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가난을 이기는 힘-2

張萬玉 2004. 11. 4. 13:18


엄마가 나를 낳으신 것은 36세... 지금으로 봐도 노산인 셈이다.

내가 열 살 무렵이었을 무렵 이미 아이 여섯을 낳고 지금의 내 나이쯤이셨을 엄마... 고작 아이 하나 키워놓고 이제 맛이 다 갔다고 엄살해대는 내 부끄러운 모습과 비교해 볼 때, 내 기억속에 남아 있는 엄마의 모습은 가난과 끝없이 싸우면서 여섯 아이들을 거두어온 고달픈 중년여인 치고 너무나 생기발랄(!)한 모습이다.


양식이 부족했던 우리 집의 주 메뉴는 수제비 아니면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찐빵이었다. 어제도 수제비, 내일도 수제비...(오죽 지겨웠으면 결혼하기 전까지 칼국수니 수제비니 하는 건 쳐다보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그 한심한 식탁을 준비하면서도 엄마는 어린 나를 앉혀놓고 반죽을 떼어주며 토끼를 만들어라 기린을 만들어라 하시고는 만들어놓은 것을 죽 늘어놓고 얘기를 만들어보라고도 하시고 꾸민 얘길 들려주기도 하셨다. (나라면 그러고 싶었을까)


양은쪼가리 몇 개일 뿐인 살림살이에도 다 애칭을 붙여 부르셨다. ‘달챙이 숟가락’(다 닳아빠졌다고), ‘곰보양재기(쌀 씻는 이남박), 현복이그릇(윗집 사는 현복이가 유난히 얼굴이 납작했다).... 또 엄마와 나 사이에만 통했던 동네 사람들의 별명... 동네 특정장소를 지칭하는 독특한 암호 등등... 돌이켜보면 이런 엄마 특유의 유머감각이 아마 가난의 고단함을 이기는 힘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린 나와 마주 앉아 봉투붙이기도 하고 실밥뜯기도 하면서 가르쳐주신 수많은 동요... 우리나라 동요도 있었지만 일본어 동요가 더 많았는데, 해석해달라고 조르는 나에게 즉석에서 한국어로 운을 맞춰 불러주시기도 하고....아직도 대여섯 곡 정도는 기억이 난다. 가끔 '나쓰까시 하다"는 말을 자주 쓰셨는데 훗날 생각 나 사전을 찾아보니 참으로 당시의 엄마 정서에 딱 맞는 단어였던 듯...(지나간 세월에 대한 향수에 젖어 쓸쓸함을 표현하는...) 

우리 가곡도 즐겨 부르셨고 여고시절에 즐겨 들으셨다는 클래식 기악곡들을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니) 허밍이나 ‘라~ 라~’로 늘 흥얼거리셨다(심지어는 난이도가 높은 쯔고이네르바이젠까지...) 내 초등학교 시절 별명이 ‘라디오’였던 것도 엄마의 이 취미와 무관하지 않다.


술과 도박과 풍기문란과 욕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달동네 환경 속에서 자식들을 순결하게 키워내기 위해 엄마는 보이게, 혹은 안 보이게 무진 노력을 하셨던 것 같다.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들은 기억도 별로 없고 크게 야단을 맞은 기억도 뚜렷하게 없지만 우리 형제들은 기특하게도 엄마의 뜻대로 ‘범생이’의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길에서 돈을 주으면 군고구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교회 연보함으로 직행... 유행가도 안 부르고, ‘새끼’니 ‘년’ 같은 욕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언젠가는 한번 해보고 싶어서 방문 닫아걸고 몰래 해본 적은 있다 ㅎㅎ)....


한번은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민화투를 배운 오빠가 얼마나 그게 하고 싶었던지 빳빳한 도화지를 작게 잘라서 색연필로 ‘1학’, ‘1띠’, ‘1껍’, ‘1껍’ 등등을 써서 사제화투를 만들어가지고 순진한 나를 꼬여 화투를 가르쳐 주었다. 하도 재미있어서 몰래 몇 차례 놀다가 결국 엄마에게 자수를 했다는.... (엄마가 화투를 치지 말라고 한 적도 없고 들켰다 해도 매를 들거나 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왜 그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ㅎㅎ 한마디로 집안 분위기에 알아서 기었다는 얘기지)

엄마한테 야단을 맞은 기억? 글쎄...

오빠하고 싸우면 오빠랑 내 손 하나씩을 함께 묶어놓고 실컷 싸워라! 하시던 기억...

어쩌다 잘못을 해도 무릎 꿇어라 하시고는 마주 앉아 함께 눈물로 기도를 하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자식들이 엄마 뜻 거슬리는 것을 천하의 못할 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도대체 엄마의 카리스마는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엄마 손에 이끌려 어렸을 때부터 다닌 교회에서 이미 체득하는 것이 많았으니

그것들이 엄마의 가정교육의 큰 조력자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실천하려고 애쓰시던 엄마의 모습 자체가 우리 형제들의 어린 양심(?)을 압도한 힘이 아니었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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