺾지 않으신다. 물론 전화 때문에 그러신 거겠지만 안가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시내 나가서 어댑터를 사거나 (나중에 Victor에게 그게 있다는 것도 알았는데) 전화카드를 사서 한국에 전화해봐도 되지. 암만해도 언니는 여기가 마음에 안 드시나보다. 컨디션도 여전히 바닥이시고....혹시 내가 언니보다 Victor에게 더 신경쓰는 것처럼 보였을까?

아침을 먹으며 Victor에게 언니가 돌아가야 하는 사정을 전하자, '힘들게 와서 바로 가야 하다니 안됐다'고만 할 뿐 서양사람 답게 굳이 잡지 않는다. 내 속도 모르고.... 

  

언니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영 찜찜하다. 이제 저 양반이랑 둘이 죙일 뭘 하고 지내지?

이동을 하는 코스중에 있거나 놀거리가 다양한 곳이라면 그래도 괜찮은데, 서로의 動線이 다 보이는 손바닥 만한, 그것도 인적이라곤 동네 아이들밖에 없는 호젓한 휴양지에서 둘이 할 수 있는건....

영화찍는 거? ㅡ.ㅡ  미티미티!!!    

에라, 모르겠다. 일단 바닷가에 왔으니 수영부터 하지. 뒷일은 뒤에 생각하고....

 

대개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할 때의 복장은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수영복에 수영모 물안경 갖춰쓰고 수영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경우)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럴까? 수영복은 굳이 안 입어도 되지만 물안경이 없으면 물속에서 눈 뜨기 불편하고 수영모 없으면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는데.... 

관습(!)에 따른 복장 문제로 여지껏 바닷가에선 물놀이만 하고 수영은 수영장에서밖에 못해본 나는 필리핀에서야말로 제대로 바다수영 한번 해보리라 벼르고 있었다. 쑥스러워 봐야 바다로 들어가는 단 몇초뿐인데 흉볼테면 보라지. 외계인처럼 제대로 갖춰입고 풍덩! 

 

우리 숙소의 영역으로 표시된 해변의 가로길이는 1Km도 채 안 되어 보인다. 바다로 나가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 수면이 어깨 정도 오는 안전한 깊이에서 해변을 따라 오락가락... 스노클링하는 해변은 아니지만 작은 물고기들은 볼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맑고 파도도 별로 없으니 수영을 즐기기엔 딱이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Victor가 개헤엄을 쳐서 가까이 온다.

'촌놈 수영이네. 난 호주 사람들은 다 수영 잘하는 줄 알았는데?' 하니까 '한국사람들 중에도 김치 못먹는 사람 있을 꺼 아냐' 하고 응수한다. 자기는 수영 배운 적이 없어서 잘 못하지만 이번에 돌아가면 수영강습에 등록하고 내친김에 스킨스쿠버까지 배워서 내년에 필리핀 다시 오겠단다.

그래도 물에 뜰 줄은 알길래 호흡은 몰라도 되는 배영 동작 조금 가르쳐준 뒤에 오후까지 마스터하라고 숙제 내주고 옆집 해변으로 넘어간다. 암만 떨쳐버리려 해도 같이 있는 게 점점 부담으로 느껴지니....

두 집 해변을 건너가니 그곳은 퍼블릭 비치...발디딜 틈 없이 바글바글이다. 휴가기간은 끝났을텐데 학교 방학이라 그러나?(필리핀은 1년에 한 번, 부활절 휴가때부터 시작하여 6월말까지 방학이란다)  어쨌든 우리가 해변이고 숙소고 정말 잘 고른 거야.

 

다시 우리 해변으로 돌아오니 Victor는 축대 그늘이 드리운 곳에 널찍하게 자리를 깔아놓고 누워있다.

한 시간 넘게 수영을 해서 녹초가 됐지만 그 옆에 앉았다간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런 장면이 연출될것 같다. 내가 두려워했던 게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특별한 감정이 없다고 해도 너는 남자, 나는 여자...

햇살이 뜨거워질 테니 나는 방에서 쉬겠다고 하고 내 방으로 돌아온다. 암만해도 이 미묘한 시추에이션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언니 말대로) Victor가 나를 좋아하는 건가?

♠) 그런 것 같기는 해. 지금까지 기회가 없어서 표현을 못한 것 같기도 하거든. 그래서 겁이 나는 거야. 

♤) 밥통아, 서양 남자들이 원래 매너 좋은 거 모르니? 얘기도 잘 통하고 자기 얘기도 잘 들어주니까 너

     랑 있는 게 재밌어서 그러는 것 뿐이야. 네가 놀러나왔다고 잠깐 네 주제를 잊어버린 모양인데 정신

     차려. 오십 다 된 여자를 누가 여자로 보니? 네가 좋다고 달려들면 아마 대략 난감일껄?    

♠) 흠..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쟤 너무 나만 따라다니잖니. 잠시만 안 보여도 '지용, 지용..." 찾고, 완전

     히 작업모드잖아. 아무리 봐도 바른생활 사나이 같은데... 고단수인가? 

♤) 아냐아냐, 호주남자들은 미국남자들처럼 원나잇 스탠드 같은 거 그렇게 쉽게 생각 안 한대.

♠) 그렇겠지?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봐. 그냥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고 혹시 작업 들어오면 그때

     내 입장 밝히지 뭐. 나는 유부녀일 뿐만 아니라 정절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한국의 유부녀다....

♤) ㅎㅎㅎ 진부하지만 어쩌겠니. 사실인걸. 그래, 지레 겁먹고 편한 사이를 공연히 불편하게 만들 필요

     는 없지. 이제 쟤랑 놀 날도 오늘 뿐인데 쟤가 신호를 쏘더라도 모르는 척하고 즐겁게 지내.

 

(이제 됐나?)

  

♠) 근데 말야... 암만해도 좀 웃기긴 하지만 내가 먼저 이런 얘길 꺼낼까봐.  

♤) 아니,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먼저 오바하겠다구?

♠) 혹시라도 너무 화기애애하게 지내다 보면 내가 꼬리칠지도 모르거든.

♤) 뭐라고? 너도 Victor랑 연애하고 싶은 거니?

♠) 너 같으면 안 그렇겠니? 내게 이런 기회가 또 오겠어? 끌리는 것도 사실이고... 나 탐험심도 많잖아.

     남자들이 왜 바람을 피우겠니. 내가 보기에 그건 순전히 그 탐험심 때문이야.  

♤) ㅎㅎㅎ 간도 크다. 그럼 탐험 한번 해보시게나. 요 앞에 클럽도 있던데 밤에 춤추러 가자고 꼬드겨서

     그 털북숭이 팔에 한번 안겨보시지?  

♠)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내가 보긴 그래도 꽤 순진한 구석이 있거든.

♤) 얘, 인생 뭐 있니. 진한 추억 한 페이지 간직하고 가는 거야. 어차피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 복잡하

     게 얽힐 일도 없을 텐데 소심하긴.... 너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한번 가보지 그래?

 

끝도 없이 소설을 쓰고 있는데 Victor가 노크를 한다.

"지용, 지용... 충분히 쉬었어? 점심 먹을 때 됐는데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8일째 스토리 간단하게 가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또 길어집니다. 삼류소설이 되어가고 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