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가난을 이기는 힘-1

張萬玉 2004. 11. 4. 12:17

당시 가족상황

큰오빠랑 셋째오빠는 거의 집에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둘째오빠는 담요를 들러쓰고 밥상을 끼고 앉아 앉았다 하면 한번도 일어나는 법 없이 밤늦도록 앉아 있었다. 주로 수학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 옆에서 나는 늘 배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하곤 했다.


큰오빠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입주 가정교사로 남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큰오빠의 모습은 기억에 없고 ROTC 표지가 붙은 대학교 교복을 입고 집에 몇번 들렀던 생각만 난다.

주간에 같은 고등학교 급사 노릇을 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던 둘째오빠도 한동안은 남의 집에 들락날락 하면서 한입 덜었던 것 같다.

셋째오빠는? 거의 기억에 없다. 엄마 말로는 중학교 다니다 그만 둔 뒤에 구루마 뒤밀이도 하고 버스표도 팔고 하면서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는데 셋째오빠 모습은 거의 생각이 안 난다.


엄마도 어떤 때는 계셨고 어떤 때는 안 계셨다. 엄마가 그 무렵 입주 파출부로 이집 저집 전전했었다는 것은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언니가 끓여준 수제비 먹고 살았나? 엄마 없을 때 어떻게 끼니를 이어갔는지는 별로 기억에 없다. 그저 막내오빠와 뒷산을 누비며 놀던 생각뿐이다. 그리고 주일날 산 넘어 십리 가까이 되는 교회에 다니던 생각.

 

아버지는 어디에 계셨나? 어떤 때는 계셨고 어떤 때는 한동안 안 보이기도 하시고... 공사장에 며칠 나가셨다 안 해보던 막일을 하신 탓에 앓아누우셨던 기억도 난다.


내 유년기의 또다른 키워드--엄마 혹은 교회

대대로 글만 읽었다는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학자의 길을 걸으신 외삼촌...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아내이자 신여성이었던 이모 등 다분히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란, 더욱이 당시 여인네들로서는 문턱을 넘기 힘들었던 명문여고 졸업자인 엄마가 어떻게 중학교 학력에 뜨내기장사를 하는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당시 징용에 끌려가 청년들이 없었나?)


뭐 그렇다고 아버지가 지아비로서, 한 가정의 가정으로서 결격사유가 있었다는 것은 아니고(본의 아니게 사업운이 좋지 않아 마나님을 평생 고생시키기는 했지만) 단지 너무나 다른 성향과 가치관과 문화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었기에 하는 이야기이다. 옛날에는 다 그렇게 만나서 살았다고들 하지만...쩝~


물론 그런 것이 달라도 무리 없이 사는 사람도 많지만 엄마는 좀 독특하고 예민한 분이셨다. 지나치게 관념적이셨고 정신적인 가치를 모든 일의 우선에 두셨다.

엄마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아버지는 땅에 속한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엔 관심이 없고 어차피 살다 가는 인생 즐겁게 살다 가면 그만이라는 아버지의 극히 현실적인 인생관은 엄마의 ‘고매한’ 형이상학을 억압했고, 가난은 엄마의 풍부한 문화적 소양을 고사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모질었다(원덕님의 칼럼 ‘울보할머니의 그림일기’를 볼 때마다 접어버린 당신의 문화적 욕구를 나이 들어서야 조심스럽게 꺼내보시던 엄마 생각이 나 가슴이 아프다).

가난이라는 멍에 이상으로 엄마를 힘들게 했던 것은 정신적인 반려와 함께 하지 못한 고독이었을 게 막내딸네미의 뒤늦은 짐작이다.    


('당시의 나'가 느낀 사실을 중심으로 써나가려고 하는데 쓰다 보니 '오늘의 내'가 자꾸 참견을 하고 토를 달게 되는군요. 주의하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